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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을 대신하여 _유린당한 생명을 찾아서
1. 예수쟁이와 예수꾼이 된 사연 2. 천민들의 신앙산맥 3. 관잣골의 박가 성춘 4. 왕손 이 목사와 마부꾼 엄 영수 5. 선비 및 양반교회 6. 성신강림의 땅 원산 7. 남편 찾아 하와이로 부록 애꿎은 나라 운명과 개신교의 선봉들 양인이냐, 한인이냐? 호랑이 계곡에서 연애를 하다_허망한 나라 선교의 고전지 민비의 가슴을 헤치다 후기/ 발간사 _전국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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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우리는 한국적인 신학의 수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토착화 신학의 수립ㆍ동양학ㆍ국학ㆍ민속학 등 그리고 이른바 국적 있는 민주주의의 정립이 시급하다는 말을 많이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권 옹호니 인권 투쟁이니, 정의와 자유니 하는 부르짖음을 교계에서 많이 듣는다. 너무나 지당한 운동이다. 하나 이러한 사회참여와 함께 교회는 교회 안과 그 주변에서 유형무형의 수많은 선량한 생명들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의 인권유린을 규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생명을 죽이고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연약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닌가? 무릇 정기(正氣)는 유순하고 사기(邪氣)는 드세게 마련이다. 진실은 고요하고 거짓은 화려하게 마련이다. 정신은 숨어 있고 물질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회가 드세고 화려하고 드러나는 일에만 극성을 부린다면 그게 종교인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중국만을 숭상하다 망한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제정신은 다 잃어버리고 남의 흉내만 내다가 망한 것이다. 토박이 사상은 무시하고 외래 사상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회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_14-15면, ‘서론을 대신하여’ ◀예수가 이런 꾼으로 여겨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꾼은 쟁이와 마찬가지로 비천한 것이지만 꾼의 성격은 쟁이보다 더 뚜렷하다. 그러므로 예수꾼은 개화꾼과 거의 같으며 독립꾼과는 형제라고 할까? 사촌이라고 할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어디로 가든지 별명을 받았다. “아기를 낳으면 예수라 하라”해서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수의 아들”이란 별명을 받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란 별명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는 예수쟁이, 예수꾼이 되고 나중에 천주악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주악쟁이란 무슨 말인가? “천주학쟁이”를 한자로 풀이하면 ‘天主學匠’이다. 그것이 집권자들의 미움을 사가지고 ‘天主惡匠人’, 즉 천주악쟁이가 된 것이다. 이 별명에는 단순한 별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고난의 역사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별명을 받은 때부터 저주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천주교도들은 수없이 학살당했고, 개신교 신자들은 언제나 시시한 것들ㆍ위험한 자들ㆍ불순한 자들ㆍ반동분자로 몰리면서 살아왔던 것이다._22면, ‘예수쟁이와 예수꾼이 된 사연’ ◀어쨌든 한국 기독교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앙을 지킨 사람들 중에서 두 가지 형태의 신자를 발견한다. 하나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하며 목숨을 내던지는 순교형 신자고, 또 하나는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며 피해 버리는 은둔형 신자다. 전자는 비참하고 후자는 쓸쓸하다. 전자는 역사에 오르고 후자는 못 오른다. 허나 후자는 전자의 비참함을 부러워해서는 아니 되며, 전자가 후자의 슬쓸함을 흉내 내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옛날 참다운 선비들, 특히 정몽주 선생은 이 두 가지 형을 다 지니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축복 없이는! _110~111면, ‘선비 및 양반 교회’ ◀‘기도꾼’을 천하게 여기는 우리 심리도 이런 경우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 같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자 문화에 젖어서 토박이 말이면 무조건 시시하게 여기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꾼’을 천시하는 습성은 유교의 노동천시사상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우리 선인들은 사·농·공·상이라 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놀고먹는 선비만이 높고, 육신을 놀려 생산하는 농사꾼, 일꾼 따위는 낮게 여겼다. 그러나 ‘꾼’은 본래 ‘힘’을 상징하는 말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예수꾼, 기도꾼 같은 별명을 받은 것은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과 달리 사회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_173면, ‘성신 강림의 땅 원산’ ◀진실로 이 나라는 허망한 나라, 선교의 고전지였다. 이 낭설의 전통이 이 나라 후손들의 골수에 박혀 이것이 자유당(自由黨)에 들어가고, 한독당(韓獨黨)에 들어가고, 민국당(民國黨)에 들어가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사고방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일 한심한 것은 이것이 종교계에 스며든 사실이다. 우리 종교인들은 너무 말이 많아 골치다. 조작이 많아 골치다. 까닭 없이 의심하고 멋없이 쉽게 믿어 골치다. 이것이 다 낭설의 왕국 후손들의 병통임에 틀림없다. 허망한 나라, 낭설의 왕국 백성들 속을 통과하는 복음의 대열, 즉 원두우와 홀톤의 신혼부부 가슴에는 오직 복음과 침묵과 인내와 비밀과 또 연애만이 있어 용감할 수 있었다. _217면 ‘호랑이 계곡에서 연애를 하다’ ◀이렇게 보면 나는 목사들을 까고 평신도 편만 드는 셈이 되었다. 그럴 심사는 조금도 없다. 다만 형식과 규칙만 따지는 한국 교회를 슬퍼할 따름이다. ‘강단의 선교’만을 알고 ‘행위의 선교’를 모르는 한국 경건파들의 바리새주의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나는 묻는다. 한국 사람의 상한 가슴을 헤친 사람이 누구인가? 불쌍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어 서로 통정한 자가 누구인가? 개미도 들어갈 수 없는 왕비 내실에 영접을 받고 고임 받은 자가 목사인가 행위자인가, 강한 자인가 미약한 사람인가, 용감한 자인가 비겁한 자인가, 책략가인가 솔직한 시골뜨기인가, 국경을 뚫고 들어가는 용감한 천주교였던가, 그렇지 아니하면 비겁하게 변두리에서 빙빙 돌며 국내 정세만 살피다가 정식 여권을 가지고 들어가는 비겁한 신교(新敎)였던가, 나는 겸손하게 이를 묻고 한국 교회의 맹성(猛省)을 촉구하는 바다. _226면 ‘민비의 가슴을 헤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