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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목
등대곶 환상의 배 독요초 비형랑의 낮과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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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들숨’ 끝에 내어쉬는 ‘날숨’
1975년 「방울뱀」으로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한 이래 문학과지성사에서 『하늘궁전』(1987), 『후박나무 밑의 사랑』(1992) 등 작품집을 출간한 과작의 작가 김인배의 16년 만의 창작집 『비형랑의 낮과 밤』이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 세 번째 소설집인 『비형랑의 낮과 밤』에는 표제작인 중편 「비형랑의 낮과 밤」을 비롯하여 「물목」, 「등대곶」, 「환상의 배」, 「독요초」 등 중단편 5편이 실려 있다. 창작집 『비형랑의 낮과 밤』에서 작가는 시류에 민감한 세태나 풍속보다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 본연의 원형적이고 철학적 문제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소설 창작의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물목」의 상징공간과 등장인물들이 그러하고, 「등대곶」의 무대와 인물들이 또한 그렇듯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아키타입(archetype:原型)을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을, 그에 걸맞은 상징 공간 혹은 은유적 세계 속에 설정하는 이야기 구조가 되도록 시도하고 있다. 표제작이자 작가의 최근작인 중편 「비형랑의 낮과 밤」은 <삼국유사> 속의 비형랑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간의 한계와 허무’의 단편을 드러내 보여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족과 외딴곳에 떨어져 살며 소설 창작 작업에 열중하던 주인공은 죽마고우인 신문 기자 곽희도가 보내준 한제민이라는 희대의 ‘대도’이자 탈옥범의 수기를 소설로 재구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설 속 화자인 작가는 밤과 낮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설화 속 인물 ‘비형랑’과 ‘대도 한제민’을 대비시키며 인간의 욕망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한 작가는 「비형랑의 낮과 밤」에서 분절된 세상과의 소통을 힘겨워하는 친구 곽희도를 통해 보잘것없는 인간의 한계와 덧없는 삶에 대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긴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이번 작업을 지난 16년간의 오랜 ‘들숨’ 끝에 내어쉬는 ‘날숨’ 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묘사된 풍경 속에 철학적 사유가 녹아든 문장’을 담기 위해 부단한 인고의 시간을 보냈음을 고백하고 있다. 물의 상상력, 에로스의 욕망 삼천포에서 태어난 작가 김인배의 글에는 물냄새가 난다. 비릿하고 서늘한 물의 기운이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과작인 그의 소설 중에서 많은 소설이 고향 바다의 물의 이미지를 핵심적인 속성으로 하면서 그것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환상의 배」, 「등대곶」 등이 그렇고, 강(江)이 직접적 배경이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물의 모티프로 충만한, 대표작 중 하나인 「물목」이 그렇다. 그러나 소설의 구체적인 지리적 공간은 이미 현실의 그 공간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작가가 아이 적부터 마음에 길러온 강과 섬과 바다와 등대로 자리잡아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의 소설 속에 퍼올리는 물의 상상력은 언제나 갈증과 미진한 물의 에로스의 욕망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운명적 시간과 공간으로서 억압되고 은폐된 채, 지금도 진행형으로 작가의 마음에 환상으로 자라나고 있는, 그의 소설을 만들어 가는 원형이다. 화자는 작가의 이차적 자아로 존재하지만, 김인배 소설의 화자는 작가의 욕망이 강하게 반영되어 화자가 작가의 곁에까지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에 가득한 바다, 물의 이미지는 그가 공부보다는 선원을 꿈꾸며 아버지와 대립할 만큼 그의 “어린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 그 바다”(「환상의 배」)가 전해주는 그리운 그 모든 것들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지금도 살아 작가를 이끄는 모티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세월이 흘러 관념으로 남아 작가의 내부에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삶의 에로스의 공간으로 자리하여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물목」과 「등대곶」에서 이러한 에로스의 세계를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소설 읽기는 그의 소설 속에 물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그 궁극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데 있다. 「물목」, 풍성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성찬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편 「물목」에는 한국어가 아니면 표현될 수 없는 아름답고 풍성한 시적 문체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물목」은 풍부한 고유어의 문체적 특성, 시간과 공간, 은유와 환유가 직조된 텍스트의 이중적 구조, 주제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초점화된 인물과 화자와 작가의 지향세계가 모두 물의 이미지로 넘치는 김인배의 소설 세계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갈밭에 개개비가 날아와 우는 여름밤, 어둠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한 풀벌레 울음과 시큼하고 역겨운 풀밭 냄새와 희미한 안개는 ‘간단없이’ 묘련을 16년 전 산협의 ‘어느 지레목’ 그 욕망의 공간으로 옮아가게 한다. 그곳은 “영혼처럼 생동하는 ‘이 저녁’, 안개를 운반하는 서늘한 공기”가, “지금 듣는 땅벌레 소리”가, “그녀의 뇌수를 저릿저릿하게 만들고”, “피와 살밑을 달음질”하는 살갗의 근지러움과, 께느른한 사지의 느꺼움이 욕망하는, 그러한 공간이다. 오늘, 묘련의 온몸을 욕망으로 달뜨게 하는 마음 한 자리에 은닉된 그날, 산협 지레목에서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희미한’ 그 사건에서 기인하면서 역(逆)으로 그날, 그 공간을 다시 채운다. 「물목」은 그 문체에서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구조가 시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시간 구조로 보아 텍스트를 대립적 관계로 이원화할 수 있는 것은 ‘일차적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오늘’이다. 묘련의 욕망은 16년 전 능욕의 순간을 욕망한다. 현재의 그것은 소리와 냄새와 안개의 이미지로 과거와 소통한다. 소리와 냄새와 이미지의 상상력은 시간을 넘어서 추상의 공간을 에로스로 가득 채운다. 전반부의 ‘오늘’, ‘이곳’은 항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지만, 묘련이 그 과거를 추억하는 순간으로서 과거의 끝자리이기도 하다. 전반부의 묘련의 과거는 과거이자 기억하는 오늘 현재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오늘’ 물목 객줏집 봉놋방에는 뜨내기 장사치들로 우꾼한 가운데 묘련은 밀려드는 추억에 젖는다. 전쟁판 같은 그 (장사치들) 고함소리와 함께 짓밟힌 잡초 덤불섶에서 우는 찌르레기 울음이 마치 사람이 하듯이 봉창문을 흔들고선 밀려드는 추억 같은 그 끝없는 회한을 간단없이 불어넣어준다. 후반부는 묘련의 이야기에서 딸인 항아의 이야기로 옮아간다. 후반부의 대부분은 항아와 남사당 사내와의 밀회에 바쳐진다. 강가 갈밭은, 묘련의 ‘산협 지레목’이나 마찬가지로 에로스의 공간이다. 항아와 사내는 방죽에서 살을 섞고 둘이서 함께 달아날 길을 도모한다. 마침내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어둠 속에 항아는 사내를 찾아 떠나고, 묘련과 마을 사람들은 비를 무릅쓰고 항아를 찾아 나서지만 항아는 갈대밭 기슭에 기절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이틀이 지나고 앓던 의식이 회복되면서 항아는 ‘그날 밤’ 천둥과 번개 속에서 야쿠자를 찌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던 사내를 보면서 혼절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항아를 염탐하였던 거꿀네의 이야기를 들은 묘련은 남사당 사내가 16년 전 그녀를 찾아왔던 한양의 낭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운명의 장난에 아찔해 한다. 묘련은 남편의 자살과, 자신의 어떻게 할 수 없는 욕망을 회상하면서 항아와 남사당 사내와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처럼 불행해질 것을 두려워한다. 묘련은 항아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사내가 정표로 주었던 은비녀를 꽂아준다. 즉 묘련은 항아가 사내의 지어미가 되도록 그를 찾아 떠날 것을 허락한다. 강물 위로 미끄러지듯 스치는 달빛, 달빛을 받고 “광물성 몸뚱이를 희멀겋게 드러낸 채 번들거리”며, “징그러운 비늘을 번득이며 길게 사행(蛇行)하는 강줄기”, 거뭇거뭇한 숲, 그 사이로 가랑이를 벌리고 누운 골짜기, 느리고 느린 꿈틀거림, 이들이 마침내는 하나로 합수(合水)하는 강줄기처럼 교합하여 묘련으로 하여금 덴덕지근하고 께느른하고 저릿저릿하고 갱신할 수 없게 한다. 정체불명의 낭인(浪人)으로, 남사당 사내로, 묘연과 항아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물목’은 어둠과 안개에 능욕당하는 에로스적 공간이다. “그날 밤 그녀를 능욕한 것은 ‘사내’가 아니라, 어둠과 안개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묘련의 무의식적 욕망임을 더욱 분명히 한다. 기억 속에서 어둠과 안개는 분명한 모든 형체를 지우면서 응어리지게 한다. 그것은 시간의 경계를 지워, ‘그날’을 ‘지금’의, 묘련의 애욕으로 채운다. 물목의 어느 골짝 지레목, 강가 갈밭은 바로 지금 묘련의 욕망으로 들끓어 부활하는 에로스의 시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수록된 다른 작품 「등대곶」에서 열여덟의 지예가 등대의 사내에게 이끌리어, 가쁜 숨길로 허청대며 등대길로 오르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운명적 존재라고밖에는 더 말할 수 없는, 그것은 이미 존재하였던 것이면서 지금도 묘련을 뒤척이게 하면서 갈증과 원망으로 현재를 죄는 에로스이다. 그것은 본능이면서 원죄이고 갈증과 원망과 구원이면서 가학적인 고통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