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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7년, 혁명 전야
2. 1969년, 우리만 옳다는 법이 있나? 3. 1971년, 메인 가의 망명객 4. 1971년, 영화관객 5. 1972년, 왕이 될 사나이 6. 1973년, 구르는 돌처럼 7. 1973년, 악마를 위한 관현악 8. 1973년, 성 마틴의 복음서 9. 1975년, 너드의 화려한 복수 10. 1976년, 시민 카인 11. 1977년, 스타벅스 12. 1979년, 해체가 시작되다 13. 1979-80년, 붕괴 전야 14. 1980년대, 우린 기회를 날렸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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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에 이르러 헐리웃에는 하얀 눈이 세차게 내렸다. 코케인은 너무도 널리 만연해 사람들은 목에 장신구처럼 작은 금숟가락을 달고 다녔다. 친구, 보이프렌드 등 친밀한 사이는 마약 커넥션으로 변했다. 식당에 가면 웨이트리스에게 코케인 한 줄을 팁으로 남기고 일어서는 것이 상례였다. 지치고 건강이 악화된 데다가 만성적으로 마약에 취해 있던 스콜쎄지는 마약이라면 무엇이든 손을 댔다.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동침했고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에 손을 댔다. 이어서 '뉴욕 뉴욕'이 끝나갈 무렵 제작자 조나싼 태플린이 전화를 걸었다. 더 밴드가 해체될 참이었고 그는 스콜쎄지에게 1976년 추수감사절에 있을 그룹의 마지막 연주회에 대한 기록영화를 만들라고 제의했다. 이것이 '마지막 왈츠'가 될 것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를 승락했다. '뉴욕 뉴욕'을 제작한 어윈 윙클러에 의하면 "그는 로비 로버쓴과 더 밴드에 관해서는 부정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낮에 극영화를 편집하면서 밤에 이 영화를 편집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마음의 상태였다. 태플린에 의하면 "마티는 거의 불이 붙은 듯 밤낮없이 편집실에 나타나 한 씨퀀스를 편집하고 다음 일로 넘어갔다."
쥴리어 캐머런이 1977년 1월 집을 나간 후 로버쓴은 가족과 함께 마티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집으로 이사해 들어왔다. 영화스타가 된다는 망상이 있었던 로버쓴에게 마티는 매우 훌륭한 입장권이었다. 로버쓴에 의하면 "우리는 말썽을 찾아다니는 기괴한 쌍이었다." 쌘디 와인트롭의 회고에 의하면 "마티가 동성애자가 아닌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로비와의 관계는 아마도 그가 가졌던 최고의 인간관계일 것이다." --- p.5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