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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말하는 작가
아래 글에는 진실도 있다. 일곱 살 무렵에 거북이를 키웠다. 거북이를 좋아했던 나는 해양 생물학자가 되고자 했다. 열 살까지 야망은 이어졌고, 그해 1년 동안 심해를 들여다보았다. 열한 살 때는 닌자의 비밀을 가르쳐줄 스승을 갈망했지만 나타나지 않았으니, 내가 제자가 될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10대로 접어들면서 나는 프로 하키 선수가 되려고 했다. 나는 동네 하키 경기장 관리인에게 애프터쉐이브 로션을 뇌물로 건넸으며 덕분에 그가 퇴근할 때까지 얼음 위에서 혼자 운동을 했다. 몸 바쳐 연습했지만 소도시의 빙상을 벗어나 큰 경기로 진출할 정도의 기술은 닦지 못했다. 꿈이 깨진 열여섯 살부터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어즈'의 가사를 바꾸면서 “뚫고 지나가라”를 “죽도록 살아라”로 개사해 냈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숲에 이른 병사도/ 한 발을 맞아/ 결국 울게 되지/ 우리 모두 죽도록 살아야 하네." 글쓰기가 나의 미래임이 분명했다. 나만의 목소리가 아직 없던 나는 남의 시를 턱없이 남용한 시들을 쓴 후에는 희곡을 몇 편 썼으나 그 역시 제대로가 아니었다. 후로 단편 소설 몇 편을 생산했지만 더 단편이었으면 좋았을 단편이었다. 다음은 영화 대본이었는데 ○○○조차 영화로 만들 의사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여정 가운데 나는 그럭저럭 영문학 학위를 땄다. 이상한 건 나 자신은 심장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겁도 없이 밴쿠버 영화 학교에 입성했지만 영화 공부를 하려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대신 새로운 매체를 배웠다. 당시 부상하던 인터넷이라는 녀석을 수업에서 다뤘기 때문이다. 더불어 디지털 방식으로 비디오와 오디오를 편집하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보여 줄 만한 작업이라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을 장송곡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일평생에는 훨씬 못 미치는 기간, 직업이라는 것을 가졌지만 서른 살 생일이 다가오자 한 번도 외국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깨닫고 일본으로 이사했다. 일본을 좋아하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1년은 버티자고 맹세했다. 한 해를 버틴 후에 다시 한 해를 보냈고, 또 한 해가, 또 한 해가, 그리고 또 한 해가 갔다. 처음에는 임시 영어 강사로 일했다. 첫 두 해는 여행 삼아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를 훑어 내려가면서 열다섯 도시에서 살았다. 한 나라를 알아 나가기에는 대단히 좋은 기회였지만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건 힘들었다. 나는 직장을 구했다. 도쿄의 어느 사무실에서 일본 학생들을 위한 인터넷 영어 교재를 쓰는 일이었다. 대도시에서 3년을 살았고 그곳을 사랑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글쓰기가 낙이었다. 토막 난 시와 단편소설, 희곡, 영화 대본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만들어 낼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편소설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었다. 『가고일』을 다른 책 몇 권(『장미의 이름』, 『영국인 환자』, 『바람의 그림자』)과 비교하는 글들을 봤지만, 그 책들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사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며 그 작품들은 읽어야 한다.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할 만한 소설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친숙해져야 한다. 인터뷰할 때 더 지적으로 보일 것이다.) 『가고일』을 쓰는 것이 좋았고, 다른 장편소설을 또 쓸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새로운 인물과 구성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내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