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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알 수 없는 운명은 더 아름답다
1부 기억의 독단 01 날지 못하는 피터 팬 어른이 되었다 ? 순수의 우연 ? 우상의 황혼 ? 껍질을 깨고 02 우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뒤돌아선 예언 ? 우연과 필연 사이 ? 신의 도박장 03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 열린 체계 ? 길 없는 길 ? 명료함의 함정 ? 망각의 힘 04 새로움에 대한 찬양 정도전을 위한 변론 ? 개선이냐, 전복이냐 2부 구조의 무의식 05 아직도 구조주의 이방원을 위한 작은 변론 ? 욕망의 모순 ? 구조의 심리학 06 연극 속에서 소유와 소속 ? 시선의 욕망 07 타자의 담론 본질을 겉도는 표상 ? 우월치의 미덕 ? 가상의 타자 08 사랑, 그것은 사랑 그대로의 사랑 ? 바넘 효과 09 통계의 오류 기계적 진화론 ? 그들 각자의 인문학 3부 절망에 관한 단상 10 고독의 양면성 캐스트 어웨이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외로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11 죽음에 대한 단상 공포가 만들어내는 용기 ? 끝의 의미 ? 죽음이 거기 있기에 ? 부활의 신호 12 절망을 걷고 있는 여행자 여행자 그리고 조난자 ? 너머를 넘어서 13 긍정의 오류 긍정의 끝판왕 ? 불안의 기능 14 이소룡 커넥션 그들 각자의 정무문 ? 어느 스턴트맨의 사연 ? 이소룡이었던 자 15 그대만의 계절 꽃이거나 열매이거나 ? 존버정신 4부 순간을 산다 16 차이와 반복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지루함의 형벌 ? 일상과 이상 ? 이미 다가와 있는 미래 17 너 자신이 되어라! 이데아 그리고 시뮬라크르 ? 철갑의 페르소나 ? 자신의 자격 18 주체들의 각성 슈퍼맨의 선택 ? 기성들의 잘못 ? 충동에 충실하라! ? 자아의 신화, 자아의 환영 19 청춘 예찬 청춘이란 이름의 영원회귀 ? 여름날의 꿈 5부 존재한다는 것 20 체험으로서의 인문 시선의 변증법 ? 시선은 권력이다 ? 인문적 체험 ? 길치들을 위하여 21 삶의 문법 시대정신 ? 연암 박지원 그리고 문체반정 ? 시대의 문법과 독법 ? 살아가는 이야기 22 난제의 텍스트, 에반게리온 해석의 문제 ? 페르소나적 갈등 23 나르시스의 변명 도덕적 우월감 ? 나르시스 콤플렉스 ? 완벽으로부터의 자유 ? ‘지금 여기’의 문제 에필로그 우연을 사랑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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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주요 키워드는 ‘차이’와 ‘타자’다. ‘타자’들은 나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나와는 다른 ‘차이’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나의 예측성을 비껴가는 속성들이기에, 철학은 타자를 ‘우연적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 우연들과의 ‘관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이래저래 불확실성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현대철학에 이 ‘우연’의 주제를 던져준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는 삶이 지닌 우연성을 ‘신이 던진 주사위’에 비유한다. 불확정성 원리를 향한 아인슈타인의 일갈과는 달리, 니체에게 신은 주사위를 던지는 존재다. 그러나 신의 주사위는 늘 하늘에 던져져 있는 상태일 뿐, 땅에 떨어져 어떤 수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의 삶에 ‘확실’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믿으라는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이며 아모르파티다. ---「프롤로그」중에서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단을 밟고 올라서서, 그렇게도 갈망했던 네버랜드의 담장 밖 너머를 내다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 단에 올라서지 못한 ‘아해’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희는 삶의 깊이를 모르노라!” 그러나 높이가 곧 깊이인 것은 아니다. 시간의 축적만으로 어른의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종종 착각을 한다. 자신이 쌓아올린 높이를 재고, 그것을 심연의 깊이로 환산하며, 그것을 빌미로 어린 세대의 말과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니체에게 심연이란 더 깊은 곳이라기보다는 깊이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는 지점이다. 오히려 깊이를 모르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들에 심연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1부 기억의 독단」중에서 어쩌면 멘토들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라는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아직 당사자에게서 검증도 되지 않은, 한낱 가정의 전제일 뿐이다. 인생이란 난제는 단순한 공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상수는 그저 ‘나’라는 요소 하나일 뿐, 나머지는 온통 미지수로 가득한 방정식이기 때문이다. 그 고차방정식 앞에서 ‘일만 시간’도 ‘마시멜로’도 정답일 수는 없다. 삶의 미분 값은, 매 순간을 살아가는 ‘나’일 뿐이다. 먼저 걸어갔다던 누군가의 이야기만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은 영원히 찾아지지 않는다. 정해진 하나의 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지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의 길이 생겨난다. 내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나의 길이다. 길은 내 앞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2부 구조의 무의식」중에서 불확실성에 거는 기대는 주관적인 희망이다. 절망은 객관적이라고 착각하는 주관적인 확신이다. 즉 희망은 확률이지만, 절망은 확신이다. 그래서 절망은 희망보다 설득력과 감화력이 강하다. 실상 절망 속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절망감의 정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오직 절망하는 것밖에는……. 그럴 바에는 그 시간적 여유로 격언들을 체험하고 증명하는 기회라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인데! 계속 걸어가다 보면 또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 지닌 불확실성의 매력이다. 인생 아직 모르는 거다. 여기서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은 나의 확신이다. 어린 왕자가 말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야.”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삭막하고 거친 여정 속에 숨겨둔 반전 때문이다. 절망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희망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3부 절망에 관한 단상」중에서 제아무리 슈퍼종자라고 한들 언 땅에 싹이 돋을 리 없다. 씨앗의 생명력만큼이나 얼어붙은 땅이 적당히 녹는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씨앗으로서의 소임을 다 하며 땅이 녹을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싹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아닌, 당장에 꽃과 열매가 되지 못함에 절망한다. “존나게 버텨라!” 이외수 작가가 청춘에게 늘 강조하는 바가 바로 ‘존버정신’이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시련은 내가 이겨냈다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것들이었다. 이겨내는 법을 배웠다고 하기엔 다시금 맞닥뜨리는 시련 앞에서 또 당황하고 방황하는 우리가 아니던가. 시련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라기보다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인지도 모른다. 힘이 길러진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길러지는 것이다. ---「3부 절망에 관한 단상」중에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시간보다는 세상이 정해 놓은 시간에 맞춰 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기 인생을 후회만 할 뿐, 지금이라도 무언가에 도전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현실을 직시한다는 이유를 안고 당장 보이는 길로만 걸어들 간다. “이 나이에 무슨…….” 누구도 당신의 나이를 묻지 않았다. 당신의 꿈을 물어봤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의 대답은 문맥에도 맞지 않는 ‘나이’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 이미 언어 체계가 달라진 것이다. 훗날 언젠가는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나이의 언어로 술회하고 있을 것이다. ---「4부 순간을 산다」중에서 많은 색깔을 지니고 있는 카멜레온이라고 할지라도 당장에 필요한 색깔은 하나뿐이다. ‘지금 여기’에 제고되어야 할 문제는 다양함이 아니라 적절함이다. 상황과 맞지 않는 엉뚱한 색이 두드러져 보인다면,변화무쌍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여러 가지 색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당신을 가능으로 이끄는 것은 지금 필요한 색깔이다. 나머지는 말 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나머지 가능성이 있음을 토로해봤자 지금이 가능하지 않다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5부 존재한다는 것」중에서 긍정의 철학, 그것은 부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지렛대 삼아 딛고 나아가는 긍정이다. 저기에서 기다리는 미지와 여기에 가로놓인 무지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삶이 가져다주는 의외성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걱정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의식케 하는 각성제이기도 한 것이다. 강을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의 흐름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이 허무의 물살을 거스르는 역동성인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던지고 가는 우연은 우리를 진화시키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 지혜를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필연의 기치는 오직 하나다. 네 우연을 사랑하라! ---「에필로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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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인문학, 아모르파티
하늘의 왕자 피터팬은 왜 고소공포증을 앓게 되었는가? 하늘의 왕자 피터 팬이 고소공포증에 걸려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하게 된 까닭는 무엇일까? 어른들과 함께 사는 세상 속에서는 굳이 날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늘을 활공하던 자유의 시절은 이제 기성 세계에 끼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하지만 기성의, 어른의 세상을 바꾸어온 이들은 여전히 하늘을 나는 꿈을 꾸던 피터 팬들이었다. 한문학을 전공했지만 니체에 이끌려 서양철학에 들어선 한문학도, 저자 미니(迷尼, ‘니체의 마니아’라는 뜻)는 신간 《신이 던진 주사위》(미니 지음, 아템포 출간)를 통해 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피터 팬들에게 하늘을 다시 기억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성의 세계’가 제시하는 인생의 ‘정답’만을 좇기 때문에, 인생은 어차피 우연일 뿐이라는 니체의 진리를 잊어버리곤 한다. 다른 사람이 일구어온 ‘타인의 인생 지도’가 자신에게도 진리인 양 믿고 두 손에 꼭 거머쥔 채 한 번뿐인 나의 인생을 타인의 인생으로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니체에 따르면 삶의 방식에 정해진 답이 있다는 것은 거짓된 신화일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무례함 그 자체이다. 신은 주사위를 던진다. 하지만 그 주사위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주사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지만, 우리 각자의 주사위는 아직 하늘에 떠 있다. 정해지지 않은 인생이기에 정답 또한 없는 것. 주사위의 숫자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그저 우연의 영역일 뿐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깨닫는 우연의 미학 “확신할 수 있는 운명은 아름답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운명은 더 아름답다!” 저자는 신간 《신이 던진 주사위》에서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니체와 들뢰즈 등의 실존철학은 물론 공자와 노자 등 동양철학까지 배경으로 삼아 영화와 문학, 미술사 등을 소재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이 책은 이 시대를 가장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은 물론, 인생을 회사 등 저항하기 어려워 보이는 기성세력에 저당 잡힌 채 자신만의 인생을 탄식으로 내려놓은 수많은 ‘방황하는 인생’들을 향한 철학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갇혀 있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새로운 것들을 향해 가는 창조적 탈주. 그 역동의 시간성을 긍정할 수 있는 존재는 아이들밖에 없다. 어른들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는다. 자신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언제나 일정한 시공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본문 16~17쪽) 저자는 니체가 사랑한 어린아이를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소위 ‘인생 멘토들의 가르침’을 향한 강한 일갈과 함께. 인생은 사방이 탁 트인 사막인데, 어찌 그 길에 ‘멘토의 길’만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사막의 지형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그때 저기’에서 만든 멘토의 지도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지도가 될 수 있겠는가. 이에 저자는 ‘갇혀 있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새로운 것들을 향해 가는 창조적 탈주자’, 즉 니체의 어린아이를 ‘청춘’과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오직 어린아이들만이 매 순간을 역동의 시간으로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사과 상자에서는 ‘트랜스포머의 가능성’을, 설치하다 남은 행거 파이프에서는 ‘엑스칼리버’를, 그리고 수챗구멍으로 소용돌이치는 설거지물 위의 종이배에서는 〈캐리비안의 해적〉 속 ‘블랙펄의 침몰’을 발견해낼 수 있는 ‘성스러운 긍정’이 사막 위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인생에 대한 자세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생에 대한 긍정이며, 이것이 바로 인생은 필연이라는 신화에 대한 ‘우연의 미학’이 갖는 진실성이라는 것이다. 미지수의 자리를 늘 걱정과 불안으로만 채우고 있다면 방정식의 해법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치기이고 착각일지언정 차라리 오류로 나아가는 ‘실천’이 오히려 삶이라는 이 어려운 고차방정식의 해법일지 모른다. 돌아보면 초라하고, 비참하고, 어두운 과거일지언정, 그 어떤 모습도 지금을 가능케 한 ‘반성’이지 않았던가.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었을지언정, 몰랐던 또 하나의 그름을 깨달아가는 옳음이기도 했다. (본문 21쪽 중에서) 저자 자신 또한 기성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청춘이자 방황자이기에 그가 니체의 사유에서 찾아낸 결론은 더욱 가슴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긍정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니체의 사유 ‘아모르파티’(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를 자신의 인생 경험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는 다음 두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운명은 아름답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운명은 더 아름답다.” ※ 제목 ‘신이 던진 주사위’에 대한 저자의 변 (‘프롤로그’ 중에서) 현대철학의 주요 키워드는 ‘차이’와 ‘타자’다. ‘타자’들은 나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는, 나와는 다른 ‘차이’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나의 예측성을 비껴가는 속성들이기에, 철학은 타자를 ‘우연적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그 우연들과의 ‘관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이래저래 불확실성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현대철학에 이 ‘우연’의 주제를 던져준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는 삶이 지닌 우연성을 ‘신이 던진 주사위’에 비유한다. 불확정성 원리를 향한 아인슈타인의 일갈과는 달리, 니체에게 신은 주사위를 던지는 존재다. 그러나 신의 주사위는 늘 하늘에 던져져 있는 상태일 뿐, 땅에 떨어져 어떤 수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의 삶에 ‘확실’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믿으라는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이며 아모르파티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제목 ‘신이 던진 주사위’는 나의 선택이었다. 물론 어떤 확신이 있어서 이 제목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단지 계속 마음이 가는 제목 앞에서, ‘너 자신이 되라’는 니체의 철학을 살아보고자, 나 스스로 주사위를 집어든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