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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러가 좋아
-고도 난징의 두안리 -가난한 자는 죄다 때려눕혀라 -재교육 -파운드, 온스, 고기 -평론:90년대 ‘신생대’ 문단의 생리학-주원론 -역자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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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성욕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다만 때를 잘못 타고 났을 뿐이다. 아버지 시대에는 성욕을 성욕이라 부르지 않고 이상이나 추구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운동장이나 도로를 10킬로미터씩 뛰어야 했다. 이 습관은 노인이 된 지금은 끊은 지 꽤 오래다.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끈적끈적한 그 몇 밀리리터의 연료를 아껴 써야 한다는 것을, 항상 전력질주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문제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의 주된 문제인 것이다.
네 어머니는 내가 여기 온 것도 몰라. 그러면 아빠는 저처럼 완전히 자유의 몸이네요. 당연하지. 남자 대 남자로 이렇게 뭉쳤는데, 우리 뭔가 해야 하지 않겠니? 두 말 할 필요 없죠. 우리는 남자들의 일을 하러 가야 해요. 하지만 지금은 오후이고 태양이 아직 저렇게 높은데? 아참, 태양이 높으면 좀 어때요! 내가 동전 두 개를 던져 ‘짤랑’하는 소리만 나면 밤이 우리를 위해 미리 와줄 거예요. 나와 아버지는 각자 콜라가 든 종이컵을 들고 인도 한쪽의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았다. 우리는 가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지만 내면적인 대화는 중단 없이 이어졌다. 나는 스스로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들로서 회피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다. 만일 미래에 내가 하루의 여유를 얻어 주변 사람들을 떨치고 명예와 지위도 떨치고 내 아들을 찾아간다면, 나는 아들이 조금 싹수가 있어서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희귀한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보천치처럼 경건한 표정으로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지 않고 말이다. 내 말 잘 듣거라, 아들아. 존경이란 건 속 빈 강정일 뿐이란다. 우리는 돈을 본받아야 한다. 낭만적인 달러를, 굳건한 엔화를, 온화한 스위스 프랑을 본받아야 한다. 절대 허위가 아닌 그것들의 너무나 현실적인 성질을 본받아야 한다. --- '나는 달러가 좋아' 중에서 양심을 걸고 말해. 맞아, 안 맞아? 내 여자친구가 말했다. 맞기는 개뿔. 내가 말했다. 안 맞으면 그건 네가 벌써 내 계측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야. 보통 나는 110파운드 정도 무게에 민감하거든. 그녀가 갑자기 흥이 나서 나를 침대 위에 벌렁 넘어뜨리고 소리쳤다. 나도 무게를 재줄게! 그러나 몇 번을 시도해도 나를 안아 일으키지 못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나는 대저울이니까 당연히 대저울 쓰는 방식으로 무게를 쟀지만 너는 앉은저울이잖아. 너, 앉은 저울 어떻게 쓰는지 몰라? 나는 몸을 쫙 펴고 역시 몸을 쫙 편 그녀 위에 골고루 무게가 실리게 누웠다. 마치 추수철 농민이 큼지막한 옥수수 광주리를 들어 앉은저울에 놓은 것 같았다. --- '파운드, 온스, 고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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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단의 건달, 주원의 "매우 유해한 소설"이 왔다!
이런 중국 소설은 없었다! 중국 검열의 메커니즘을 초월한 작품 주원의 1995년 작『나는 달러가 좋아』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이른바 ‘신시기 문학’의 한 이정표이자 중국 ‘비주류 문학’의 대표작이다. 이정표라 함은 이 작품이 중국 현대문학에서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소설 조류의 대명사로서 일부 ‘엄숙 문학가’들에 의해 ‘『나는 달러가 좋아』류’라는, 저급 색정문학을 가리키는 카테고리 명으로 차용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또한 ‘비주류 문학’이라는 것은 작가 주원이 중국 작가협회 및 공식 문학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탈권력, 탈이데올로기의 글쓰기를 견지해 온 것을 의미한다. 『나는 달러가 좋아』가 보여주는 문학적 지평은 중국에 엄존하는 검열의 메커니즘을 초월하면서 세계문학 어디에도 부재하는 힘찬 서사와, 현실을 향한 아이러니한 시선을 보여준다. 이미 한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위화와 쑤퉁조차 도달 못한 극단의 소설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나’는 현대 중국의 기형적 자본주의가 낳은 배금주의자도 욕망의 추종자도 아니다. 반대로 예술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옹호하는 시대착오적인 문학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보수 이데올로기의 집단주의적 가치와 자본주의의 속물주의, 바로 그 정중앙에 몸을 담은 채 끊임없이 물들고 흔들리면서도 그 대극적 가치인 휴머니즘이나 개인주의의 허위에도 구역질을 서슴지 않는 진정으로 고독한 서사자敍事者이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발칙한 글 도회지로 출장을 나온 아버지가 객지 생활을 하는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큰아들의 방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락 밴드 기타리스트인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소설가인 〈내〉가 아버지에게 성性을 접대하겠다는 엉뚱한 효심을 발동하게 되면서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급기야 〈나〉의 주밀한 안배에 아버지가 말려들게 되고 이때부터 엎치락뒤치락 부자는 두 마리 수컷이 되어간다. “사는 데 성 말고 다른 건 없니? 난 당최 이해가 안 가는구나.” 아버지는 원고 뭉치를 한쪽으로 던지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내 성에 화가 난 거였다. “아니, 어떻게 제 소설에서 성만 보시는 거예요?” “작가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뭔가를 줘야 되는 건 아니니? 이상이나 추구, 민주, 자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버지,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딴 것들은 제 성 안에 다 있어요.” 사실이 그렇다. 그의 성 속엔 없는 게 없다. 발칙한 소재를 명랑한(?) 문체로 서술하는 이 글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느낌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드러내놓은 적은 없지만 그러나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주원이 펼쳐 보이는 낯설지만 친밀한 세계가 강한 흡입력을 갖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