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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들 영감 마른 명태 자시듯>이란 말이 또 질마재 마을에 있는데요. 참, 용해요. 그 딴딴히 마른 뼈다귀가 억센 명태를 어떻게 그렇게는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쬐끔도 안 남기고 목구멍 속으로 모조리 다 우물거려 넘기시는지, 우아랫니 하나도 없는 여든 살짜리 늙은 할아버지가 정말 참 용해요.
- 서정주 「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중에서 「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는 미당의 작품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 영감을 시에 초청한 이유를 이 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도 아마 이 하늘 밑에서는 거의 없는 일일 테니 불가불 할 수 없이 신화의 일종이겠습죠?" 특히 저는 '불가불'이란 말과 '일종이겠습죠?'라는 은근히 묻는 농조의 말이 좋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웃게 됩니다. 그의 화법에는 이러한 해학성이 있습니다. '명태'하면 제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선친이 속초 북쪽에서 1960년대에 명태 덕장을 크게 하였습니다. 명태도 건태, 생태, 황태, 낚시태 혹은 조태, 망선태, 소태, 중태, 대태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제 기억으론 설악산 날씨가 춥고 풀리기가 반복될수록 명태 값은 올랐습니다. 소와 명태는 비슷합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것이 명태입니다. 창란, 명란, 아가미 등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 명태 덕장이 바람에 삐걱삐걱 흔들리는 것을 찬찬히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지에 앉아 있는 제 몸도 좌우로 계속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덕장에서 한 세월이 그렇게 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또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명태들이 사라지는 이월쯤이면 마음이 허전해졌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없는 사진리 북쪽 바다가 쓸쓸해집니다. --- pp. 2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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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시선집『사랑의 무기』에 실려 있는「노래」는 그의 빛나는 대표작입니다. 지난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 한 편을 고르라면 저는 서슴없이 이 「노래」를 꼽겠습니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정도로 강렬한 추억이 각인된 시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광주에 있는 그의 시비에 새겨져 있는「노래」는 우리 시의 한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론가 김사인은 그를 일컬어 '스스로를 소신공양한 시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저 험난한 1980년대를 버텨 세운 것입니다. 언젠가 문예지 편집진 연수차 정월 즈음에 남쪽을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대 강만길 교수가 조계산 선운사에서 김남주에게 건넨 말이 기억납니다. "1월의 아침,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 숲을 내다보며 당신에게 역사학자로서 말하는 것인데"하더니 이어서 "당신의 시는 남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장 가파르고 처절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 앞에서 늘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질지 모르지만, 1980년대는 저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면이 많습니다. 너무나 강고한 폭악의 시대였거든요. (……) 저는 그의 짧은 단시 「별」을 기억합니다. 그의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에 실려 있는 작품입니다. 가장 괴로울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별이 되어 어머니 어머니라 부른다 그는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향과 하늘의 별과 친구들과 그리고 자신의 시를 남기고……. 하지만 김남주는 이 노래 한 편으로 우리 시사에 우뚝 선 시인이 되었습니다. 이육사의 절정과 윤동주의 고결을 훌쩍 넘어 이 땅에 피어난 자유 시인 김남주의 꿈과 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높고 깊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pp. 107∼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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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전문 80년대 후반 어느 가을 오후, 기형도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무렵 제가 발표한 시를 보았다고 하면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지며 그는 추워했습니다. 언제나 그는 추워보였습니다. 문학 담당기자였지만, 늘 시인으로 나타난 그는 조금 우울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남에게는 그 우울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형도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창작과비평사 아래층에 있는 아몬드치킨이라는 술집에 내려가 맥주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맥주를 단 한 잔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신문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키가 컸고 아주 검은 머리칼에 눈이 참 깊었습니다. 저는 그가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늘 한쪽에 '우울'을 데리고 앉아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언제나 웃고 있었지요. 술자리에서도 늘 한구석에 깊이 들어앉아 우리들 전체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의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때 이미 시인은 죽어 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을 잊은 채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는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 저는 지금도 신문사에서 전화로 "형, 저 조금 있다 거기 도착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뒤 30분쯤 지나, 마포구 용강동 인도 위를 낙엽을 차며 걸어오던 쌀쌀한 늦가을의 기형도가 보일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가 돌아서던 굽은 길에는 농협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지루하게 말입니다. 삶이란 그렇게 지루한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지루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 pp. 5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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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이 "촛불 앞에 단정히 앉은 밤 11시쯤의 시인"이라고 평한 고형렬.
그가 자신이 입에 달고 중얼거리고 마음속에 걸어 두었던 명시들을 독자들에게 읽어준다. 시를, 시 읽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고형렬은 무엇을 들려주려는 것일까? '시 읽어주는 시인' 고형렬은 1979년 등단 후 아홉 권의 시집을 발표한 중견시인이다. 그리고 현재 창작과비평사의 시선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며 재능 있고 참신한 젊은 시인들을 발굴하여 격려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계간지 『시평』의 주간으로서 국내 시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인들의 문제작을 시인들이 직접 선정하여 평하는 장을 만들고 있다. 이렇듯 삶에서 시를 떼어낼 수 없고, 삶 속에서 시를 만드는 고형렬이 시의 계보나 교과서 안에서만 존재하는 시가 아니라 자신의 추억이 담겨 있는 시, 세월이 변해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감동을 주는, 삶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시들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명시를 해석하고 시인을 소개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만나 부대끼고 발견한 시인들의 모습, 시어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단지 언어의 아름다움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고 지나간 시간을 추억할 수 있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형렬이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명시'보다는 '인생'에 방점이 찍히는 에세이다. 그의 손에 선택된 50여 편의 시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 시인도 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발견하지 못했던 시와 시인들도 있다. 즉 이 책은 우리나라 고대의 <정읍사>부터 조선시대의 정약용·서산대사, 우리 현대시사의 첫걸음을 떼게 한 김소월·한용운, 한동안 월북시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곁에 두지 않았던 이용악, 박팔양, 백석 그리고 현재의 고은의 시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당대의 백거이, 타이완의 루어칭, 일본의 사이조오 야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까지, 시공간을 초월해 선택된 다양한 시편들이 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넓은 스펙트럼의 명시 이야기> 고형렬은 달밤에 한 백제 여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돈벌러 대처로 나간 남편을 걱정하는 시 <정읍사>를 먼지 앉은 고전문학 책에 묻혀 있는 시가 아니라 삶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우리시의 전통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학자, 『목민심서』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정약용이 갓난아이에게까지 세금을 물리자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남근을 잘라 관가에 가 문전박대당했다는 비통한 이야기를 듣고 지은 시 <애절양(哀絶陽)>를 찾아 읽어준다. 정약용에게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가공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린 시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서 활약이 컸던 서산대사의 깨달음의 시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또한 우리에게 숨겨진 명시 발견의 기쁨을 준다. 시는 우리 것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억울한 죄명으로 강주사마로 좌천된 백거이가 장한에서 밀려난 어느 퇴기의 비파 연주를 듣고 화답으로 지은 시 <비파행>을 읽노라면 늙고 힘없어진 한 인간의 고백을 듣는 것처럼 인생의 헛됨과 슬픔이 가슴 깊이 전해진다. 타이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처음 소개한 중견시인 루어칭의 <수박을 먹는 여섯 가지 방법>은 수박 방법이 거꾸로 배열되어 있는 등 독특한 유머와 실제로 수박을 먹는 느낌을 주는, 아이들의 장난기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시편이다. 1910년대 후반 일본의 유명한 동시 <카나리아>는 다소 충격적인 작품인데,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때리거나 묻어버리면 다시 노래 부를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나리아를 어느 날부터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시인인 자신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해도, 이 시가 가진 잔인함과 반생명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에서는 제 몸보다 큰 날개를 가진 새가 하늘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지만 땅에서는 날개 때문에 잘 걷지 못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에서 시인의 실체를 발견했다. 자유와 사람들이 사는 대도시에서 유배된 존재론적 불행을 동시에 갖고 있는 시인 말이다. 이처럼 저자는 눈을 크게 뜨고 명시를 찾아내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고형렬이 추억하는 시인들> "형렬아, 나 이쪽 가슴 아래께가 아퍼야." 김남주는 저에게 그 아픔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곧 웃어버렸습니다. 아주 심한 통증은 아닌데 하면서 말입니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가 시에 얽힌 저자의 개인적인 추억, 그리고 시인들과 함께한 저자의 아름다운 기억을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작고 시인(고은, 박노해, 배창환 제외)이라 더 애틋하다. 고형렬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시던 『현대문학』지에서 읽은 김광섭의 <장미>라는 시를 통해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 살던 자신의 유년시절과 문학에 심취해 있던 아버지, 그리고 가끔 철학책을 읽던 하숙생 아저씨를 기억한다. 또한 서정주의 <눈들 영감의 마른 명태>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명태덕장을 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시를 통해 아직도 우리에게 복받치는 용기를 주고 있는 김남주는 오랜 투옥생활을 마친 후 고형렬을 찾아와 가슴 아래께가 아프다고 말한다. 예의 그 웃음을 보이면서. 얼마 후 발견된 암덩어리로 시인은 결국 세상을 떠났고, 고형렬은 척박한 이 나라의 불행과 함께했던 우리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시인이었던 김남주 같은 시인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길 바란다. 또한 특유의 감수성으로 젊은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요절 시인. 용강동 인도를 쓸쓸히 걸어오던 청년, 늘 '우울'을 한쪽 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은 언제나 웃고 있던 시인 기형도. 그는 세월을 잊은 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밖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만 세월에 지치고 늙어가며 잊혀질 뿐이다. 혼자였지만 항상 밝고 강하고 깨끗했던, 고형렬에겐 '해남 누님' 같은 시인 고정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단정한 시 한 편을 쓰고 지리산에 올랐다가 실족했다. 유품 정리를 하다 발견된 그녀의 마지막 시 <독신자>를 읽으면 저만치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무겁게 살지 말라고, 가벼워야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 천상병은 고형렬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른 뒤 지상의 삶이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지 현재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어떻게 살면 시인처럼 담담히 그러겠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