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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산마애불 책바위 우울 빨래하는 맨드라미 청개구리와 민달팽이 안개더미 호숫가 수치심 설움 불안은 늘 불안해서 늑대 바퀴 달린 구두 바닥을 쳐야 환멸 진창길 터널 속에서 양파 불타는 나무 Ⅱ 들뜬 밤, 파도와 함께 취한 배 지렁이, 슬픔 석유곤로 분노 고등어 둥근 슬픔 떡! 淸明前夜 만우절 내 안의 외뿔소 달리는 포탄 서광주, 1999년, 6월 당나귀 매화원에서 장산나무 이야기 접는 의자 Ⅲ 돈은 처음 자신을 배춧잎으로 알았다 모처럼 가부좌를 틀고 달밤, 하늘 항복항복 항구 비굴에 대하여 착지에 대하여 진흙소 쌍화탕을 먹는 밤 야쿠르트병과 강아지 밤 빗소리 무량사 길 풋감 만월암 검은 짜증 두꺼비 바위책 개미들의 집 Ⅳ 바윗덩어리라면 권태 바퀴론 혓바닥 싫증 공포에 대한 단장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절집 풍경 양심 망각의 자작나무 제석 사막에서 구역질 시와 비누 종이호랑이를 타고 해바라기 꽃판 終情記 진흙소 그늘 연탄재 ■ 해설 이은봉의 흥취 | 황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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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책바위』는 사물의 겉과 속, 존재와 본질 등 대상의 양면성을 밀도 있게 추적하고 있는 시집이다.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이 시인은 현상을 좀 더 깊숙이 파고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어둑어둑한 진실을 조명한다.
사물을 눈여겨보고 헤아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취하는 태도는 ‘관조’와 ‘즐김’이다. 갖은 세파에도 그는 휩쓸리거나 주저앉지 않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달음질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초야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선비마냥 그 언사가 넉넉하고 흥겹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자기 흥에 겨워 휘적휘적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1983년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 오고 있는 시인답게 한껏 목청을 높이다가도 ‘경계점’에 이르렀다 싶으면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선다. 노련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시인이 견지하는 삶의 자세는 다양한 모양의 실패를 언급하는 부분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까지 감아보지만 “머리통이 자꾸 흔들”리고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멀리 자동차소리” “조카애들 까불대는 소리” 등이 훼방을 놓는다. 마음먹은 대로 명상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화자는 성급하게 실패를 운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떡갈나무 작은 앞사귀들” “청설모 몇 마리”에 눈길을 쏟는다. 자칫 실패담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경험을 등 뒤에 감춰진 다른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성공담으로 극복해내는 것이다. 이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시적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버무려놓은 시인의 탁월한 입담도 높이 살 만 하지만, 성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생의 미세한 기억들까지 너그럽게 끌어안으려는 그의 마음 또한 짚어볼 가치가 있다.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과정은 간과한 채 사력을 다해 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이은봉의 시들이 시사하는 바는 남다르다. 찬찬히 그가 펼쳐 보이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난 날 함부로 지나쳤던 소중한 순간들이 아련히 떠오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