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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생명처럼 질기게 생명을 기다리고
꽃샘 그늘 흙을 담으며 움이 터올 때 길 침묵 경사 그리운 봄볕 손길 이상한 당 터 춤추는 마음 목련과 닭 논이 잘리던 날 번개 먹는 집 이상 징후 경운기 꽃 1 처마 밑에서 모내기를 앞두고 모내기 몸살 1 여름-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을 따라 열려라, 참깨! 몸살 2 단비 이상한 만남 무딘 몸 침수 산 영원한 숙제 논에서 물을 뺄 때 들깨를 쫒아서 공생 천수답 빨간 고추를 따며 파란 미소 가을 냄새 타살打殺 흉년의 그림자 마른 고추를 다듬으며 세례 가을-한 점 볕이라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하늘이 시커먼데 어느 농사꾼의 죽음 볕이 아까워 사랑하는 똘이 여기서 쉬다 가을 짐승들 사냥의 계절 바심, 그 마지막 날 겨울-사소한 분별은 하얗게 묻히고 겨울 해 닭 몰이 유기농인증번호 게으른 가을 창호지 두절 눈물의 연주 겨울비 두번째 봄-나를 갈아엎고 나를 거역하고 백년 만에 어떻게 살아남은 닭인데 봄땅 추락 거역의 땅 만남 이름으로 다가온 나무 기다림 꿈을 꾸는 아이처럼 두렁을 매며 두번째 여름-초록은 초록이 아니야 초록빛 몸살 3 꽃 2 소처럼 일하다 돼지가 된 사내 그 땅에 가면 두번째 가을-바람을 먹고 햇살을 먹고 사람을 먹고 늙은 호박의 가을 이야기 다시없을 이 가을에 아버지의 얼굴 벼가 햅쌀이 되기까지 감나무 첫눈 두번째 겨울-텅 빈 침묵으로 봄을 기다리며 김장, 그 잃어버린 풍경 겨울의 시작 겹초상 나무꾼의 하루 겨울잠 나의 논 이야기 대관절 쌀이 뭐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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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땅이 받아줍디까』에 이어지는 한승오의 농사 일기
: 그치지 않는 ‘몸살’ 이야기 7년 전, 충남 홍성군 홍동면 구정리 고요마을에서 한승오는 비어 있는 농가를 발견한다. 그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마음먹고, 서울 짐을 꾸린다. 부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해온 그에게 농사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그가 시골 생활을 위해 한 준비라곤 잠깐 목수일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는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집을 손보고, 소작할 땅을 알아보며 생초보 농사꾼의 삶을 시작한다. 2004년 출간된『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부제:한승오의 시골 편지)』는 그렇게 홍성땅에 터를 잡고 농사꾼의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몸살』은 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자신을 받아준 낮은 땅에 감사하며 농사를 지어온 두 해 동안의 기록이다. 땅이 이유를 묻지 않고 자신을 받아준 대신 그에게 안겨준 것은 바로 ‘몸살’이다. 땅이 앓고 있던 몸살을 이제 한승오는 땅과 함께 앓게 되었다. 어떤 모종이든 땅에 옮겨 심으면, 그 땅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다 흙으로 나가 혼자 힘으로 자리를 잡으려니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모를 논에 내면, 처음 며칠 동안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시들시들해진다. 이를 보고 모가 몸살을 한다고 말한다. (52쪽) 지칠 대로 지친 몸에는 오한이 일었다. 논에 갓 내놓은 모가 앓았던 심한 몸살이 나에게로 온 듯했다. 다음날도 뜬모를 해야 하는데…… 나는 몸살을 앓을 여유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뜬모를 마친 논에는 이제 모가 뿌리를 내렸다. 여리고 여리던 모의 모습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볏대에는 힘이 들어가고 줄기와 잎을 곧추세우고 땅에 뿌리를 굳게 박았다. 노란 기운이 돌던 잎새는 푸른 녹색의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모가 벼로 쑥쑥 커가고 있었다. 모가 심하게 앓았던 몸살, 그리고 내가 애써 비켜가야 했던 몸살, 그 몸살들이 헛되지는 않았나보다. (60쪽) 농사꾼의 눈치는 ‘자연의 때’를 향한다 시골로 들어온 그해, 이웃사람들은 나에게 난생처음 지어보는 농사가 더 잘된다는 말들을 했다. 호미질도 서툰 나를 애써 위로하는 말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나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첫농사를 지은 해에는 뭘 심어도 잘되었다.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이웃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뿐이었다. 이웃사람들이 감자를 심으면 감자를 심고 고추를 심으면 고추를 심고 콩을 심으면 콩을 심었다. 풀을 매면 풀을 맸다. 그리고 그들이 열매를 거두어들이면 나도 따라서 거두어들였다. 농사에 대해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자연스럽게 이웃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연의 때를 맞추어나간 셈이었다. 그 첫해 고추농사만큼 잘된 농사를 나는 지금껏 지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음해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나에게는 지난해의 경험과 꼼꼼히 기록해둔 농사 일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근거로 내 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웃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파종 시기를 잡았다. (9쪽) 매번 낯선 얼굴을 드러내는 땅과 하늘의 이야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도 늘 다르다. 풍작의 땅이었던 곳이 다음해에는 벌레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못자리에 놓은 볍씨는 싹을 틔우지 않는다. 작년 감나무에는 홍시가 가득해 새들과 함께 나누었는데 이번에는 영 소식이 없다. 농사에는 정해진 일관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이웃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연의 때를 가늠한다. 사람들은 언제 볍씨를 물에 담그나…… 언제 볍씨를 파종하나…… 언제 못자리에 나가나…… 언제 모내기를 하나…… 그런 눈치를 보면서 자연의 때를 맞추려고 애쓴다. 농사꾼의 눈치는 일종의 삶의 기술이다. (10쪽) 이제 7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그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이제 땅이 좀 받아주는 것 같냐고, 농사는 좀 익숙해졌느냐고. 그는 웃으며 자신은 여전히 농사짓는 일에 서툰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여전히 서툰 농사꾼인 것은 그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농사라는 것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농사일에 허리가 구부정해진 칠순의 농사꾼도 자기 마음대로 때를 잡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다.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만 의존해서 섣부르게 파종의 시기를 잡으면 자칫 그것이 자연의 때와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8쪽) 농사를 지을수록 느는 것은 농사 기술이 아니라 눈치뿐이다. 그리고 그 눈치는 항상 자연의 ‘때’를 향하고 있다.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밭을 다 만들고 나니 이제는 비 오는 때를 맞춰야 했다. 옮겨 심은 모종이 자리를 잡으려면 촉촉한 빗물이 뿌리에 스며야 하니까. 비를 기다리니 이제는 비소식이 없다. 뜨거운 햇빛을 받아 키만 위로 쑥쑥 올리는 들깨 모종을 보는 내 마음은 급했다. 사람 마음이 아니라 하늘 마음을 따라야 되는 그 ‘때’를 정말 기다릴 수 없었다. (73쪽) 가장 평범한 농사꾼이 되어 논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왜 트랙터를 불러 하지 않고 힘들게 경운기로 일하느냐고.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하루 종일 한 일을 트랙터는 삼십 분도 채 안 걸려서 끝낼 거다. 트랙터를 마주하면 포크레인이나 불도저와 같은 중장비를 마주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뒤집어엎고, 밀어붙이고, 밟아 뭉게고……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는 갑자기 확 바뀐다. 그래서 구질구질한 예전 모습을 싹 지워버리고 한번에 새 모습으로 바꾸기를 좋아하는 이 시대에 어울리는 기계다. 그런데 경운기는 먼 옛날부터 논밭일을 해왔던 소에 가까운 기계다. 소에 달린 고삐처럼 경운기에는 손으로 운전해야 하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논밭일을 할 때는 고삐를 잡고 소를 부리는 주인처럼 손잡이를 잡고 걸으며 경운기를 부려야 한다. 그러니 일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한번에 많은 일을 할 수가 없다. 일하는 잠깐잠깐 쉬어야 한다. 마치 주인과 소가 함께 숨을 고르듯이 말이다. 또 경운기의 몸집은 소와 비슷하다. 앞에서 보는 경운기의 눈매는 꼭 소를 보는 듯하다. 경운기는 정말 소를 닮았다. 언제부턴가 논밭에서 소가 사라졌듯, 이제 경운기도 하나둘 없어지고 있다. 바쁜 세상, 바쁜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소를 닮은 경운기가 논밭에서 쫓겨나고 있다.(44쪽) 이 책에는 귀농, 생태주의, 무공해, 웰빙과 같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유기농이란 말은, 유기농인증번호를 사고파는 모습이 싫어 유기농인증번호를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는 부분에만 등장한다). 한승오는 농약 없이 논농사를 짓고 있고, 탄저병이 극심하다는 고추에도 병이 오면 뽑아낼지언정 약을 뿌리지 않으며, 무자비해 보이는 트랙터가 싫어 ‘지금도’ 경운기로 땅을 가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트랙터를 사용하거나 농약을 쓰는 다른 농사꾼들을 탓하는 눈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원한 것은 생태주의적 삶도 아니고 대안적 공동체도 아니다. 또한 도시 사람이 갑작스레 시골로 내려가 펼치는 낭만적인 농촌 예찬론도 전혀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그저 평범한 농사꾼이 되려고 한다.『몸살』은 그렇게 가장 평범한 농사꾼이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는 운 나쁘게 물이 잘 들어오지 않는 논을 소작하는 탓에 물 댈 걱정을 하며 논물을 지키고 서 있는 그런 농사꾼들중의 한 명일 뿐이다. 지난여름 밤 논물을 보려고 논에 나갔다. 시간이 밤 9시쯤 되었으니 들판에는 인적 하나 없을 때였다. 그런데 논둑길에서 불빛이 왔다갔다했다. 가까이 가보니 아래쪽 논을 짓는 아저씨였다.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짐짓 사정을 모른 척하고 물었지만, 사위가 새카만 밤중에 논에 나온 사정은 답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 근처 논들은 저수지에서 수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을 논에 댄다. 흘러내려오는 저수지 물은 일정한데 서로들 물을 대려고 하니 아래쪽 논에서는 물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랫논 사람들은 한밤중에 논에 나와 윗논들 수멍을 막고 자기 논에 물을 대곤 한다. 언젠가는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을 내놓고 물을 대고 있는 내 논의 수멍까지 콱콱 틀어막힌 것을 아침에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나도 가끔 한밤중에 나가서 수멍의 상태를 살피곤 했다. (205쪽) 몸살을 통해 얻는 것--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땅의 가치 논에 들어서면 특유의 논흙 냄새가 난다. 풋풋하고 선선한 황토 냄새가 아니라 퀴퀴한 시궁창 냄새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것은 이삭을 떨어낸 볏짚과 거름과 흙 그리고 물이 섞여서 오랜 세월 곰삭은 냄새다. 논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그 냄새에 고개를 돌리겠지만, 논일을 하며 논흙과 몸을 섞다보면 그 냄새는 부드럽고 구수해진다. 농사짓는 해를 거듭할수록 논은 자신을 점점 더 썩힌다. 논은 제 살과 뼈를 완전히 썩힌 그 땅심으로 곱고 하얀 쌀을 낸다. 그 퀴퀴한 썩음에서 맛있는 쌀이 난다. 요즘은 자신이 먹는 쌀이 중국의 것이든 미국의 것이든 일본의 것이든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 보는 쌀은 전부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쌀 속에 간직되어 있는 땅심은 제각각 다르다. 쌀을 먹는 우리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쌀이 아니라 바로 그 땅이다. (207쪽) 한미FTA 협정문이 공개되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하여 말들이 많다. 농업 분야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안정 장치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농업 분야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결국 농사도 대규모화해야 한다고, 경제적으로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변화의 과정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땅의, 농사꾼의, 하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배제되어 있다.『몸살』은 그 배제된 것에 대한, FTA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협상 결과를 이끌어낸다고 해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쌀 한톨은 온전히” “농사꾼의 몸”이라고, “논에는 무수한 세월 동안 그 땅을 거쳐 간 농사꾼들의 노동이 녹아 있다”고, 그리고 그 논은 “제 살과 뼈를 완전히 썩”혀 우리에게 쌀을 준다고, 우리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쌀이 아니라 바로 그 땅”이라고. 이 책은 “땅의 냄새와 감촉을 기억하며” 땅과 함께 소리 없이 몸살을 겪고 있는 평범한 농사꾼이 한미FTA가 만들어갈 세계에 보내는 가장 간절하고 깊은 응답이다. 모내기를 막 끝낸 논. 구름 한 점 없이 쩡한 하늘, 그늘 한 점 없이 뜨거운 햇볕, 거침없이 불어 대는 거친 바람, 초여름의 시퍼런 기운 속에서 어린 벼가 홀로 몸살을 한다. 싱그러운 신록의 잎은 병들어 죽어가는 잎처럼 누렇게 변해가고, 꼿꼿한 듯 부드럽고 부드러운 듯 꼿꼿하던 줄기는 엿가락처럼 배배 틀린다. 사람의 손에서 컸던 어린 벼의 뿌리가 하늘과 땅과 바람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잎을 죽이고 자신의 줄기를 죽인다. 하루, 이틀, 사흘…… 어린 벼는 이제 낡은 뿌리를 버리고 굵고 허연 새 뿌리를 하나둘 뻗어내린다. 새로운 뿌리가 자라면서 땅을 단단히 부여잡을 무렵, 죽어가던 어린 벼는 다시 살아난다. 누렇게 떠가던 잎에는 짙은 녹색의 기운이 올라오고 배배 틀리던 줄기에는 단단한 심이 박인다. 사람의 손에서 클 때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색이며 전혀 다른 힘이다. 바로 자연의 색, 자연의 힘이다. 자신을 죽이는 듯한 몸살을 겪으며 어린 벼는 인위의 껍질을 벗고야 만다. 마침내 벼는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간다. 나의 몸살도 벼의 몸살처럼 그런 것일까? 인위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삶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겪는 그런 아픔일까? 그렇다면 마침내 나도 저 벼처럼 그 길목을 기어이 넘어설 수 있을까? (12-1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