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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Day 1 Day 2 Day 3 Day 4 Day 5 Day 6 Day 7 Day 8 Day 9 Day 10 Day 11 Day 12 Day 13 Day 14 Day 15 Day 16 Day 17 Day 18 노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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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급히 포트폴리오에서 석판인쇄용 투명종이 위에 그린 드로잉 몇 장과 일반 도화지에 그린 드로잉 몇 장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던졌다.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이것들 모두 내버리려고요.” “안 됩니다.” “버려야겠어요. 꼭 버려야 합니다.” 그는 바닥에 쌓인 그림을 집어 들고 복도로 나가 쓰레기통이 있는 디에고의 작업실 문 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림을 바닥에 던지더니 한 움큼을 잡아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다. 나는 말리려고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일단 다시 한번 보자고요.” “아니오, 아닙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또 한 움큼을 잡아 찢었다.---p.79 위대한 예술가는 외적인 모습은 물론이고 모델들의 내적인 본성까지도 꿰뚫어보고 전달해낸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작가와 모델 사이에서 생겨나는 독특한 친밀감이 초상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조적 직관이라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서 결국에는 그 둘의 자연스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코메티는 초상화에 인간으로서의 모델의 모습이 들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든 그가 그린 초상화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외적인 문제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내적인 것까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p.86 작업실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래도 그는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우리 둘이 마치 멸종한 소나무의 송진덩이에 갇힌 선사시대의 곤충처럼 거기 언제나 그렇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잡았어요. 이젠 도망 못 가요.”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실 무슨 뜻이든 상관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진실이니 말이다.---p.150 카페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셨다. 30분 후에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은 곧 엉망이 되어 갔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넌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너 같은 바보도 없을 거라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업이 정말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국면에 처하게 될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꼼짝 않고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뿐이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괴로운 게 역력해 보이는데도 그는 불을 켤 때까지 쉬지 않고 작업했다.---p.208 “잠깐만요.” 그는 흰색만을 써서 선을 몇 개 긋더니 “됐어요. 일어나세요. 눈을 그리느라고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뒤로 가서 그림을 보았다. 정말로 훌륭했다. 45분 전에 뭐가 뭔지 모르게 엉켜 있던 느낌은 이제 깨끗이 사라졌다. 그렇게 좋았던 적은 없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최고의 상태였다. “좋은데요. 이대로 그만 하시지요.” 그는 한숨을 지으며 “좀 더 할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쉬워요. 뭔가 조금 되어 가는 듯하거든요. 정말 되는 듯하다고요. 이렇게 잘 될 것 같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p.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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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조형미술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이자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일찍이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베니스에서 틴토레토와 조토의 작품에 충격을 받고, 1922년엔 파리에 입성하여 조각가 부르델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독립한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물결에도 휩쓸리지만 이내 빠져 나와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자코메티는 사실적인 작품으로 시작하여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거쳐 1932년경부터 다시 사실적인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책에는 모델을 놓고 그리는 작업을 통해 시각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자코메티의 열망과, 그림을 그리면서 매순간 겪게 되는 절망감을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는 작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제임스 로드는 이 책에서 자코메티의 긴장과 작업을 이어가는 열정을 일지 식으로 기록하고 거기에 작업의 경과에 따른 사진을 첨가했는데, 이것은 오랜 기간 자코메티를 깊게 연구한 결과 선택된 방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은 자코메티의 작업에서 ‘그리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우기’를 초상화의 내용으로 담아내고, 작업과 반성으로 채워진 자코메티의 삶을 조명하고, 허공과 무한을 일치시키려는 자코메티의 시선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따르면 초상화 작업은 1964년 9월 12일 토요일에 시작하여 10월 1일에 끝났으며, 그 중 9월 25일은 자코메티가 감기로 작업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18일간 진행되었다. 작업은 오후에 시작하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한 번 포즈를 취할 때마다 대여섯 번씩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했다는 제임스 로드의 말을 참고하면 자코메티의 초상화에는 제임스 로드가 백 겹 이상 들어 있는 셈이다. 그 곁에서 제임스 로드는 이젤을 사이에 두고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는 자코메티를 지켜보면서, 흙을 떼어냄으로써 살을 붙이고 허공을 채워내는 자코메티를 한 겹 한 겹 그려내고 있다. 제임스 로드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코메티를 지켜보는 일이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는 육체적 괴로움보다 더 힘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어떤 때는 그가 괴로워하는 것이 자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며, 자신과 자코메티가 하고 있는 일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임스 로드의 말대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초상화를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끔씩밖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리얼리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벌이는 분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투의 결과물에서 우리는 백 번 이상 겹쳐진 제임스 로드를 보고,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려는 자코메티를 보며, 시시포스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떠맡은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그렇게 해서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는 형태와 관념이 아니라 그림과 그림 그리기를 자신의 몸에 통과시키는 자코메티의 초상화로 우리 앞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