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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면서
제1장 서론 제2장 군사점령과 점령 통치 기구의 수립(1945년 8~12월) 제1절 군사점령에 기초한 군사적 점령 통치 체제의 수립(45년 9월 8일~10월 중순) 1. 구체제의 위기와 새로운 동맹의 결성 2. 군사점령 과정과 그 의미 3. 점령 통치 체제의 수립 4. 소결 제2절 군정 부대의 진주와 국가 기구의 수립(45년 10월 하순~12월) 1. 초기 탁치 구상과 ‘기능주의적’ 대한 전략 2. 군정 부대의 진주와 국가 기구의 재건 3. 소결 제3장 반공 체제의 형성 제1절 모스크바협정과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경쟁의 시작 제2절 반공 국가 기구의 완성 1. 민사 행정 체제의 분리와 중앙집권화 2. 군정의 지방 장악과 ‘대항 국가 세력’의 종식 제3절 좌파 통제 기제와 우파 국가 권력 집단의 형성 1. 좌우 대립 구도의 구축과 좌파 통제 기제의 확립 2. 남한국가의 국가 권력 집단 형성 제4절 소결 제4장 남한국가의 기반 확대 및 개혁 시도와 좌절(1946년 5월~47년 6월) 제1절 국무성의 신정책 1. 통합·개혁 노선과 비(非)공산 중도 연립정부 구상 2. 경제 안정화·부흥 구상과 좌절 제2절 국가 기구의 현지화 및 국가 기구 개혁 시도의 좌절 1. 점령 통치 기구의 현지화 2. 점령 권력 개편 시도와 국가 기구의 자유주의적 개혁 시도 제3절 국가 권력 집단의 확대 시도와 좌절 제4절 소결 제5장 반공 체제의 강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1947년 7월~48년 8월) 제1절 단정 노선의 확정과 단정 수립 국면의 점령 정책 제2절 반공 체제의 강화 1. 점령 통치 구조의 변화 2. 국가 기구 정비와 확대 제3절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의 이식 1.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이식 2.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이식 제4절 5·10선거와 정부 수립 1. 5·10선거에 대한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2. 5·10선거와 그 결과 3. 제헌과 정부 수립 제5절 소결 제6장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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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서론
그간 해방 3년사에 대한 연구는 “왜 해방 3년사는 단일의 민족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분단 체제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에 집중되어 왔다. 이를 둘러싸고는 분단 체제의 형성을 미ㆍ소의 남북 분할 점령과 냉전의 산물로 해석하는 외인론과, 미ㆍ소를 중심으로 분열ㆍ대립함으로써 냉전의 국내화를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분단을 초래한 국내 좌ㆍ우 정치 세력의 대응 양식을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전개된 좌ㆍ우합작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인론이 대립해 왔다. 외인론과 내인론은 그 인식과 실천적 전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야기한 미ㆍ소 냉전이 강고하게 유지되는 현실에서 냉전의 산물인 분단 체제를 우리의 주체적 노력으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그동안 우리는 분단 극복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개혁이나 민주주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왔다. 분단이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상정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붕괴와 북한 체제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이런 논의는 그 현실적 근거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권위주의 해체와 더불어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게 된 지금 그 실천적 유의미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저자는 지금의 현실은 연구 시각의 일정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제 냉전 체제가 붕괴하고 또한 남북의 국력차로 북한이 더 이상 체제 위협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반공 체제가 강고히 유지되는 현실은, 분단이 낳은 냉전 반공 체제가 이미 분단이나 냉전과 상관없이 남한 사회에 내재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더 이상 북한의 위협이나 분단 문제가 아니라, 남한 체제 내에 강고한 사회적ㆍ이념적 기반을 구축하게 된 냉전 반공 체제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냉전 반공 체제가 틀지은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성과 냉전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평의 확대와 함께 민주주의의 영역을 사회ㆍ경제적으로 확대하는 과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적 지향’ 위에서 해방 3년사를 재해석하고자 한다.” 제2장|군사점령과점령통치기구의수립(1945년 8~12월)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ㆍ소에 의한 남북한의 분할 점령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일본군 항복 접수와 무장 해제라는 ‘군사적 목적’의 점령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미ㆍ소가 단일의 독립 한국 정부 수립 방안에 합의하게 되는 12월 말에 이르면 이미 남북한에는 사실상 두 개의 다른 정치 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이후 1948년 8월 분단국가 형성에 이르는 과정은, 이런 초기 질서를 타파하려는 노력과 그 좌절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점령 초기 4개월간의 사태 전개를 추적하여, 남한국가 형성을 규정한 기본 구조와 남한국가의 원형을 살펴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즉, 초기 군사점령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어떻게 해서 상이한 두 체제가 이미 남북한에 등장하게 되었는가. 남한국가 형성 과정을 규정한 일차적 조건이었던 미ㆍ소에 의한 남북한의 배타적 분할 점령은 어떻게 결정되었으며, 군사적 목적의 초기 분할 점령은 어떻게 배타적 분할 ‘점령 통치’로 심화되었는가. 반공 블럭 구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이라는 ‘미국의 이중적 목표’ 가운데 초기 국면을 결정한 것은 무엇인가. 국가 기구의 재건을 중심으로 한 남한국가 형성의 초기 과정은 점령 당국과 현지 정치 세력 사이의 어떠한 대립축 위에서 이루어졌는가. 저자가 이 시기를 분석함에 있어 주목하는 지점은, 1945년 말까지 억압적 국가 기구를 중심으로 점령 통치 기구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공ㆍ인민위원회〓공산ㆍ친소비에트 세력’이라는 점령 당국의 인식은, 이들 대안 국가 세력과의 전면적 대립을 상정한 위에서 일제하 관료의 재기용, 우파 중심의 충원, 좌파의 철저한 배제 등을 통해 국가 기구의 재건으로 이어진다. 한편, 10월 중순에 이르러 본국 정부로부터 민정 수립 및 운영에 관한 지침이 하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구체제 해체ㆍ민주화 방침과 구체제 온존ㆍ이용 방침이 혼재된 것이었다. 이 중 구체제 개혁 방침은, 인공ㆍ인위에 대한 대처를 점령 정책의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설정한 점령 당국에 의해 무시되었다. 당시 점령 권력의 내부 구성을 볼 때 전술 점령군이 정책 결정ㆍ집행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국무성 고문들의 위상은 극히 미미했다. 즉 국무성이 지시한 구체제 개혁 방침이 시행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1945년 말까지 남한에서는 미국의 배타적 점령 통치권을 바탕으로 반공 블럭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했고 그 핵심은 반공을 원리로 한 강력한 국가 기구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제3장|반공체제의형성(1946년 1~5월) 1945년 말 미ㆍ소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 해결 방안에 합의했고, 1946년 초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어느 때보다 단일 국가 형성의 가능성이 컸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모스크바협정은 ‘임시정부 수립→신탁통치→단일 정부 수립’이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남북의 미ㆍ소 사이의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1945년 말까지 남북에서 각각 구축된 상호 이질적인 두 정치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공고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장에서는 모스크바협정에서 미국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며, 임시정부 수립에 대비하여 점령지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령 정책을 집행했고, 그것이 남한국가 형성 과정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중심으로 이 시기를 살펴본다. 이 장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미군정이 방조 내지 연출한 탁치 파동으로, 이는 남한 정치 지형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다. 즉, 탁치 파동을 통해 미군정과 우익 측이 조장한 ‘반탁〓반소〓애국, 찬탁〓친소〓매국’의 등식은, 친일의 과거로 인해 열세에 있던 우파의 정치적 복권을 가져오고 좌파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 정치 세력 간의 경쟁 구도를 타협 불가능한 좌우익 적대 관계로 고착시켰다. 나아가 좌파를 반민족 집단으로 몬 탁치 파동은 ‘역사에 뿌리를 둔 국민적 정체성’을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둔 국민적 정체성’으로 대체한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탁치 파동은 반공주의에 그 정체성을 둔 남한 반공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 제4장|남한국가의기반확대및개혁시도와좌절(1946년 5월~47년 6월) 1차공위 결렬에서 2차공위 결렬에 이르는 이 시기는, 미ㆍ소의 분할 점령으로 야기된 분단의 가능성이 1차공위 결렬로 인해 현재화되었지만, 그 구체적 정치 과정은 2차공위 재개ㆍ결렬이라는 최종적 계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일종의 과도기였다. 분단과 남한 단정 수립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섰지만, 그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아직은 열려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중성은 이 시기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낳게 한다. 그 첫 번째는 1차공위 결렬로 사실상 분단국가 수립의 길이 구조화되었고, 이후 2차공위 재개에 이르는 기간이란 단지 미ㆍ소 간에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위한 조정기 내지 유예기로서의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사후의 사태 전개에 기반을 둔 결과론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1차공위 정국에서 나타난 극단적 좌우 대립을 극복하고 중간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분단을 막고 단일 정부를 수립하며 또한 미ㆍ소의 양 체제 중 양자택일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려는 국내 정치 세력의 주체적 노력이 시도되었으며, 미ㆍ소 역시 아직 전후 문제 처리에서 협조 노선을 완전 폐기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 초점을 둘 때 이 시기는, 모스크바협정 및 1차공위를 계기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ㆍ소의 기본 정책이 제시되고 이에 임하는 미ㆍ소 및 남북 각 정치 세력의 전략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이들이 자신의 최소 목표가 관철되는 한도 내에서 어느 부분까지 양보하고 타협할 것인가를 둘러싼 다양한 대립과 연합이 전개된 시기로 부각된다. 이 책은 점령 중반기에 대한 이런 상반된 두 입장 중 후자의 입장에 선다. 특히 필자는 남한국가 형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고, 이 시기를 1946년 초 1차공위 결렬 시점에 등장했던 남한국가의 초기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전개되었으며 그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시기로 평가한다. 이 시기는 1차공위 결렬로 인해 미국의 대한 정책ㆍ점령 정책의 전환과 수정을 둘러싼 이견과 대립이 끊임없이 전개된 기간이었다. 정책 이견과 대립의 기본 틀은, 모스크바협정에서 합의한 ‘임시정부 수립→신탁통치→단일 정부 수립’ 노선의 성공 가능성이 1차공위 결렬로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여전히 기존 정책을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포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갈 것인가, 단일 정부 수립이라는 기존 정책을 견지한다면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 목표를 관철시키면서도 소련과의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인가, 1차공위에서 미국은 민주의원과 남한 행정조직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는데 이 방침을 계속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소련이 수용 가능한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 등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본국의 군부와 국무성 사이에, 국무성과 점령 당국 사이에, 점령지 내에서 점령군 당국과 국무성 고문 사이에 여러 정책 대안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단일 정부 수립을 포기하고 단정으로 나아가는 움직임과 다른 한편으로는 공위에서의 합의 기반 조성을 위한 시도가 전개되는 이중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즉 이 시기는 1946년 초 형성된 남한국가의 초기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되고 이에 따라 1947년 중반부터 초기 구조를 바탕으로 남한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국가의 초기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가능성과 결국 그 가능성이 종식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장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국무성의 개혁ㆍ통합 노선이 결국 폐기되게 되는 원인이다. 즉, 국무성의 노선이 폐기되게 된 원인은 정책 수단의 한계, 남한 내 정치 세력의 양극화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1947년 전반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전환이었다. 즉 중국 중심주의의 폐기, 동아시아 반공 블럭의 중심으로서 일본의 부상과 이에 따른 대일 점령 정책의 전환 등이었다. 중국 중심주의의 폐기는 중국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에서 대소 협상 노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소멸시켰고, 이는 결국 남한에서 2차공위 성사를 위한 통합ㆍ개혁 정책의 필요성을 소멸시키게 되었다. 제5장|반공체제의강화와자유민주주의의제도화(1947년 7월~48년 8월) 1947년 초반 미국은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사실상 폐기하고 단정 노선을 확정하게 된다. 그리고 2차공위 결렬이 확인된 7월부터 이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대개 분단 및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따라서 논의의 대상은 주로 유엔에서의 한국 문제 논의 과정, 점령 당국과 우파 세력의 남한 단정 수립 노력, 이에 무력 항쟁으로 맞선 좌파의 저항, 통일 정부 수립의 최종적 가능성을 추구한 중도 및 민족주의 우파 세력의 남북 협상 시도 등이었다. 논의의 기조는 ‘분단 지향 대 통일 지향’으로 대립축을 설정하는 강한 민족주의적 인식이거나 아니면 ‘좌파 세력의 절멸’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두고 반공 국가 수립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기존 논의와 달리, 단정 수립 과정이 아닌 남한국가 형성 과정에 초점을 두며, 그중에서도 반공의 측면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의 초기 제도화라는 또 다른 흐름에도 주목한다. 1947년 중반부터 공식화된 단정 수립 노선이란, 1946년 초반에 등장한 남한국가의 초기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국무성의 시도가 실패한 뒤 결국 이를 기반으로 남한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는 중도 좌파까지를 포함하는 좌파 세력의 전면적 배제 위에서 우파 세력이 최종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었으며, 또한 우파 세력의 안정적 권력 장악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기구의 강화 및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즉 반공 체제의 강화인 것이며, 이를 통해 대소 반공 보루의 건설이라는 미국의 궁극적 목적이 최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국은 남한국가의 초기 구조를 바탕으로 단정 수립으로 나아가면서 분단 및 단정 수립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는 점령 중반기의 국무성 개혁 노선의 실패로 인해 점령의 최종 국면에서 미국이 봉착하게 된 딜레마인 동시에, ‘남한국가는 대소 반공 블럭의 일원으로서 반공 국가여야 하되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여야 한다’라는 미국의 이중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미국의 두 가지 목표 중 후자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점령의 최종 국면에서 부각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점령의 최종 국면을, 반공 체제의 강화라는 흐름과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의 이식이라는 또 하나의 흐름이 이질적으로 결합하는 국면으로 규정한다. 이 장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미국이 반공 체제 구축과 동시에 점령의 최종 단계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질서를 부과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하나의 체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 제도와 절차로 구체화할 때, 당시 남한의 우파 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반공 체제에 어울리는 권위주의 통치를 제도화하고자 했다. 이런 보수 우파 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한 것 역시 미국의 규정력이었다. 오늘날 ‘48년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구조적 틀 안에서 남한 정치 집단 간에 단정의 권력을 둘러싼 최종적 경쟁이 5ㆍ10선거와 정부 수립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남한국가가 반공 블럭의 일원이어야 한다는 상한선과 함께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하한선을 동시에 부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요인은 남한의 내부 사정으로, 분단과 반공 체제 형성 과정이 민중의 희원과 요구를 억누르는 반혁명의 과정이었기에, 단정 수립 과정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수동 혁명으로서의 개혁적 조치가 필요했고, 대소 반공 블럭 구축자로서의 미국은 이 점을 냉혹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군정기의 남한 국가 형성 과정은, 구한말 이래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전개되어 온 근대 국민국가를 향한 민족 내부의 다양한 모색을 부정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제6장|결론 필자는 마지막으로 ‘반공 체제의 틀 안에서 제도화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는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현재 직면해 있는 문제의 역사적 기원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미군정에 의해 도입ㆍ이식된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이, 반공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면서도 다른 한편 절차적 수준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양면적 성격이다. 즉, 국가 형성과 함께 초기에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역동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낳았고, 이것이 권위주의 체제의 극복과 민주화를 가능케 한 배경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반공 체제에 의해 왜곡되고 제약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즉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미국에 의해 이식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뚜렷이 드러난다. 정치적 반대의 범위가 이념적으로 매우 협애하게 제도화되었으며, 민주주의 영역 역시 형식적ㆍ절차적 수준으로 축소된 것이 그것이다. 또한, 노동 및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의 정치적 조직화를 억압하고 이들이 정치사회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봉쇄한 반공 체제는, 절차적ㆍ정치적 수준을 넘어 민주주의를 사회적ㆍ경제적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을 추동할 정치ㆍ사회 세력의 부재를 초래했다. 마지막 결론에서 필자가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제약성과 한계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이다. 즉,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반혁명의 과정에서, 그리고 북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제도화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민중의 참여와 사회ㆍ경제적 요구를 불온시하는 생태적 보수성을 내재하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 역시 냉전 체제에서 하나의 체제 이데올로기 내지 국가 이데올로기로 이식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유주의가 가지는 열린 지평의 개방성은 발휘되지 못했다. 필자는 오늘날 이러한 외적 제약은 거의 해체되었다고 역설한다. 냉전 체제는 와해되었으며, 북한의 위협 역시 결정적 제약 요인으로서의 힘을 상실했기에,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이제 내부 문제임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치적 시민권의 확대를 통해 사회ㆍ경제적 시민권의 확대를 가져오는 힘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역시 개인의 자유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시민권의 확대를 가져오는 진보적 성격을 확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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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해방 3년사
해방 3년사에 대한 연구의 초점을 민주주의에 두고 볼 때 흔히 두 개의 적대적 시각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미군정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남한국가를 반공 국가이자 이는 곧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보는 주장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정당화해 온 지배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안티테제로서 남한국가를 분단국가이자 극우 독재체제로 보는 관점으로 수정주의나 급진적 역사 해석을 대표한다. 분명 정치 체제의 초기 제도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이 도입되었다는 사실과 좌파 및 사회주의 세력을 국가와 정치사회에서 전면 배제하는 ‘반공 체제’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기존 시각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해석의 틀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런 이분법적 해석은 냉전 시대의 역사 연구를 특징짓는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전체를 통해 필자는 기존의 두 적대적 시각이 역사적 사실과 매우 큰 괴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 해석에서 민족주의적 이상의 궁극적 실현이든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이든, 그 어떤 목적론적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다. 분단을 미완의 역사로 강조하면서 통일 지향적 현대사를 강조하지도 않으며,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낸 대한민국이라는 이념적 해석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사태의 여러 측면을 하나씩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그 모든 사실들이 실제로는 초기 제도화 과정의 핵심적 특징을 보여 주는 요소들임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역사 해석의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이를 통해 냉전적 시각을 넘어 역사 해석의 방법에 있어서도 민주적 경쟁이 필요하다고는 것, 이 책에서 필자가 추구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48년 체제의 기본 특징 ‘48년 체제’의 형성 과정은 기본적으로 사회ㆍ정치 세력의 일정 부분을 국가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의 영역에서도 배제하려는 반공 체제의 수립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반공 체제 안에서도 국가 권력의 유지와 행사는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절차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제약되었다. 그 결과 서구의 경우 100여 년의 긴 과정을 거쳐 정착된 보통선거권이 국가 수립과 동시에 제도화되었고 또한 복수 정당 간의 경쟁적 정당 정치 및 의회제도, 근대적 사법제도, 삼권분립 등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제반 제도 및 절차가 도입되거나 법제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48년 체제’는 반혁명의 결과인 동시에, 자유주의적 개혁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사태의 귀결에 대한 이러한 서술적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남한의 국가 형성 과정을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해 각각의 단계에서 외적 요인과 국내 세력 관계의 특징을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필자는 남한국가의 형성 과정이 서구의 경우처럼 ‘시민사회→정치사회→국가’의 경로가 아니라 그 역의 경로인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순서를 밟았던 것을 대비시킨다. 이 책의 분석력은 미국이라는 외생적 요인을 다루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분명 ‘반공국가’라는 남한국가의 기본 성격과 국가 권력의 지향점은 일차적으로 대소 반공 블럭 구축이라는 미국의 정책 목표에 의해 외부에서 부과되었다. 민주화 이전까지 이미 반세기 이상 반공 체제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익숙해졌을지 모르나, 외삽적 힘에 의한 국가형성은 ‘역사에 뿌리를 둔 국민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의된 국민적 정체성’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한 사회 공동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공동의 정체성에 기초하여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을 받아들이게 되는 민주적 태도를 배양할 토대를 근저에서부터 허무는 것이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남한국가 형성 과정을 볼 때,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우파 세력에 의해 도입 또는 실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하나의 체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 제도와 절차로 구체화할 때, 당시 남한의 우파 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화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반공 체제에 어울리는 권위주의 통치를 제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보수 우파 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한 것 역시 미국의 규정력이었다. 한국의 우익을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 보는 뉴라이트의 역사 해석에 대해 이 책의 조롱은 매우 흥미롭다. 48년체제의 귀결: 냉전 자유주의와 보수적 민주주의 48년 체제의 특징을 ‘반공 체제 형성과 자유민주주의 제도화’로 간명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책의 진정한 의도가 아니다. 이 책은 ‘미국이 반공 체제의 틀 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제도화했다’라는 단순 병렬의 논리가 아니라, 반공 체제의 틀이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왜곡했으며, 역으로 초기 제도화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는다. 먼저 반공 체제 내에서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좌파 이념과 세력을 정치사회에서 배제함으로써 정치적 경쟁의 틀을 매우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로 제한했다. 뿐만 아니라 외삽 권력에 의해 시민사회가 폭력적으로 탈동원되고, 이를 바탕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국가 권력의 성격에 맞추어 정치사회의 틀이 주조된 국가 형성 과정의 특징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괴리 및 정치 대표 체제의 취약성 등을 낳았다. 기본권과 법치의 원리가 도입되고 자유주의가 정당화 이념으로 강조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과 사상의 국가적 통일을 전제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냉전 자유주의’로서 자유주의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북한의 사회혁명에 내포된 방법론적 급진주의를 비판하고 남한에서의 사회변혁 요구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사회ㆍ경제적 이슈와 절연된 형식적ㆍ절차적 수준의 것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보통선거권이 일거에 도입되고 주기적 선거가 제도화되었지만, 정치 경쟁을 반공 체제의 틀 내로 제한할 뿐만 아니라 자발적 결사와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불온시함으로써 선거가 갖는 민중 참여적 의미는 거세되었다. 이 점에서 그것은 형식적 선거주의로 고착된 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반공 체제의 틀에 갇힌 민주주의는 결국 폭 넓은 이념과 사회의 여러 계층적 요구의 표출과 조직화를 반체제적인 것으로 억압함으로써 정치적 대표 체제를 보수독점의 틀 안에 묶게 되는 보수적 민주주의였다. 역사해석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죽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문제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게 하는 진보적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이 책만큼 보여주기도 쉽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