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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주는 김해 읍성을 허물고 도로를 만드는 일터로 나갔다. 걸어서 십 리 조금 못 미치는 거리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수비를 담당했던 김해 읍성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허물 수밖에 없는 운명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회한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식구들이 먹을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하루 일당이 10전이었는데, 그것으로 쌀 한 되 보리쌀 두 되를 살 수 있었다. 이것만이 그가 일하는 이유였다. --- p.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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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를 살다 간 아버지들의 초상
섣달 그믐밤은 분명 할아버지 세대부터 현재의 나의 세대까지 이어지는 가족사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겪는 일들은 당시의 민중들의 삶으로 이어지며 소설로서의 보편성을 지니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제 강점기 때의 만세 운동과, 농지 개척, 6·25의 비극,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윗세대들의 삶이었다. 김밥을 꺼내 먹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안개도 어둠도 아니었다.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는 아버지를 남겨두고 나 혼자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엿보는 것 같아 허리를 구부리고 김밥 한 토막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밥알이 잘 씹히지 않았다.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꺼칠꺼칠한 느낌이었다. 입술에서 짠맛이 배어나왔다. (20, 21쪽) 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으로 가는 현재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아버지를 두고 밥을 먹는다는 슬픔에서 옛날의 기억으로, 그리고 다시 그 기억 속에서 더 옛날로 들어가 힘겹게 살던 할아버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온다. 할아버지의 시간으로 들어온 소설은 그의 힘겨운 모습에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삶은 아버지로 들어와 연이어 터지는 시대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천천히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는 현재로 돌아온다. 작가 이기윤(李基潤·54·육사 33기)은 책의 첫머리에 “8남매의 장남으로서, 11남매의 아버지로서 가족의 생존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것은 개인사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일제와 해방, 그리고 6·25 전쟁의 격동기와 나란히 서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은 우리 근현대사의 한 단면임에 틀림없으리라”라고 적었다. 이미 가족사와 근현대사의 경계를 충분히 인지하고 보편적인 민중상으로서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승화시킨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현역 대령인 작가가 쓴 소설인 만큼 6·25 전쟁 부분은 특히 현실감을 가지며 당시의 전쟁의 상황을 선명히 알려준다. 또한 소설은 이 외에도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개인이 겪는 하나하나의 일로서 생생히 전달해준다. “오메요! 지금이 어떤 땐데 대학이 무신 말인기요?” “야야, 그기 아이다. 막내이는 우짜든지 너그들이 대학을 시키야 할끼다.” “오메 보소! 형님은 애가 몇이나 되는 기요? 그걸 다 맥이 살리려면 죽을 판 살판 일을 해도 될까 말까 안 하요. 그라고 지도 언자 논마지기나 가지고 좀 살아볼라고 하는 판인데 어데서 그 돈을 대겠소?” “그래, 너그들 살림 걱정만 걱정이고 막내이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이다 이기지?” 언제나 조리 있게 말하는 둘째 삼촌도 할머니를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난 바에는 더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이었다. (231, 232쪽) 그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소설 속에서 보편적 민중상이 되어 흘러간다. 만세 운동 이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좋아하던 술도 입에 대지 않던 할아버지, 일본인 소유의 땅에서 소작인으로서 땅띄기를 하던 아버지, 전쟁으로 군에 가게 된 셋째 삼촌, 전시 체제 하에 생긴 연합대학. 이 모든 것들이 당시의 시간을 선명히 알려주며 당대를 살아간 이들에게는 공감과 향수를, 그 후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윗세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일깨워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