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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문제의식과 제기 연구주제와 방법 2.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 직제 자비대령화원 직제의 설치 자비대령화원 직제의 운영 3.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제도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시험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성적 4. 녹취재의 화문과 화제 녹취재 화문의 종류와 특징 녹취재 화제의 성격과 출전 5. 인물화계 화문의 화제 "인물" 화문의 화제 "속화" 화문의 화제 6. 산수화계 화문의 화제 "산수" 화문의 화제 "누각" 화문의 화제 7. 화조화계 화문의 화제 "영모" 화문의 화제 "초층" 화문의 화제 8. 기타 화문의 화제 "매죽" 화문의 화제 "문방" 화문의 화제 9.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의 회화사적 의의 조선 후기 화원 제도 연구상의 의의 조선 후기 화원 회화 연구상의 의의 10. 결론 Abstract 참고문헌 도판목록 조선 후기 연대 대조표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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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회화 이념의 구현, '자비대령화원 직제'
18세기의 정치적 안정에 따른 사회경제적 발전과 국왕이 주도하는 탕평 정치의 출현은 중인 사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등의 화원화가들이 당대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회화사적으로 훌륭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일차적으로는 18세기의 문예 중흥과 중인 계층의 성장이라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전제한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화원화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며 특히 괄목할 만한 성과가 많이 나타났던 것은 이 시기에 도화서 화원의 운영 체제가 변화되어 화원들의 근무 여건이나 도화 활동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원 운영의 제도적 변화는 영정조대의 강력한 왕권 정치와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이 크게 변화된 사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바로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들이 존재했다. 강력한 왕권 정치와 개혁 정치를 주도하면서 규장각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정조는, 1783년 창덕궁의 규장각에 새로운 궁중화원 직제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고종대의 1881년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며 총 100여 명의 궁중화원을 배출했다.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을 비롯하여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이한철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원화가들은 모두 이 궁중화원 출신이었다. “자비대령화원”이라 불린 이들은 궁궐 밖 예조(禮曹)에서 근무하던 도화서 화원들과 달리 궁중 안의 국왕 주변에서 국왕을 위한 도화 활동을 담당하며 특별 대우를 받았다. 조선 후기 최고의 기록화로 평가되는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의 탄생 역시 정조대의 규장각 자비대령화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