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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중국 현대미술
찬란한 도전을 선택한 중국 예술가 12인의 이야기
이보연 저
시공사 200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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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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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여는 글

그림으로 죽으리라 - 우관중
마오쩌둥 초상화

영원한 재양의 별 - 황루이
베이징의 예술 명소1

온화와 폭력의 미학 - 조우춘야
베이징의 예술 명소2

찬란한 여혼의 절규 - 마오쉬휘
중국의 대표 컬렉터

새가 된 예술가 - 예용칭
상하이의 예술 명소1

선악과를 따먹은 예술가 - 왕광이
상하이의 예술 명소2

역사와 삶과 기억의 향수 - 장샤오깡
영화 속의 20세기 중국 미술

건달의 물음 - 팡라쥔
션쩐, 광조우, 홍콩의 예술 명소1

웃음 속에 숨겨진 칼 - 위에민쥔
션쩐, 광조우, 홍콩의 예술 명소2

마음속 이야기 - 정판즐
위엔밍위엔과 송주앙예술촌

매혹적인 고통 - 펑정지에
쿤밍, 따리의 예술 명소

영원한 달콤함 - 손국연
평론가와 큐레이터

부록-시대배경
마오쩌둥 시대 1949~1976
개혁 개방 시대 1976~1989
글로벌 시대 1989~현재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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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이보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는 중국 칭화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중국 근현대미술사 전공 박사 과정 중이다. 2004년부터 중국 당대 예술에 관심을 갖고 중국 미술계 관련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8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520쪽 | 1200g | 188*220*35mm
ISBN13
9788952752963

출판사 리뷰

그림으로 죽으리라-우관중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난 우관중은 항조우예전 졸업 후 꿈에 그리던 파리로 유학을 떠나 회화의 순수 형식과 언어 문제에 침착했다. 자신이 뿌리내려야 할 곳은 조국임을 깨달은 그는 유학 후 중국행을 선택했지만,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격렬하게 외치며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그의 화풍과 당시 마오쩌둥의 문예 정책 노선은 서로 부합하지 않았다. 10년 문화대혁명 기간에 ‘우선 한쪽에 두고 보는’ 부류로 분류된 우관중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작품들을 훼손해야만 했다. 몇 년 후 혁명 분위기가 완화되자 그는 차라리 그림을 그리다 죽으리라 결심하고 분뇨 지게를 이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분뇨 지게 화파’가 형성된 순간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우관중은 찬란한 빛을 보게 되었으며 자유 창작론, 형식 미론 등 정치에서 독립한 자유로운 예술의 가치를 주장한 그의 사상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미술 시장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던 1990년대부터 우관중은 시장의 간판스타가 되었고 지금도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영원한 재야의 별-황루이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몇 년간 대륙에 온풍이 불어왔다. 언더그라운드 문예지《오늘》의 표지 디자인 편집을 맡았던 황루이가 스스로 전시를 열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게 시작된 미술과의 인연은 1979년 9월 27일, 중국 현대 예술사상 최초로 민간 예술 청년들이 조직한 노천 전시회 《싱싱미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싱싱미전》은 정부의 ‘취소 명령’으로 물의를 일으키더니 급기야 예술의 자유를 위한 시위로 번져갔다.《뉴스위크》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언론마다 시위를 보도했고 이것이 압력이 되어 정부는 베이하이 공원의 황팡자이화랑에서 이들의 전시를 허락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오늘》지는 강제 해산 되었고 멤버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일본과 세계 각지를 돌며 활동했던 황루이는 2002년에야 비로서 입국 허락을 받고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의 재야적 삶은 계속되었다. ‘국제 따샨즈 예술제’를 통해 철거 위기에 놓인 798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 힘을 쏟았다. 현재 그는 베이징 외곽 가오베이디엔의 오래된 공장에 새 둥지를 틀고 ‘베이징 당대 국제 예술제’의 감독을 맡으며 예술가로서, 투쟁가로서 중국 당대 미술을 위해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

온화와 폭력의 미학-조우춘야

대학시절부터 제도권에서 인정받고 지금도 그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조우춘야. 지적이고 품위 있는 정신세계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색정적인 농담을 거침없이 퍼붓는 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귀티 나는 외모와 달리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이른바 스타 학번이라는 쓰촨미술학원 77학번으로 입학해 졸업 후 독일로 유학 길에 오른다. 1989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중국 전통 회화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돌] 시리즈를 선보이며 문인들의 우아하고 조화로운 미감에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후 1994년 지인에게 선물 받은 헤이건(독일산 순종 양치기 개)을 작품 이곳저곳에 등장시키며 파괴와 해체를 통쾌함을 맛보았다. 50대에 접어들면서 조우춘야는 도화에 심취해 야외정사를 벌이는 뜨겁게 달아오른 남녀를 화폭에 담았다. 도덕과 죄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진지하고도 본능적인 환상이 활개 치는 그림 속에는 그는 ‘온화하고도 폭력적인’ 천일합일의 순간을 선보이고 있다.

찬란한 영혼의 절규-마오쉬휘

‘비극적 죽음과 고통, 희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믿는 예술가.’ 쟝샤오깡은 마오쉬휘를 이렇게 불렀다. 중학교 2학년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으로 그림과 인연을 맺은 그는 훗날 독일 표현주의에서 정신성과 형식 문제의 답을 찾았다. 낮에는 쇼윈도 배치, 간판 쓰기 같은 허드렛일로 조용히 지내지만 밤이 되면 장샤오깡, 판더하이 같은 예술 동지들과 광기 찬 시간들을 보냈던 마오쉬휘. 제도권의 전시와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진정한 예술가의 자존심을 잃지 않던 그는 텐안먼 사건으로 권력에 대한 사고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어느 틈엔가 다른 예술가들이 거대한 정치적 기호를 가지고 해외 무대로 옮겨가는 동안 그는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닌 자신이라 생각했다. 이때부터 정치나 경제만큼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의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들과 마주했다. 이후 그의 화면을 가득 채운 터치와 강렬한 선, 강력한 상징적 소재들은 한 쪽 날에 고요히 열정을 가득한 한 자루의 가루로 남게 되었다. 처절하고 고독하게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가위는 화폭 중앙에 오롯이 서서 열정, 충동, 절제, 묵상, 기도 등을 그리며 여전히 그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견디고 있다.

새가 된 예술가-예용칭

주류 사회와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한 예용칭.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나 밝고 건강하다. 쓰촨미술학원 시절, 고갱을 좋아해 원시적인 풍경을 그리기 위해 열대 지역 시슈앙반나를 여덟 차례나 돌기도 했던 예용칭은 책에서 만난 고갱을 그리워하면서 한편으론 중국 전통 문인들처럼 어지러운 속세를 벗어나 이상적인 자연 속에서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 전국적으로 ’85 미술 붐이 일어 복잡한 문화 충돌과 격렬한 논쟁이 오갈 때도 그는 오히려 자신만의 낭만을 쫒았다. 1990년대 초 중국 미술계에 팝아트가 유행처럼 퍼질 때 그는 드로잉과 회화성이 강조된 ‘시적인 팝아트’를 선보였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전략적 부호로 무장하여 현실을 조소하는 선명한 중국식 아이콘을 제시하지 못한 예용칭은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쿤민 상허회관 설립과 쿤밍 추앙쿠의 설립, 상허차칸 예술 행사 개최 등 대내외적인 부분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제 그는 젊어서부터 큰 친밀감과 만족감을 주던 수묵으로 환원해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새와 함께 하루의 잡념을 떨쳐버리는 소중한 시간과 함께 그는 예술가로서 더욱 성숙해지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예술가-왕광이

“예술가들은 공통적인 환상 속에 다 마찬가지인 사실들을 가지고 신화를 구축한다.” 왕광이는 이렇게 과장과 뻥튀기의 인문학적 처리를 거친 예술가들의 신화에 대해 터놓고 까발린다. 저지앙미술학원 시절 중세 철학과 사상을 흠모한 그는 고전주의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북방 문화와 남방 생활을 모두 경험한 그는 곰브리치의 책에서 ‘도식과 수정’에 관한 개념도를 이해하고 고전 도식에 대한 ‘수정’ 작업에 매달린다. 하지만 다다식의 반예술 사상에 대한 흥미는 ‘고전주의 콤플렉스’와 ‘수정’ 작업에 회의를 품게 했고, 결국 고전적이고 인문학적 가치와 사고를 거부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때마침 불어 닥친 ‘마오열’이라는 비이성적인 신화 재현에 왕광이는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외 전시 초청이 이어지면서 예술사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확장, 오도되었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대비판]은 ‘중국 주류 정치 이념을 재치 있게 풍자한’ 그림으로 이해되고 인기리에 미술 시장과 국제 전시장을 점령해나갔다. 물론 이 모든 수순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예술가, 평론가, 그리고 큐레이터들의 암묵적인 규율에 의해 진행되었다.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대비판]은 확실한 하나의 유행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 전쟁, 권력과 국제 문제, 글로벌 시대의 개인 신분 문제 등을 다루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작품에서는 과거와는 분명 달라진 복잡 미묘한 심리를 느낄 수 있다. 여전히 자신의 감정과 괴로움을 직접 그려 넣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역사와 삶과 기억의 향수-장샤오깡

천정부지의 그림 값으로 중국 미술 시장의 중심에 서 있는 장샤오깡. 그는 탄탄한 실력, 엄격한 자기 관리, 대중적 재치를 고루 갖춘 타고난 세계적 스타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이론가 못지않은 철학적 지식과 논리적 분석력을 지닌 그는 30대 중반부터 자신의 작업 시기 분류와 회고 정리를 시작한 실력파 화가다. 쓰촨미술학원 4학년 때 이미 고집스럽고 주관이 뚜렷한 ‘현대 예술가’가 된 장샤오깡은 혼란한 시기를 거쳐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몽환을 그려낼 즈음 3개월간의 독일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마그리트로부터 중국인에게 속하면서 자신의 마음에도 부합하고, 또 현재에 맞는 새로운 양식을 찾아내는 문제에 힌트를 얻는다. 이렇듯 중국적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귀국 후 새로운 작업 방향을 결정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며 이후 [대가족] 시리즈라는 결과를 낳게 했다. 2000년 말 장샤오깡은 기억에 대한 포커스를 더욱 확장시켜 역사와 개인적인 사연을 간직한 사물들의 아련한 모습을 화면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거의 상처들은 현재의 행복을 더욱 값지고 빛나게 했다. 이제 쉰 살을 넘긴 장샤오깡은 젊은이들에게 반란과 저항의 몫은 돌리고 자신은 마음을 직접 건드리는 서술을 선보이고 있다.

건달의 물음-팡리쥔

‘중국 최고의 당대 예술가’, ‘미국의 반화 정책에 영합해 100여 년 전 서양인들이 그리던 요괴 같은 중국인을 중국인 스스로 그리는 것.’ 팡리쥔을 둘러싼 대한 엇갈린 두 가지 시각이다. 실제로《뉴욕타임스》는 팡리쥔의 그림 속 건달들의 표정을 ‘하품’이 아닌 중국을 구해낼 ‘성난 고함’으로 해석했으니 중국인의 자존심은 적잖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팡리쥔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은 위엔밍위엔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였다. 이곳에서 팡리쥔은 가식과 무지, 반항과 포기, 회의와 자조들을 대머리 건달의 실없는 웃음과 하품으로 표현했다. 그러다 1992년부터 위엔밍위엔이 관광객, 중국 체류 외교관, 외신 기자들의 시선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작업량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팡리쥔은 단연 스포트라이트 대상이 되었다. 해외 전시장에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정도로 성장한 핑리쥔은 이후 [물], [염속] 시리즈를 선보이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의 그림에 대한 논의가 심화될 수록 그의 건달식 유머에 대한 학술적 비판도 함께 진행되었다. 유화가 안정적인 궤도로 접어들자 팡리쥔은 1995년 즈음 다시 판화 매체를 꺼내들었다. 전기톱을 사용한 그의 대형 목판화는 수제 판화에 비해 훨씬 강하고 단호하며 때론 폭력적인 미감까지 드러냈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 팡리쥔은 여전히 사람과 그들의 운명 사이를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의 경험과 깨달음은 또 다른 단계의 승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해탈의 경지마저 엿보게 한다.

웃음 속에 숨겨진 칼-위에민쥔

불손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위엔민쥔은 뜻밖에도 ‘양호한’ 군인 가정 출신이다. ‘황슈아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학교가 수업 정지 상태일 때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한 전통 채색화가 그와 그림과의 첫 인연이었다. 허베이사범대학에 입학해 ’85신사조 운동에 동참한 위에민쥔은 졸업 후 전업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고위엔밍위엔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속 감정들을 어떻게 끄집어낼지 또 다른 고민에 휩싸였고 그러다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모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조롱과 비판을 공유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불손한’ 모습이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그의 생각과 목표는 점차 분명해졌고 그림 속 인물들도 완전히 자신으로 대체되었다. 사회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자아를 표현하고 싶었던 위에민쥔은 광적인 웃음을 통해 사고를 거부하는 바보건달을 그리는가하면 미술사에 익숙한 장면들을 꺼내 바보건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시각과 심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우상과 영웅을 부정하고 싶었던 위에민쥔은 인물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눈을 돌렸고, 방향성 없는 공간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과 중국의 현실을 표현한 [찾기] [미궁] 시리즈를 시작했다. 게임을 즐기는 듯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매는 위에민쥔은 또 다른 출구를 찾아 또 다른 길을 떠날 것이다.

마음속 이야기-정판즐

소박함을 추구하는 중국인들에게 정판즐은 독특한 부류다. 스타일리쉬한 외모와 신사다운 매너를 지닌 그는 단연 중국에서 보기 드문 화이트칼라 예술가다. 지극히 성실한 가장이자 진지하고 부지런한 예술가인 정판즐은 소학교 시절 담임 선생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너무 잘난 척한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정판즐의 인생에 있어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버렸다. 이웃집 형의 목판화식 초상화로 그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그는 후베이미술학원에 입학했다. 졸업 작품에서 뒤피의 선과 쿠닝의 터치를 중심으로 표현주의적 방식을 집중 연구한 정판즐은 이미 프로 무대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후 [고기], [가면], [나?우리], [선묘] 시리즈를 선보이며 늘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어릴 시절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경험한 그였기에 모순적이고 처참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냉정한 방관자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던 그는 진정 그림에서도 정치를 외면했다. 대신 자신과 사람 등의 심리에 집중해 마음속 진솔한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매혹적인 고통-펑정지에

쓰촨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펑정지에는 회화과가 아닌 미술사범학과를 졸업한 작가다. 1990년대 초 졸업반이었던 펑정지에는 폭발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중국 사회가 문자 중심에서 이미지 위주 시대로 옮겨가고 있음을 간파했다. 또한 사회는 엘리트들의 고루한 식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펑정지에의 [피부의 서술] 시리즈는 대중문화를 연상시키는 스타브로마이드, 도시 야경, 꽃, 연화 같은 부수적 이미지를 함께 등장시켰다. 이후 [낭만 여정] 시리즈에서는 상업화의 물결로 별다른 생각 없이 획일적이고 허무한 유행을 쫓는 신혼부부들을 화폭에 담았고, 사이버, 카툰, 미래, 중성적인 이미지를 담은 과도기적인 [쿨] 시리즈를 선보였다. 상업 시대가 점점 번성하자 중국인들은 과거의 번영기를 떠올렸고 전통 민화였던 연화 역시 월분패 형식을 새 옷을 갈아입었다. 펑정지에는 이러한 월분패 표현 형식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반영한 [접련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쿨하고 세련된 대중문화의 트랜드에 맞춰 펑정지에의 그림은 한층 성숙된 스타일을 선보이게 되었다. [초상] 시리즈의 미녀들은 날이 갈수록 아름답고 섹시해졌다. 이 매혹적인 고통은 향락적 대중문화의 정확한 모습이었다. 설치 작업에서 다시 붓을 들고 우리 앞에 선 그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염속 예술의 향연을 선사하고 있다.

영원한/ 달콤함-손국연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손두환의 손녀 손국연. 하지만 그녀는 ‘쑨궈쥐엔’으로 통한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알아듣고, 보통 중국인과는 다르게 차가운 냉면을 즐기긴 하지만 그녀는 중국 현대 미술계의 대표적인 여류 화가임에 틀림없다. 손국연과 예술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대학 시절 한 젊은 화가와 만나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은 그녀에게 그림을 안겨 주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했지만 그녀는《신구상전》등 여러 전시 경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1995년 중국 미술계에 또 다른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 사회에 등장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와 함께 출현한 여성 미술 운동이었다. 이런 움직임에 부응하듯 손국연은 1995년《여성 방식》전에서 여성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오랜 쿤밍 생활을 끝내고 베이징으로 이주한 손국연은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첫 그림을 그리던 때처럼 꽃을 마주했다. 하지만 꽃은 그 전형적인 색상과 질감, 형태, 상징적 의미 때문에 다른 여성 화가들도 즐기는 소재였던 터라 좀더 확실한 자신만의 표현을 위해 꽃 옆의 잎으로 시선을 옮겼다. 2000년에는 설탕을 가지고 설치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중년으로 접어든 자신의 몸을 기록하는 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한편으로 그녀의 가족사를 연구하며 그에 관한 작업을 준비하며 여전히 여성의 달콤한 환상을 표현할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다.

부록-시대배경

마오쩌둥 시대(1949-1976): 신중국 성립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중국 정치와 사회상을 살펴보고 마오쩌둥 시대의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개혁 개방 시대(1976-1989): 이 시기에 나타나는 다양한 미술 사조 및 그룹(상흔?향토미술, 싱싱화회, ’85신사조 미술) 등의 활동과 성격 등을 소개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1989-현재): 텐안먼 사건과 경제 개방의 사회적 상황 설명을 시작으로 위엔밍위엔 현상과 후’89미술, 염속 예술, 여성 미술의 특징 및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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