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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명숙
김영사 2007.08.10.
베스트
연애/사랑 에세이 top100 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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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韓明淑

194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결혼했으나 남편 박성준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수감되자 이후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74년부터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사회 간사로 일하면서 70년대 한국사회에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반을 복역한 후 1981년 광복절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석방된 남편과 13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90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1993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활
194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결혼했으나 남편 박성준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수감되자 이후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74년부터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여성사회 간사로 일하면서 70년대 한국사회에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반을 복역한 후 1981년 광복절에 석방되었고,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석방된 남편과 13년 반 만에 재회했다. 1990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1993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 여성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99년 정계에 입문하여 16대 국회의원, 초대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 17대 국회의원을 거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현재 민주당 상임고문, 국정자문위원장, 중앙위원회 의장과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자 : 박성준
1940년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경제복지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맡아 부회장이었던 한명숙과 동지이자 연인이 되었다. 1968년 선배로부터 금서 몇 권을 빌려 읽은 것이 화근이 되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15년 형을 받아 13년 반 동안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옥중에서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의 독서 편력을 거쳐 차츰 신학(神學)공부에 집중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반이 되어 석방된 후 한국신학연구소의 학술부장과 한백교회 목회자로 일했다.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릿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니언신학대학원과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학교 ‘펜들힐’에서 3년간 ‘평화’를 주제로 공부했다. 2000년 귀국한 후부터 지금까지 성공회대학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비폭력 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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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08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28쪽 | 552g | 153*214*30mm
ISBN13
9788934926344

출판사 리뷰

결혼 6개월의 짧은 신혼 뒤에 찾아온 13년 반의 긴 이별
한명숙 전 총리와 그의 남편 박성준 교수가 박 교수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전교도소에 있는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엮은 서간집을 냈다.
1968년, 28살의 청년이던 박성준은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15년 형을 언도 받았다. 하지만 박성준은 통일혁명당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며 단지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박성준의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였다)으로부터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빌려 읽고 또한 노트에 옮겨 후배들과 함께 읽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군사정권은 고문과 조작으로 그를 15년 징역형에 처하였다.
결혼한 지 불과 6개월여가 지났을 뿐인 스물네 살의 새색시 한명숙은 박성준이 198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 와중에 한명숙 또한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투옥되어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 있었다.
강제로 헤어져 있어야 했던 두 사람은 편지 서신이 허락되는 기간 동안 5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손바닥만 한 봉합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를 눌러 적으며 그들은 사랑과 신앙, 희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의 편지에는 단순한 부부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라 서로를 성숙시켜가는 생의 진정한 반려자로서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간간이 회자되던 그들의 편지는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면박스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가 이번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기독학생 동아리 ‘경제복지회’를 통해 동지이자 연인이 된 한명숙과 박성준
한명숙이 박성준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학생 써클인 ‘경제복지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관계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힘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모임이었다. 불문학도이던 한명숙은 ‘경제복지회’를 통해 시대와 현실의 아픔에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한명숙이 대학축제의 쌍쌍파티 파트너로 박성준을 초대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늘 대학 교복만 입고 다니던 가난한 복학생 박성준은 이날 생전 처음으로 양복에 빨간 넥타이까지 하고 나타났다. 친구에게서 빌려 입은 옷이었다.
박성준은 열한 살 되던 해에 벌어진 6.25전쟁으로 전쟁고아가 됐다. 5남매의 셋째였던 그는 당시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통영의 친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두 형제를 돌봐주시던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들 내외와 다른 손주들이 보고 싶다며 잠시 서울에 다니러 가신 사이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 통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를 비롯한 서울의 다른 가족들과도 소식이 끊어졌다. 박성준은 학교에서 급사 노릇을 하며 초등학교를 마쳤고, 졸업 후에는 삼천포의 한 중고등학교에서 급사로 일했다. 동생을 건사하기가 어려워 고아원에 보냈는데, 그곳에서 동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그도 고아원으로 갔다. 그 것만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4년간의 연애 끝에 둘은 1967년 12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남자를 결혼식장까지 끌어냈으니 한명숙의 승리였다. 한명숙의 아버지는 맏딸의 결혼을 위해 멋진 아리아를 축가로 불렀다.
그런데 결혼 몇 달 후 이상한 조짐이 일었다. 경제복지회에 와서 강의를 했거나 가까이 지냈던 선배들이 하나 둘씩 어디론가 연행되어 가서 조사를 받았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어야 할 시기인 어느 날 박성준은 한밤중에 끌려갔다. 선배에게 빌려다 읽은 책들이 화근이 되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것이 13년여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일 줄은 새댁 한명숙은 꿈에도 몰랐다.

사랑과 신앙은 물론 여성, 철학, 사회문제까지 넘나들며 내면의 성숙과 정신적 결속을 키워가는 진정한 생의 동반자
6남매의 맏딸이었던 한명숙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집안의 생계와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남편은 혼자서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편지에는 서로의 힘든 처지를 위로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정,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절절히 녹아있다.

이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직장일과 집안 문제로 포위되어 있을 당신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심정으로 펜을 드오. 내가 자유의 몸이라면, 귀한 당신을 그러한 곤경 속에 혼자 둘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올라 34도의 무더위를 잊소. (54쪽, 1972년 7월 30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천 원짜리 외투 깃 속에 턱을 묻으면서 싱싱한 미소를 보내던 천진무구한 당신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바로 그날 “이 여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소. 나 또한 당신에게 반해있는 모양이오.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은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오. (47쪽, 1978년 12월 28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내일 추석에는 밥이 설어 콩이 설컹하게 씹히거나 떡밥이 되어 찐득찐득 입천장에 들어붙지 않는 포실포실한 밥이 나오기를 바라며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드실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 당신이 제 곁에 오고 싶을 때 저 역시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 그리움과 외로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308쪽?313쪽, 1981년 가을에 보낸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이들의 삶을 지탱해준 두 개의 큰 축은 사랑과 신앙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처음 만나 기독학생 동아리 ‘경제복지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지냈던 두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토대 위에서 더욱 굳건한 유대를 다졌다. 남편을 감옥에 보낸 뒤 한명숙은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의 배려로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한편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박성준 또한 감옥에서 성서연구반을 만드는 등 신학공부에 더욱 집중하였다. 이들의 편지에는 신학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깊은 신앙심을 다지는 모습이 보인다.

가슴에 묻힌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기도의 불덩이가 남몰래 뜨거워 갈수록 우리들의 눈길을 더 착하고 어질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드립시다. (146쪽, 1975년 10월 15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비참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에게는 기쁨과 보람으로 변하게 해 준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 속에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165쪽, 1976년 4월 27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한명숙은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여성사회 간사로 참여하면서 여성과 사회에 대한 더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때 그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무당’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행적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의 서간집 속에는 한명숙의 정신적, 사회적 성숙의 궤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으며, 때로는 남편과 열띤 난상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저는 해방된 여성이고 싶을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저를 받치고 있습니다. 전정한 여성해방은 여성만이 아닌 남성과의 깊은 협력과 노력이 함께 할 때 양성 모두 해방되는 결과가 오지 않겠어요? (118쪽, 1974년 12월 11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숙이 씨가 지난번 편지에 쓰셨던 문제에 대하여 요즘 무척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것이며 인격에 있어서 독립과 주체성을 가지면서, 두터운 우정과사랑에 의해 결합된 부부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상적인 친구 사이에서 마땅히 있어야 하는 비판과 충고는 끊이지 않을 것이며 때로는 의견 대립과 다툼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을 우리의 민주적 관계가 건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121쪽, 1974년 12월 23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 대치시키는 이분법적 사고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며 여성의 문제는 인간문제의 핵심을 해결한 사회적, 문화적 기반 위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143쪽, 1975년 8월 5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이처럼 이들의 서간집 속에는 사랑과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과 행복을 나누는 부부의 모습만이 아니라 여성문제와 사회문제, 삶의 자세와 철학 등을 소재로 의견을 나누고 충고하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진정한 반려자로서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인간’ 한명숙의 내면의 힘이, 그리고 남편 박성준과의 정신적 결속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성숙해졌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낸, 그들의 온기와 부드러움. 우리시대의 가장 감동적인 연애의 기록!
이 서간집은 시대에 의한 강압적인 이별의 기록이면서, 또한 인간 내면의 성장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없는 좌절로 빠질 수 있는 환경, 견딜 수 없는 지루한 단순성, 늘 부딪힐 수 있는 패배감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으로 대치시킨 용기와 신앙심’(165쪽)으로 그들은 함께 걸었다. 몸은 강제로 떨어져 있었으나 정신과 영혼의 동반자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한 걸음씩 힘들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편지 속에도 비유하고 있듯이 단단하고 거대한 돌을 쪼아 마침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듯이, 어리석은 늙은이[愚公]가 산을 옮기듯이(223쪽)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마침내 13년 반의 세월을 이겨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편지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차가움과 온기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교도소 벽을 나고 흐르는 냉기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희망과 신념이 사람의 체온과 같은 따스함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들에게 도덕성과 정의란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눈물겨운 감동, 어떤 고난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 그리고 그것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온기와 부드러움이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내게 했다.

문방구 할머니가 “색신 참 얌전해서 좋은 데로 시집가겠수”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저는 벌써 좋은 데로 시집갔는 걸요. 저는 썩 훌륭한 남편을 가졌고 그리고 또 행복하니까요. 할머니 정말 관상을 잘 보신는데’ 하고는 씩 웃었습니다. (30쪽, 1970년 1월 4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나는 감옥에서 몇 해 사는 동안 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 나갈 것이다. 지금 나는 아주 멋지고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산악인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감옥이라는 묘한 계곡에 머물러서 갖가지 진귀한 풍경을 보면서 나 자신을 닦는다. (268쪽,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투옥된 한명숙이 1979년 12월 20일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대전까지 백 리 길을 달려올 예정이라는 마누라의 편지 받고, 까까중이(가막소쟁이) 남편은 이발하고 면도하고 ‘로숑’ 몇 방울 찍어 바르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쿵덕 방아 찍는 가슴 진정시키며 하루 죙일을 기다렸것다. 책상에 붙어 앉아 원고를 쓰는 척, 책을 읽는 척, 사람들과 농을 하는 척, 마누라쟁이 오건 말건 관심 없는 척, -척 -척 -척 이렇게 척척박사가 되어 쿵덕 방아만 찍고 앉아 있었으나 결과는 빌 ‘공空’, 기다려 ‘뻥’자라! 못 와도 좋아, 둘째 마누라인 당신일랑 천천히 오소. 다만 성님일랑 일쯕이 내려 보내시오. 앗따 못 알아듣소? 내 첫째 마누라(책) 말이오. (133쪽, 1975년 3월 23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이제는 슬슬 4,5년 묵혀두었던 영어책도 좀 거들떠보기로 했소. 당신이 보았다는 『22,000단어』도 한번 보아두고 싶소. 나가면 벌어먹고 살 직장도 구해야 하니까 참고로 알아두시오. 당신, 준이가 징역만 살아 세상물정 모른다고 너무 주눅들이지 말고 잘 가르쳐주구려. 선생님께 차렷, 경례! 하하! (317쪽, 1981년 12월 1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고난과 결핍 위에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랑과 삶을 꽃피운 그들의 연애편지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담고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그래서 이 서간집은 소중한 삶의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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