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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 연구와 유적 현황 / 권은주
Ⅰ. 머리말 Ⅱ. 말갈의 원류 Ⅲ. 말갈의 정치(사회발전)와 대외관계 Ⅳ. 말갈의 분포와 유적현황 Ⅴ. 맺음말 고구려 유민 연구 / 정병준 Ⅰ. 머리말 Ⅱ. 고구려 유민의 분산과 귀속문제 Ⅲ. 당의 고구려 유민 편제와 한화문제 Ⅳ. 발해의 건국과 고구려 유민 Ⅴ. 개별 고구려 유민에 관한 연구 Ⅵ. 맺음말 발해 유민 연구 / 이효형 Ⅰ. 머리말 Ⅱ. 동란국사 연구 동향 Ⅲ. 유민사 연구 현황 Ⅳ. 유민 연구의 특징과 과제 Ⅴ. 맺음말 고구려·발해 유민 관련 유적?유물 / 바이건싱 Ⅰ. 고구려 유민의 당 유입과 관련한 문제 Ⅱ. 고구려 유민의 유적?유물 현황 Ⅲ. 발해 유민의 이동 Ⅳ. 발해 유민의 유적?유물 거란·요 연구-21세기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 윤영인 Ⅰ. 머리말-『요사』의 편찬과 20세기 중국 학계의 거란사 연구 Ⅱ. 민족, 문화사 연구 Ⅲ. 정치, 경제사 연구 Ⅳ. 대외관계사 연구 Ⅴ. 거란문자 연구 Ⅵ. ‘카라키타이(서요)’연구 Ⅶ. 맺음말-중국 학계 거란사 연구의 특징과 문제점 금 연구 / 김위현 Ⅰ. 머리말 Ⅱ. 정치, 인물, 제도 Ⅲ. 경제사 Ⅳ. 민족정책과 여진, 발해 Ⅴ. 맺음말 거란·요·금 관련 유적·유물 / 왕위랑 Ⅰ. 중국 동북지구 요·거란·금·여진 역사 유적과 유물 개술 Ⅱ. 고성 유적지 Ⅲ. 고분 유적지 Ⅳ. 요·금 고탑 Ⅴ. 요·금 관인 Ⅵ. 요·금 비각(묘지명) Ⅶ. 요·금 동거울 Ⅷ. 요·금 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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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진행되고 있는 중국 학계의 고구려 유민사 연구의 특징을 요약해 보자. 고구려 멸망 시기의 호구를 계산하면서 전쟁에 따른 손실 등 여러 요인을 들어 그 실제 숫자를 적게 계산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순수 고구려족을 고구려인에서 따로 분리시킨 다음 당으로 천사된 고구려족의 숫자는 늘리면서, 고구려인 안에서 고구려족이 차지하는 숫자를 줄이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또는 고구려족이 전체 고구려인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높여 고구려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의 호적에 등재된 마당에 고구려족?옥저인?한인 등의 구별이 과연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당으로 천사된 고구려 유민의 삶에 관한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당수의 고구려인이 변방의 군인으로 편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병종(兵種)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지만, 기존의 한국 학계에서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을 ‘편호(編戶)’라는 한 가지 범주로 파악하던 한계를 뛰어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당의 군사집단으로 편제된 고구려 유민의 실체가 자세히 밝혀진다면 당으로 천사된 고구려 유민의 삶의 형태를 한층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몇몇 학자들은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이 “나라가 망하고 가문이 망했다”는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당에 대해 동류의식을 가지고 충성을 바쳤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 예로서 고선지와 이정기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정기는 일시 당 왕조에 협력하기도 하였지만, 당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번진(藩鎭)을 지배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선지의 경우에도 당 왕조에 봉사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중간적’ 인물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고구려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한중 간의 대립을 좀 더 큰 차원에서 풀어 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본문 중에서
발해의 멸망에 이어 전개되는 유민사는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중국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는 개별 연구로서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으나 발해사의 한 부분으로 결코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유민사의 입장보다는 도리어 여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어서 바라보는 초점이 다르다. 그런데 1950년대까지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던 일본이 근래에 들어서는 관련 연구가 전혀 없어 그 배경이 궁금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민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이루어진 유민사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양적인 면에서의 증대와 함께 질적인 면에서도 그 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연구 주제 역시 매우 다양화돼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에서의 유민사 연구는 바라보는 시각과 주목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한국과 중국이 발해 유민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이어 개별 논문 외에 발해사 개설서에 항상 유민사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봐서 유민사가 발해사의 한 영역에 포함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리고 유민사의 소멸시기를 중국에서는 원(元)대, 한국에서는 고려로 잡음으로써 하한이 비슷하다는 점도 유사하다. 거란에 멸망한 후 200년에 이르는 유민들의 항생에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는 점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차이점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인정하는 이른바 후발해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 번째 부흥운동은 정안국이라는 입장이다. 게다가 후발해와 정안국을 연속선상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나라로 보고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도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후발해와 정안국, 올야의 관계에 대한 복잡한 논쟁도 없이 정안국과 올야를 독립적으로 서술하는 양상이다. 그리고 동란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판이하다. 한국에서는 발해의 멸망에서 부흥운동을 설명하는 연결 고리로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인 데 반해, 중국에서는 유민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경향이 강하고 그 서술의 분량도 유민사 전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결과의 차이점이 결코 연구 자료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유민사 연구의 자료는 어느 나라든 크게 색다른 것이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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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한반도 안으로 한정되었지만, 그들이 활동한 지역과 그곳의 문화는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녀왔다. 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곳이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족(漢族)과 그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형성된 까닭에 중심부를 기준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특히 고구려는 만주지역(지금의 중국 동북지역)을 무대로 기상을 크게 드높였던 탓으로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부심으로까지 각인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이를 계승한 발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유민의 행방과 두 나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흥기한 민족과 국가들에 관해서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래에 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고구려 등이 중국사에 속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만주지역이 지금의 중국 영토에 속하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출현한 민족과 국가는 모조리 중국사에 속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것은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도 인정한 사실이다. 현재 두 나라의 견해가 다른 이유는 김한규의 표현대로 “한국 학계에서는 ‘한국의 역사’가 ‘한민족의 역사’로 이해되는 데 반해, 중국 학계에서는 ‘역사상 중국’의 범주를 ‘(현재)중국의 역사’ 범주와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제기된 중국 측의 주장들을 보면 지금의 중국 강역을 넘어 역사상의 귀속문제를 논하고 있다. 본 연구는 고구려와 발해 유민들의 행방과 뒤이어 출현한 민족이나 국가에 관한 중국 학계의 연구 상황 및 관련 유물·유적들의 현황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만주지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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