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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자코뱅』에 대하여
서문 1판 서문 들어가는 글 1장 백인의 소유물, 흑인 2장 노예소유주 3장 프랑스 의회와 노예 4장 산도밍고의 시민 반란 5장 파리 시민의 후원 6장 투생의 등장 7장 물라토의 도전과 좌절 8장 백인 노예소유주의 재부상 9장 영국군의 축출 10장 투생, 권좌에 오르다 11장 흑인 집정관 투생 12장 부르주아 계급의 노예제 복원 기도 13장 산도밍고 독립전쟁 주석 참고문헌 부록편 : 투생 루베르튀르에서 피델 카스트로까지 옮긴이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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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매매와 노예제도는 18세기의 경제상황에 맞물려 있었다. 그러면서 세 세력들, 즉 산도밍고의 독점 식민지 지배자들,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모두 한 대륙을 황폐화시키고 수백 만 명을 짐승같이 착취하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력들이 균형을 유지하는 한, 극악무도한 노예매매는 계속될 운명이었고, 어쩌면 현재까지도 계속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윤이 나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농장주와 프랑스 및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세력 형성과정 자체에 의해 내부의 긴장을 야기하고, 외부의 갈등을 키우다가 결국에 가서는 자신들의 지배체제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노예 해방의 가능성을 열 폭발과 갈등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p.54 득의양양한 이 노예소유주들이 18석을 요구하자, 미라보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당신들은 거주민 수에 비례하여 대표의석을 요구하고 있소. 자유 신분의 흑인들도 재산 소유자고 납세자요.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까지도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고 있소. 게다가 노예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사람이거나 또는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요. 식민주의자들이 그들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노예를 풀어주도록 하고, 그들에게 선거권을 주고, 그들에게 피선거권을 주도록 하시오. 그런데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가 프랑스 인구수에 따라 대표직을 할당할 때 우리가 소유한 말과 노새도 계산에 넣었단 말이요?” 산도밍고는 단 6석의 대표석만 할당됐다. 채 5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이 위대한 자유주의 연설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말로 흑인우애협회의 주장을 프랑스의 전체 대표 앞에서 정면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마침내 산도밍고 대표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산도밍고의 운명을 혁명 중인 사람들의 의회와 연계시킨 우를 범한 것이었다. 그때 이래 프랑스에서의 자유의 역사와 산도밍고에서의 노예 해방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 p.96 이와 같이 파리에서 1793년 3월에서 1794년 7월까지의 시기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보수반동 세력은 오로지 몇 천 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만 볼 줄 알지만 실제로는 정치 역사상 가장 숭고한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로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이 그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시기는 한번도 없었다. 그 영향력이 모든 종류의 통치기구에 미치고 또 권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이 짧은 시기에 대중들은 흑인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을 형제로 인식했으며, 예전의 노예소유주들이 반(反)혁명 지지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치 프랑스 사람들이 채찍의 고통을 당했던 듯이 노예소유주를 증오했다. --- p.193-194 로샹보는 많은 사람들을 르캅 만(灣)에 수장시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던져졌던지 이 지구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생선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로샹보는 쿠바에서의 스페인군과 자메이카에서의 영국군이 보인 전례를 좇아 흑인 사냥용으로 1500마리의 개를 풀어 놓기도 했다. 이 개들을 들여온 날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전에 예수회 수도회 운동장으로 쓰였던 곳에 원형극장 형태의 무대가 세워졌고, 어느 날 이 안으로 흑인 한 명을 끌고 와 나무 기둥에다 결박시켰다. 그동안 르캅의 백인들, 특히 여성들은 휘황찬란한 의상을 차려입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드디어 군악 소리에 맞춰 자신의 참모들을 주위에 거느린 로샹보가 등장해 개들을 풀어놓았다. 처음에 이 개들은 희생자를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사망한 뒤구아의 후임 수석 참모인 부아예가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서는 자신의 검으로 기둥에 포박당한 흑인의 배를 단칼에 개복했다. 이 모습을 보고 피 냄새를 맡은 개들은 그제야 흑인에게 달려들어 눈 깜짝할 새에 깨끗이 먹어치워 버렸다. --- p.475-476 --- 본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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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제도의 식민지는 17세기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식민지경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사탕수수를 가공하는 과정과 관련된 설탕산업은 해운업자, 무역상인, 금융업자 등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유럽의 해상 부르주아지들과 식민본국에 부의 원천이 되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영국, 프랑스가 차례로 이곳에 들어와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무렵에 산도밍고는 프랑스에 가장 큰 경제적 이득을 안겨주는 곳이었다. 이곳은 서인도제도 최고의 식민지였던 영국령 자메이카를 앞지르고 서인도제도 최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한 해 수출액 1700만 파운드 중 1100만 파운드가 산도밍고 무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국 식민지 무역이 한 해 500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식민지의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수의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1789년까지 이곳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의 수가 무려 46만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규모적인 인구이동은 이 지역에 큰 변화를 일으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안한 인종문제를 야기했고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불똥이 이 지역으로 옮겨 붙는 원인이 됐다. 프랑스혁명 시기 프랑스 정치세력들 간의 갈등은 그대로 식민지에서 재연되었다. 백인 지배자들은 저마다 입장에 따라 정치색이 달라지고 혼혈인인 물라토들은 백인과도, 흑인과도 이해를 같이하지 못하고 반목과 협상 사이를 오가는 등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심해졌다. 이 틈을 타 북부지방에서 시작된 노예반란이 전국으로 급속히 번져갔다. 반란 노예들을 조직된 힘으로 이끌어낸 사람이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그는 탁월하고 확신에 찬 지도력으로 반란 노예들을 결집시켰고, 스페인군, 영국군, 프랑스군의 잇따른 침공도 막아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산도밍고에서 노예제도를 회복시키고 이곳을 카리브 지역을 제패하기 위한 전략적 기지로 만들고자 나폴레옹이 파견한 대규모 군대는 루베르튀르를 프랑스로 데려가 감옥에 가두긴 했으나 산도밍고의 흑인 게릴라들과의 지루한 전투 끝에 거의 괴멸당한 채 되돌아갔다. 프랑스 군대가 돌아간 뒤인 1804년 1월 루베르튀르의 후계자인 데살린이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세워진 첫 번째 흑인 공화국이다. 노예 출신 흑인들이 유럽 최강의 군대들인 스페인군, 영국군,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가공할 만한 선례를 남겨 노예제도를 흔들리게 만든 원인이 됐다. 노예반란의 불꽃이 프랑스 소유의 다른 섬들은 물론이고 영국령 섬들에까지 번져갔다. 아이티가 독립한 지 겨우 3년이 지난 후 영국은 노예무역을 중지했고, 30여년 후에는 모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것은 아이티혁명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지만 이 혁명에 따른 결과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티혁명은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혁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서인도제도의 흑인들이 아이티혁명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저자인 제임스는 아프리카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는 서인도제도 사람들이 스스로 아프리카 사람으로서의 자각을 가질 때 비로소 독립적인 국민으로 설 수 있다고 보았다. 아이티혁명은 프랑스혁명의 불꽃에 의해 점화됐지만 결국에는 프랑스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노예제도라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굴레의 끊임없는 위협 앞에 무방비로 내몰리는 인종으로서의 자각이 있어서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