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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태의 본질은 핵 발전이 구조적으로 재앙 수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이런 위험은 언제든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단순히 핵 발전을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논란을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위험 수위에 다다른 전력 수요량을 점검해 수요량을 줄이고, 점차 에너지원을 전환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사회적 부담이 적은 재생 가능 에너지원들은 아직 경제성이 부족하고, 기술 발전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전력량이 부족하니 또 다른 핵발전소를 만들자는 주장은 필수적인 에너지 공급과 과잉 수요를 혼동하게 하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 신화가 아니라 경제성과 효율성을 무기로 내세운 전력 공급의 신화가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 p.30
파리 협정에서 각국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섭씨 1.5도로 제한하는 데 노력’하기로 했다. 평균 기온 상승폭이 섭씨 2도를 넘어설 때 맞게 될 기후 파국만은 피하자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기후 취약국과 비정부 기구들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파리 협정은 다른 에너지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짧은 시간에 온실가스를 크게 줄이기는 어려워도, 길게 보면 온실가스 감축 체계를 반드시 갖춰야 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바뀌기 시작할 수 있다. 특히 화석연료 중심인 지금의 에너지 체계는 파리 협정에서도 말한 재생 가능 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하기 시작하고,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여러 가지 기술도 개발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 pp.49-50 에너지 빈곤의 다른 이름은 에너지 불평등이다. 에너지 불평등은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지위에 차이가 나 에너지 이용과 에너지 비용 부담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격차가 나타나는 경우다. 소득 계층에 따라 에너지 사용량이 다를 뿐 아니라 에너지 소비에 쓰는 비용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저소득 계층일수록 높다. 고소득층은 냉난방, 조리, 교통, 정보 통신, 문화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반면, 저소득층은 편의 시설도 부족하고 에너지 비용도 모자라 에너지 이용량이 적다. 저소득층일수록 도시가스 같은 값싼 에너지에 접근할 수 없어 에너지 불평등은 더욱 확대된다. 저소득 계층은 상대적으로 비싼 등유를 이용하고, 고소득 계층은 도시가스를 이용하여 난방을 하는 비율이 높다. 도시가스에 견줘 등유는 단위 열량당 비용이 60퍼센트가량 비싸 고소득층이 오히려 값싼 에너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 pp.59-60 한국은 과연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쓰고 있을까. 석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2011년 원유 수입량은 9억 3000만 배럴, 곧 약 1477억 리터다. 200리터 드럼통 7억 4000만 개다. 하루 물 소비량의 5.7배고, 코엑스 수족관을 6만 4000개 넘게 채울 수 있는 양이다. 소주병에 담으면 4177억 병인데, 이 소주병을 눕혀 연결하면 지구를 2241번 돌 수 있고 서울과 부산을 9만 9777번 왕복할 수 있으며 지구와 달을 1191번 왕복할 수 있다. 세계 7위의 석유 소비 국가 한국은 하루에 석유 231만 배럴을 쓰는데, 장충체육관을 6번 채울 수 있는 양이다. 2011년 원유 수입액은 1004억 달러인데,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502억 달러)와 자동차(453억 달러) 수출 총액을 넘어선다. ‘물 쓰듯 한다’는 말을 ‘석유 쓰듯 한다’고 고쳐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석유에 중독돼 있는 것이다. --- pp.99-100 정부나 기업이 오염된 토양을 복원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토양이 얼마나 오염됐는지 조사하고 연구하는 데도 인력이 필요하고, 정화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설계하는 공학자,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땅을 파고 나르고 정화하는 현장 인력(굴삭기 기사, 덤프트럭 기사 등), 복원 과정에 있는 토양을 관리하는 인력까지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녹색 일자리는 특정 산업 분야나 특정 기술직에 국한되지 않고 아주 폭넓은 범위에 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p.150 재생 가능 에너지는 평화의 에너지다. 북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한반도 위기의 근원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곳이다. 에너지원은 인간의 생존과 경제 활동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군사 분야에서 악용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핵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은 동전의 양면이나 같기 때문에 핵을 폐기하는 대가로 다시 핵을 제공하는 방식은 알맞지 않다. ‘평화를 위한 핵’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제 정치와 안보에서 마찰이 없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재생 가능 에너지가 그런 요건을 충족한다. --- p.180 ‘에너지 관련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한 참여와 권리, 그런 참여를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쟁점에 관한 학습과 성찰,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에너지 문제들에 실천적으로 관여할 의무와 덕성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에너지 시티즌십을 정의한다. 이런 에너지 시티즌십을 지닌 에너지 시민이 값싼 가격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를 바라는 수동형 소비자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송전탑 반대 운동에 내몰린 ‘밀양 할매’들의 눈물을 타고 흐르는 전기를 성찰하고,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을 하며, 사회적 부정의를 낳는 시스템을 변화시키려 소비 행동을 바꾸고 생산자로 참여하는 일 등을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이 지녀야 할 책무와 덕성으로 느끼게 된다. --- pp.196-197 에너지 정책은 과학자와 경제학자 같은 전문가와 이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는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이 논의하고 결정됐다. 그러나 전문가주의의 지배가 더는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먼저 에너지를 개발하고 이용하는 과정에 공적 재원이 투입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기 때문에 에너지 정책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자 시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물결을 전문가주의라는 둑으로 막기 어렵게 됐다. 둘째, 실용의 차원에서도 시민 참여는 중요해졌다. 그동안 전문가와 관료와 기업이 결정하고 밀어붙인 정책들이 지역 주민과 시민들의 저항으로 여러 번 좌절됐다. 시민 참여는 정책의 정당성과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점점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지식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발휘되는 주민의 지식보다 언제나 우월하고 타당하지는 않다는 경험 증거들이 점점 쌓이고 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의사 결정은 지식의 양과 정확도뿐 아니라 가치의 판단에도 긴밀히 연계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시민 참여는 의사 결정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 p.202 적정 기술의 관점에서 보면 대규모 화력 발전소나 수력 발전 댐을 건설하고 장거리 송전망을 이용해 먼 곳까지 전력을 공급하려는 접근이 올바른지를 의심하게 된다. 또한 외딴 지역의 독립적 전력 공급 시설로 종종 활용되는 디젤 발전기도 외부 자원에 계속 기대는 점에서 알맞지 않다. 지역 내 수요를 감당할 규모로 설치한 뒤 추가 연료 공급 없이 태양광, 강물, 볏짚이나 코코넛 껍질 같은 농업 부산물, 목재 같은 재생 에너지 자원을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해 공급하는 방식이 적정 기술 개념에 알맞다. 이렇게 개발 원조 활동에서 적정 기술 개념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대규모 기술 시스템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많은 재정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거대 시스템이 자리잡고 운영되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다는 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 pp.246-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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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시민 ―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핵 밀집도 세계 1위, 핵발전소 반경 30킬로미터 거주자 400만 명, 30여 년 동안 고장 정지 사고 400여 회. 그래도 핵발전소는 잘 돌아가는 나라. 하루 석유 소비량 231만 배럴, 에너지 빈곤층 201만 가구에 482만 명(2008년 기준 추산), 남과 북의 에너지 공급량 15 대 1, 자동차-석유-도로 삼각 카르텔에 포획된 지속 불가능 사회, 바로 한국이다.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 줄여서 《에시민》은 2012년 시작된 ‘시민발주 탈핵연구기금’이 거둔 소중한 열매다. 시민이 후원하는 소액 연구 기금으로 시민이 알고 싶은 주제의 연구를 진행하는 이 기획에 개인 37명과 기관 17개가 힘을 보탰다. 참여자들의 제안과 투표를 거쳐 ‘탈핵 에너지전환 시민 교양서적’을 내기로 결정했고, 에너지와 기후 분야를 대표하는 민간 싱크탱크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정연구소)는 에너지와 기후 관련 쟁점을 10개 영역으로 나눠 쉽게 풀어 쓴 《착한 에너지 나쁜 에너지 다른 에너지》(2014)를 냈다. 관련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시시각각 바뀌는 에너지 문제에 새롭게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에정연구소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에 관련된 최신 동향과 쟁점을 중심으로 전면 개정판 《에시민》을 펴냈다. ‘에너지 관련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한 참여와 권리, 그런 참여를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쟁점에 관한 학습과 성찰,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에너지 문제들에 실천적으로 관여할 의무와 덕성’으로 정의되는 에너지 시티즌십을 지닌 사람이 에너지 시민, 곧 ‘에시민’이다. 에정연구소와 탈핵연구기금 참여자들은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에너지 시민의 출현과 에너지 전환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계기가 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 대안을 일굴 에시민을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 강의 《에시민》은 시민 발주 탈핵 교양서적이라는 취지에 맞게 강의 형태를 빌려 석유와 핵에 포획된 에너지 문제의 현실을 살핀 뒤, 관련 쟁점을 정리하고, 정의로우면서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을 전망한다. 이런 논의는 ‘탈핵’(핵발전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전지구적 흐름), ‘지속 가능성’(기후변화와 석유 생산 정점 등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 가능 사회의 전망), ‘사회 정의’(비용과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 ‘사회적 경제’(지속 가능성과 지역 사회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경제 영역의 확대)라는 네 가지 열쇠말로 모인다. 1부 ‘상황’은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를 경제, 환경, 복지, 안보라는 차원에서 점검한다. 1장은 현대 사회가 화석 에너지와 핵에너지에 기반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고에너지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석유 정점과 에너지 투자 수익률 같은 개념을 고리로 살펴본다. 2장은 기후변화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 같은 에너지 다소비 사회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후변화란 무엇이며 에너지 문제에 어떻게 연계돼 있는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 국제 사회가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3장은 고에너지 사회의 에너지 풍요 속에서 드러나는 에너지 빈곤과 에너지 불평등 문제를 한국 상황에 초점을 맞춰 점검한다. 또한 4장은 에너지 자원을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와 에너지 안보가 취약한 한국 상황을 에너지 전환의 관점에서 살핀다. 2부 ‘쟁점’은 정치, 기술 위험, 사회 정의, 일자리, 남북 관계 등을 살핀다. ‘에너지 정치’를 다룬 5장은 이 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에너지와 기후변화 문제를 공학 용어와 경제 용어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 개발과 이용, 나아가 정책 결정 과정에 누가 참여하고 어떤 집단의 이해가 관철되는지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살핀다. 6장은 에너지 문제에 관한 전통적 쟁점인 핵 발전 문제를 다루는데, 핵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하기보다는 핵 발전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7장은 다시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면서도 ‘기후정의’에 집중한다. 기후변화의 원인 제공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구인지, 또한 기후변화에 대응한다는 정책이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지 등을 살핀다. 8장은 기후변화가 경제에 영향을 주고 일자리 문제에 연계되는 과정을 알아보고, 대응책으로 논의되는 녹색 일자리와 정의로운 전환 개념에 관해 논의한다. 9장도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한반도 북쪽,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싼 에너지 빈곤과 에너지 위기의 실태를 살핀다. 또한 북한 에너지 체제의 특징, 지속 가능성, 자구 노력도 소개한다. 3부 ‘대안’은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시민을 주목한다. 10장은 에너지 전환이 에너지원의 변화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복합적 변화라고 설명한 뒤 에너지 전환의 한 차원인 에너지 시민성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11장은 에너지 정책과 시민 참여 문제를 다루는데, 그동안 에너지 체제에서 배제되던 시민들이 참여해야 에너지 전환이 실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참여 문제는 중요하다. 12장은 에너지 전환을 분석하는 이론으로 ‘전환 연구’와 ‘공동체 에너지’ 논의를 소개하고, 여기에 기반한 에너지 협동조합의 가능성을 살핀다. 13장의 주제는 국제적인 에너지 빈곤 문제다. 에너지 빈곤의 실태를 살핀 뒤,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문제 제기 한다. 이어서 대안으로 제기되는 적정기술 운동의 구체적 사례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14장은 에너지 다소비 공간이자 주체인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린 캠퍼스 운동을 소개하면서, 에너지 전환을 추구하는 에너지 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본다. 에너지 민주주의 ― 에너지 독재에서 벗어나는 에시민의 필수 교양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뒤 한국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휘말려들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핵발전소는 오늘도 잘 돌아간다. 2012년 한 해 동안 요금을 못내 가스가 끊긴 사례가 5만 5803건 기록되고 단전은 16만 5000건(516억 원)이 일어난 한국에서 정부는 2010년 한 해 동안 삼성전자 등 10대 기업에 전기 요금을 4387억 원 지원했다. 에너지 불평등이고, 에너지 비민주주의다. 언뜻 경제 문제로 보이는 에너지 문제는 환경 문제이자 사회 문제다. 핵발전소나 핵 폐기장 건설에 따른 기후나 환경 문제, 단전에 따른 촛불 화재 사망 사고, 값싼 도시가스를 쓰는 도시와 비싼 등유를 때는 농촌, 고유가와 정유사의 담합이나 폭리에 따른 서민 부담 등 여러 문제에 연결돼 있다. 에너지 문제에 다가가는 방식에 따라 에너지 정책을 만드는 과정이 달라지고, 이렇게 마련된 정책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 생각지도 못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에너지 위기와 핵 발전의 공포에서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지금, 에너지 민주주의는 핵과 석유에 포획된 중앙 집중형 에너지 체계를 해체하고 다른 에너지를 찾아가려는 에너지 시민들의 필수 교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