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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지휘대의 젊은 황제,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 취임 첫 앨범.

디스크

Mahler : Symphony No.5 in c sharp minor

  • 01 Ⅰ. Trauermarsch (In Gemessenem Schrittstreng-Wie Ein Kondukt)
  • 02 Ⅱ. Sturmisch Bewegt, Mit Grobter Vehemenz
  • 03 Ⅲ. Scherzo
  • 04 Ⅳ. Adagietto
  • 05 Ⅴ. Rondo - Finale (Allegro)

아티스트 소개 3

작곡Gustav Mah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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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중 3곡은 역대 최고의 교향곡 10위 안에 올랐다.

보헤미아(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에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직을 연이어 맡아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됐다. 빈에서 10년 동안, 감독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는 반유대 언론의 적대와 비판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공연 수준의 기준에 대한 고집은 특히 바그너,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후반기에는 잠시 동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았다.

말러의 삶의 대부분은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다. 그가 빈에서 학생이었을 때 작곡한 피아노 사중주곡과 같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러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 관현악단, 교향악 합창단, 그리고 오페라의 솔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초연 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예외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 〈부활〉, 3번째 교향곡, 1910년 그의 8 번째 교향곡은 성공적이였다. 말러의 음악 후계자들 중에는 제2 비엔나 학교의 작곡가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또한 말러에게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는 작곡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설립되었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교향곡과 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교향곡과 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말러는 베토벤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10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관현악단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출생에 관하여 말러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높은 지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서는 빈의 비평가의 평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말러 교향곡 작품이 빈에서 호평을 받게 된 것은 만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말러 자작 연주에 대해서 빈의 저널리즘 등에서 "자작의 선전에 열중하고만 있다"와 중상하는 것도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11곡 중 7곡(1번을 현재 판에서 생각하면 8곡)이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이미 외국이 되고 있던 독일에서 초연되고 있다. 말러에게 "아웃사이더(부외자)"로서 의식은 평생 사라지지 못했고, 가장 만년에는 뉴욕에서 독일인 기자가 "무슨 사람" 물어 그 언론인의 기대되는 답인 "독일인"와는 전혀 다르게"나는 보헤미안입니다(Ich bin einBohme.)"이라고 답했다. 흑맥주를 좋아했으나 본인은 그렇게 술에 강하지 않았다.

성격은 불같이 화를 잘냈고 완벽주의에 괴팍했다. 무자비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로서 말러는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양보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고 일방적인 대화에 자주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조울증, 정신강박증도 있어서 어떨 때는 기분이 업다운되기까지도 했다. 지휘자로서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무자비한 완벽주의, 자기중심적, 고압적, 신경질적인 성격이 따랐고 지휘대의 독재자라고 불렀다.

말러는 자신과 같은 계의 음악가이자 제자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발터는 말러에 심취하고, 음악적인 면만 아니라 친구처럼 말러를 적극적으로 보좌했다. 클렘페러는 말러의 추천에 의해 지휘자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일에 대해서 훗날까지 말러에 감사했다. 그 외, 빌럼 멩엘베르흐와 오스카 프리트와 같은 당시의 일류 지휘자도 말러와 교류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멩엘베르흐는 말러로부터 "내 작품을 마음놓고 맡길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인간은 따로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멩엘베르흐는 말러의 사후, 남겨진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20년 5월 6일부터 21일까지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한편 말러는 완고한 성격과 완벽주의로 인해 주위의 반발을 산 적도 많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말러의 고압적인 태도(리허설에서 참다못한 때에 바닥을 발로 구르고 음정이 나쁜 단원들과 아인 자츠가 갖추어지지 않을 때 지휘봉으로 지적하는 것 등)를 싫어했다. 당시의 반유대주의의 융성과 함께 말러에 대한 태도는 점점 굳어졌고, 어느 날,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 명이 "말러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한스 리히터도 심하지만요."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이 "그렇구나. 하지만 리히터도 한통속이다"고 말했다. 당시 빈의 음악 저널리즘에서도 반유대주의에 입각한 부당한 공격을 받았으며, 이들은 말러가 유럽에서 활동을 그만 두게 된 큰 요인이 되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은 1902년 2월 알마 앞 서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것을 언급한 때에 등장하고 있다.

“그(슈트라우스)의 시대는 끝나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까지 내가 그대 곁에서 살아 있었으면 좋지만! 하지만 너는 나의 빛이여! 너는 분명 살아 그날을 찾는다!”

말러는 당시 악단의 정점에 오른 최고의 지휘자였다. 음악성 이상으로 철저한 완벽주의, 완급 자재인 속도 변화, 극심한 몸짓과 소절선에 얽매이지 않은 초서적인 지휘법은 체험화할 만큼 강한 충격을 당시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캐리어쳐인 "초현대적인 지휘자"(Ein hypermoderner Dirigent)에는 1901년 빈 초기 시절 심한 운동을 동반한 말러 지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그 지휘 솜씨는 점차 평온한 것이어서, 만년에 의사는 심장 질환을 선고 받고는 "거의 불길에서 조용한 그림 같았다"(발터의 증언)과 다른 것이었다.

말러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벌써부터 나오고 있으며 1890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상연된 돈 조반니를 들은 브람스는 "진짜 돈 조반니를 듣기 위해서는 부다페스트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말러는 연주되는 곡에 대해서 악보를 수정, 편곡하는 경우가 많았고 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말러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떠난 후 수정이 들어간 이들 악보를 보고 "말러 놈, 수치를 알라!(Shame on a man like Mahler!)"과 분개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슈만의 교향곡 2번, 교향곡 3번의 연주에서는 토스카니니는 말러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변경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지휘에 대해서 말러의 말이 몇가지 남아 있다.

"모든 음의 길이가 정확히 나오면 그 템포가 바르다."
"음이 전후 서로 겹치고 프레이즈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그 템포가 너무 빠르다"
"식별할 수 있는 극한의 곳이 프레스토의 올바른 템포이다.그것을 넘으면 더 이상 무의미하다"
"청중이 아다지오에 따라오지 못할 때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루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많은 개혁을 실행하고, 그것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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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Simon R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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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래틀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 임
영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나 왕립음악원(RAM)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본머스 관현악단과 왕립 리버풀 필하모니 관현악단 부지휘자를 거쳐, 1980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래틀은 버밍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 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 임기를 시작하였으며, 2010년 투표를 통해 임기가 2018년까지 연장되었다. 현재 베를린 필 에서의 성공적인 임기를 마치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로 활동 중이다. 2023년부터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임기를 마치고, 그 직후 5년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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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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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Gustav Mahler 1860-1911

Berliner Phiharmoniker
conductor : Sir Simon Rattlle

* Live Recording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매일
2002년 10월 01일
시간/무게/크기
101g | 크기확인중

제작사 리뷰

말러 : 교향곡 제 5번
말러의 창작 능력은 실로 놀랍다. 어떤 교향곡도 유사하지 않으며 게다가 그 많은 교향곡('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를 포함한 이야기이다)의 오십 개 악장 가운데 어느 하나도 동일한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보수적으로 출발하여 점점 모험적으로 변모해가는 다른 대부분의 작곡가와 달리 말러는 그의 다섯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비로소 전통적인 교향곡 작곡가의 면모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하였을 뿐이다(만약 장송 행진곡으로 시작하고 작은 규모의 호른 협주곡을 포함하는 작품이 '전통적'이라 불리울 수 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그가 단지 처음의 네 곡의 교향곡만을 작곡했다면 말러는 교향곡 작곡가로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으리라. 특히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주로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교향곡은 다섯 악장으로 이루어진 교향시이며 연작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교향곡의 첫 번째 악장은 다른 교향시인 '장례의식(Totenfeier)'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 작품은 단지 거대한 인성과 합창이 포함된 교향곡으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일 뿐이다. 거대한 세 번째 교향곡과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네 번째 교향곡은 처음부터 서로 뒤섞이었다. 네 번째 교향곡의 인성이 포함된 마지막 악장은 당초에는 세 번째 교향곡의 일곱 번째와 마지막 악장으로 구상되었다. 아울러 네 번째 교향곡에 대한 계획에는 다섯 번째 교향곡의 스케르초 악장으로 준비되려 했듯이 보이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교향곡의 포문을 여는 트럼펫의 개시부가 네 번째 교향곡의 첫 번째 악장에 포함되리라 예상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교향곡은 현저히 이전의 작품과 다르다. 비록 네 번째 교향곡이 평론가로부터 자주 '고전적'이라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의 성격과 특히 마지막 악장(말러의 초기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친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모음집에서 뽑아낸 시어로 꾸며져 있다)은 고전적인 전형과는 먼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다섯 번째 교향곡은 순수한 기악 작품이며 전통적인 교향곡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이 다섯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처음의 두 악장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가 작곡을 시작할 즈음 말러는 이 작품이 네 악장으로 구성된 적절한 교향곡이 되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은 론도인데 이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방식과 유사하다. 작곡을 하던 상황도 이전의 작품과 구별되도록 하였다.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넓히려는 그의 야심은 항상 작곡 활동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활동 없이 그가 살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 분명함에도 그는 종종 지휘 요청에 대해 좋지 않게 이야기하곤 했다. 1897년 비엔나 오페라의 지휘자로 선임되는 영광을 안게 됨에 따라 작곡 활동은 잠시동안 한 구석으로 자리를 비키게 되었다. 따라서 네 번째 교향곡은 작곡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1901년부터 계속 그는 작업의 정규적인 패턴을 수립할 수 있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작곡을 하였고 나머지 기간 동안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을 때 악보를 검토하였다.
말러는 그의 다섯 번째 교향곡을 1901년과 1902년 여름에 새로이 여름 휴양 목적으로 보르터제(Worthersee)의 마이에르니히(Maiernigg)에 구입한 별장에서 작곡하였다. 1902년 3월 그는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와 결혼하였으며 가정생활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초기 시절은 행복하였으며 교향곡의 나머지 절반 부분은 이것을 반영하고 있다.(말러의 교향곡은 흔히 그의 자서전적인 견지에서 취급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 옳지는 않다. '비극적'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여섯 번째 교향곡과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는 말러의 인생에 어려움이 별로 없었으며 그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던 그 뒤 이년 동안의 여름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교향곡의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악장은 극적인 시나리오를 구축하고 있으며 나머지 세 악장은 이들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데릭 쿠크(Deryck Cooke)는 반분된 이들 사이의 부조화를 '거의 정신분열적'이라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두 개의 장송 행진 주제의 포문을 여는 트럼펫의 팡파르는 처음에 현악기의 절규로 이어지며 그 뒤 목관악기의 대비를 볼 수 있다. 행진곡은 전통적으로 '트리오' 부분을 가지지만 여기에서 트리오의 역할은 격심하고도 강력한 절규이다. 행진곡과 트리오는 어두운 모습으로 반복되고 힘차게 고조된 트럼펫의 팡파르가 어두움 속에서 악장을 마무리한다.
두 번째 악장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개시부의 저돌적인 잔인함은 사려 깊은 음악에 자리를 비켜주며 이는 첫 번째 악장과 연관되면서 분위기를 반영한다. 두 가지 분위기는 낙관적인 분위기로 급작스럽게 변모하여 재빨리 일소되기 전까지 나란히 유지된다. 그러나 마치기 전 반복하며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한 합창은 사라지기 전까지 짧은 영광의 순간을 가지다가 이 악장은 역시 음영 속에서 끝을 맺는다.
스케르초 악장은 이 같은 드라마의 어떤 장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하다. 그 분위기는 생생하고 열광적이다. 오케스트라의 호른 수석에게 중요한 역할이 지워지는데 말러는 이를 'corno obbligato'라 불렀다. 이 악장은 큰 규모의 랜틀러(Landler) - 왈츠와 유사한 오스트리아 지방의 춤곡 - 이고 깊은 생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리 편치 않은 순간도 있지만 음악의 효과는 유쾌하다 .
잘 알려진 현악과 하프를 위한 아다지에토는 한편으로 대체로 객관적인 작품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간주곡이자 내면적이며 개인적인 에피소드이다. 알마 말러는 그것이 자신을 위해 작곡된 사랑의 노래라고 주장했지만 만약 정열적인 부분이 제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러의 위대한 가곡 작품인 뤼케르트가 정립한 '나는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분위기는 일종의 자아 성찰이다.
아다지에토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지만 호른의 울림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마지막 악장에는 당나귀가 꾀꼬리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고 평가 받을 정도로 불합리한 내용인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집의 흔적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떠들썩한 악장에는 일말의 심각함도 엿보이지 않는데 이 곳에서는 심지어 아다지에토의 주요 주제로부터 춤곡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떠들썩하고 분주한 움직임이 결국 두 번째 악장의 합창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이 시점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어떤 어두운 그림자라도 쫓아 버린다.

--- 콜린 매튜스(Colin Matthews), 金俊亨(音盤評論家)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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