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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자유주의, 소수 지식인 전통
제1장 반자유주의적 사고는 어디서 오는가? 지식인 부류 자유주의적 관점과 반대자들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의 도식 교육기회의 불평등 국가에 대한 자유주적 관점 인간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과 새로운 심리 반자유주의적 사고가 정착하기에 충분했던 이유 지식인의 유형과 시장의 활용 소수집단 문화주의 범죄의 원인 사회적 기구와 조직의 역할 제2장 반자유주의적 사고는 어떻게 전파되었나? 유용한 이론, 진실한 이론 집단행동의 논리 불관용 정신의 기원 단순성의 유혹 무력한 비판 자유주의 질서의 타락한 효과 자유주의의 이미지 사회적 사고에서 살아남은 자유주의 전통 제3장 자유주의의 미래는? 무엇이든 옳다 자유주의의 진보 아담 스미스의 로드맵 참고문헌 |
Raymond Bou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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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에 대한 보편적 오해
오늘날, 자유주의는 시민의 사회적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한다. 경제적, 정치적 선택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작동하는가 하면, 국민의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적 선택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의 이념적 선택으로 명시하고 있음에도, 시민의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시장원칙이나 자유경쟁원칙 등, 자유주의의 경제적 측면은 대부분 잘 이해하고 있으나, 정작 자유주의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아마도 다양한 이념적 주장이 자유주의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비판하고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자본주의나 세계화 등 자유주의와 연계된 사고나 이념들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이 지난 반세기 동안 유별나게 활발했다는 사실도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킨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같은 기간에,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자나 마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나 니체, 레비스트로스 등에서 영감을 얻은 인문학적 지식인들이 좌파 성향의 뛰어난 연구서들을 쏟아냈고, 그것이 지식인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도 그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자유주의는 좌파적 사고에 대립하는 이념적 선택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태생적으로 우파적 사고는 아니다. 예를 들어서 전 세기까지만 해도, 영·미에서는 자유주의를 좌파 특유의 진보적 사고로 간주했는가 하면, 오늘날에도 자유주의는 우파 전형의 전통적 보수주의에 각을 세우는 대립적 이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특히, 좌파들이 열렬히 주장하는 기회균등이나 보편적 인간의 평등 개념에 대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이쯤 되면,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는 증폭될 수밖에 없다. 반자유주의적 이념 편향 중요한 사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소위 지식인 집단이 자유주의적 사고를 본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자유주의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유주의의 결실을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향유하는 일반 시민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몇몇 열성적인 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워왔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참 이상한 현상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반미 감정이 유별나고, 지극히 자본화된 사회에 살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남다르며, 빈·부차에 대한 반감이 신경증적으로 표출되는 이유를 그간의 어두운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사회·경제적 삶을 조절하는 원칙으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한 보편적 반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혹시, 거기에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거기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를, 이 책의 저자 레이몽 부동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지고 날카롭게 해부한다. 사실, 레이몽 부동이 한국의 독자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는 (1990년에 그의 《무질서의 사회학적 위치》가 번역·출간된 이래로) 사실 자체가 어찌 보면 자유주의에 대한 일반의 거부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레이몽 부동은 알랭 투렌, 피에르 부르디외와 함께 현대 프랑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들 가운데 하나다. 앞의 두 사람의 저작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에 소개되고 있고, 나름대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에, 레이몽 부동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지극히 낯선 이름이다. 짐작컨대, 그는 ‘자유주의자’이고 소위 우파적 사고를 하는 사회학자이기에, 강단에 있는 지식 생산자나 언론사의 지식 중개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지식인 집단의 이념적 성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지식인 집단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핵심은 그 기능과 역할 면에서 거의 멸종 위기에 놓인 지식인 집단에 대한 분석에 있다. 그는 지식인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지적 본능’에 따라 지식을 생산하는 부류이고, 둘째는 ‘윤리적 신념’에 의해 동기화된 활동적 지식인이며 셋째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기 위해’ 중개자들을 가동하고 인기몰이에 열중하는 ‘노출 본능’이 강력한 지식인 집단이다. 베버가 말했듯이, 지식인의 노출 동기는 본능적인 것이다. 문제는, 이 노출 본능이 나머지 두 부류에서 주도적인 동기들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것일 텐데, 이 부분이 소위 반자유주의적 사고의 유포와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 레이몽 부동은 그 접점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가며 예리하게 파헤친다. 그 과정에서 세계화 문제, 남북 불평등 문제, 노동 문제, 교육 불평등 문제 여성 문제, 소수집단 문제, 다원적 문화 문제 등이 전례 없는 명철함으로 분석된다.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왜 필요한가?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04년의 일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참 묘한 인상을 받는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 수준, 사교육과 공교육, 노동쟁의와 노·사대립, 여성차별, 빈·부차, 범죄에 대한 국가의 대처방법, 소수집단, 지식인과 비평가들의 이념 편향, 언론사들의 성향 등의 주제를 통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도 프랑스 사회와 똑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럽과 미국 등의 실제 사례들이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이미 동일한 문제를 두고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거쳤고, 거기서 얻은 경험과 교훈을 참고하여 우리의 미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지식인의 세 가지 유형 어떤 지식인에게는 지적(知的) 본능이 사고의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 그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지식을 창조하고, 정치·사회·경제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설명의 도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적 본능에 따라 활동하는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학문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또 하나의 부류는 투사(鬪士)적 지식인이다. 그는 사회·정치적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글을 통한 간접적 참여로 사회·정치적 운동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한다. 그람시는 이런 부류를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불렀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본적으로 ‘신념의 윤리’에 따르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에 자주 노출되기를 원하는 지식인이 있다. 한 마디로 텔레비전에 되도록 많이 나오기를 희망하는 부류다. 짐멜은 진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남 앞에 나서고 싶은 욕구가 먼저라는 얘기다. 너무 심한 비판이긴 하지만, 요즘 세태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자유주의 비판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일반화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악마의 손도, 신의 손도 아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사회의 병폐는 자유주의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 원칙에서 멀어졌을 때 발생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는 식민주의나 보호주의에 반대한다 오늘날, 부르기나 파소의 면제품은 판로를 잃어서 산업 자체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가 자국의 면제품 생산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력한 지원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병폐나 남·북 국가들 사이의 빈부차가 심화하는 이유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다. 미국의 2만 5천 면화 재배자의 이익을 위해서 부르기나 파소의 재배자가 희생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의 손에 달린 문제다. 자유주의 전통은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보호주의에도 반대한다. 지식과 도덕 지식의 평가절하는 도덕의 평가절상,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하면서까지 극렬하게 평등을 주장하는 자세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지겹도록 듣는, ‘유일사상’,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표현들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헤겔은 이런 현상의 중요성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지식인은 선한 감정을 지키는 ‘아름다운 영혼’이 되고 싶은 유혹에 너무 쉽게 빠진다는 것이다. 그런 지식인은 자신이 절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선한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하기에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이 ‘진실’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유용’하기만 하다면 마음 놓고 분석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럴 때, 비판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비판이 아예 없거나, 설령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왜 거짓된 사고, 비생산적인 사고가 때로 오랫동안 유행하고, 사실의 심판을 받는 순간에야 사라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결국, ‘아름다운 영혼’은 ‘무용한 지식’(J. F. Revel) 증후군이나 ‘사고의 패배’(A. Finkielkraut)의 가장 큰 주범이라 하겠다. 무엇이든 옳다 Anything goes? ‘무엇이든 옳다’는 원칙은 전 세대의 중요한 이념들이 청산되는 과정에서 등장했기에, 마치 인문학 분야의 연구소나 교육기관을 일종의 이념적인 기적의 장소로 변모시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토크빌은 민주 사회에서 사고는 점차 ‘먼지 같은 의견들’로 분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대중적 대학의 출현과 함께, 이런 경향은 세계 거의 모든 대학과 연구소의 인문학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 배경에서 ‘무엇이든 옳다’는 원칙이나 상대주의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 모든 사고를 공평하고 정당한 의견의 수준으로 전락시켰기에(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므로) 지식 자체의 자멸을 불러왔지만, 이 원칙은 ‘유용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반자유주의적 사고의 모형 덕분에 ‘무엇이든 옳다'는 원칙은 비록 학문적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한동안 번창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원칙은 지식인 집단을 지배하는 막연한 상대주의를 부추긴다. (···) 모든 지식이 언어와 개념, 그리고 인간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므로,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적 이론도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와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어떤 이론의 ‘유효성’, ‘진실’, ‘객관성’, ‘허위’ 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해석만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가 어떤 불관용의 정신을 뿌리내리게 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일이다. 상대주의 원칙에 따르면 서로 다른 의견의 교환은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기껏해야 여흥 정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주의자가 모든 의견을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신념이 있게 마련인데, 상대주의자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적 성향을 아무리 공개적으로 표방한다고 하더라도, 해체주의자는 결국 자신의 진실을 기준으로 남의 진실을 해체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래서 국내정치든 국제정치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무차별적으로 자기 신념만 토로하는 것이다. 언론의 유형 자유주의 사고 모형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반자유주의적 사고의 성과가 부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지적 본능에 따르는 언론의 성공사례들을 목격하자, 신념의 윤리에 따르고 있던 언론은 회의에 빠졌다. 독자는 신문이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해주기 바라고, 주제가 토론의 여지를 내포한 경우라면, 담론에 중립성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펠릭스 가타리는 객관성을 하나의 환상으로 여기면서, 기자는 자신을 예술가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사고가 많은 독자에게 신문에 대한 거부감을 주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