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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uel de Unam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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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불행한 여자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지도 않는 건가? 오랜 세월을 고되게 일하며 보낸 흔적이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것을 정녕 보지 못하는 걸까? 이 마을 사람들은 모든 것을 미약과 질투 탓으로만 돌리는구나……. 일이 잘 안 풀리면…… 그저 질투 탓을 하지…….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건 질투 탓이라 하지. 자기 불행을 다른 이들의 질투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야말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야. 허나 우리는 모두 그렇지 않나? 혹시 나도 무슨 약을 마신 것이 아닐까?’ ―본문 61p 중에서
“좋은 운을 타고나고 날 때부터 인기를 독차지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 아무런 노력 없이 거저 얻은 혜택과 특권을 감추지 않은 잘못이 있어. 그것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잘못이 있어. 이 은총을 과시하는 대신 감추지 않은 잘못이 있다구. 아벨은 카인 앞에서 자신이 입은 은총을 보란 듯이 뽐내고 신께 바쳤던 제물에서 피어오른 연기로 카인을 모욕했을 게 틀림없어. 스스로 올바르고 공정한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허식 아래서 다른 사람들을 서슴없이 짓밟는 거만한 자들이야.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어. ‘고결한’ 자들보다 더 천한 부류도 없다…….” --- p.77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살아야 하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카인이 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그랬다면 인류를 위한 가장 고귀한 시작이 되었을 텐데. 아담과 하와는 저주 받은 땅으로 쫓겨났을 때 그리고 두 아이를 낳기 전에 왜 자살하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여호와는 또 다른 카인과 아벨을 창조하셨겠지? 다른 세계에서도, 수많은 별 어딘가에 있는 다른 세계에서도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비극은 다른 어딘가에서 재연되었을지 모른다. 지구상에서 초연으로는 족하지 않았으므로. 그렇다면 그 비극은 최초의 상연이었던 걸까? --- p.80 “아들을 질투하다니요……! 아버지가요?” “그렇다. 그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질투지. 질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생기지 않는단다. 다른 나라에 살거나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을 질투하지는 않아. 이방인이나 외국인을 질투하지는 않지. 오로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을 질투하게 된단다. 세대가 다른 사람보다 같은 세대인 사람을 질투하게 마련이지.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질투는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단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잖니…….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끔찍한 질투는 자기 형제가 제 아내를 탐한다고 의심할 때 생겨난단다……. 그리고 부자지간에도…….” --- p.203 “나는 왜 그토록 질투를 했을까? 왜 그토록 사악했을까? 왜 그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까? 어머니 젖을 잘못 먹었나? 어머니 젖에 무슨 미약이라도, 증오의 약이라도 탄 걸까? 내 피에 독이라도 섞였던 걸까? 나는 왜 이 증오의 세상에 태어났을까?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미워해라’라고 가르치는 듯한 이 세상에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증오하며 살았어. 여기 사는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증오하며 살지. 허나…… 아이를 데려오렴.” --- p.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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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카인은 누구이고 아벨은 누구인가!
『아벨 산체스』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재탄생시킨 소설이다. 우나무노는 인류 최초의 형제이자, 인류 최초의 살인에 대한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카인과 아벨을 작품 소재로 삼아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은 질투와 증오의 문제를 과감히 파헤친다.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끝내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이 소설은 심도 있게 보여준다. 우나무노는 주인공들 간의 극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루기보다는 일생을 통하여 인간 심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탐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심리소설이자 정신분석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호아킨 모네그노’이다. 호아킨은 자신의 오랜 친구, 곧 태어나면서부터 친구였으며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아벨 산체스’에게 끊임없이 질투와 증오를 느끼며 한평생 스스로 괴롭히며 살아간다. 이 질투와 증오의 속사정은 우선 두 주인공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 차이에서 연유한다. 아벨은 밝고 유쾌한 성격에 예술가적 기질을 지녔으며 호아킨은 무겁고 진지한 성격에 외골수 학자적 기질을 타고났다.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벨은 늘 인기를 독차지했고 호아킨은 왕따를 당했다. 시쳇말로 아벨은 호감형이었고 호아킨은 비호감 인물이었다. 이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호아킨이 그가 사랑하는 여자인 헬레나를 아벨한테 빼앗기고 나서부터였다. 사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헬레나는 호아킨을 연애 상대로 마음 내키지 않아 했고 아벨을 좋아해서 일이 그렇게 된 것이지만, 호아킨은 다만 자기를 모욕하고 멸시하기 위해서 그 둘이 결혼한 거라고 믿는다. 이후로 호아킨은 아벨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며 하루하루 삶의 지옥 속에서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 성공한 아벨의 명성이 드높아질수록 더더욱 그 질시의 무게 또한 호아킨을 짓누른다. 우나무노가 현대판 카인이라 할 수 있는 호아킨 모네그로 대신에 아벨 산체스를 이 소설의 제목으로 내세운 점은 역설적이기도 하고 상징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삼인칭 시점과 일인칭 시점을 오가는 서술 기법을 통하여 화자인 호아킨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삼인칭 시점으로 볼 때, 아벨은 호아킨의 의식 속에 하나의 대상으로서 등장하여 말하며 행동한다. 그때에만 비로소 소설 속에서 살아있는 인격을 부여받는다. 한편, 일인칭 시점에선 호아킨은「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고뇌를 직접 토로한다. 회고록 형식의 이「고백」을 읽는 독자는 사뭇 무거운 불안을 느끼게 된다. 망상이나 다름없는 질투심에 시달리는 호아킨에게서 치유 받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몹시 괴로워하는 영혼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소설이 허구가 아닌 실화이며 우리 주변에서 결코 드물지 않은 일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소설의 제목이 『아벨 산체스』인 이유는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대립구도를 넘어 과연 누가 진정한 악인이고 누가 진정한 선인인지, 운명에 희생당한 ‘카인’은 누구이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된 ‘아벨’은 누구인지 묻고자 함이 아닐까. 우나무노는 개인에게서 보이는 신경증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국가 안에서 나타나는 신경증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소설에서 풍속이나 장면보다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어떤 시대를 설명하려고 할 때도 그것을 의인화해서 하나의 인물로 설정하여 작품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예를 들면 우나무노의 첫 번째 소설인 『전쟁 속의 평화』는 스페인의 제2차 카를리스트 전쟁 당시의 빌바오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빌바오를 의인화하여 작품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아벨 산체스』도 또한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사회혼란으로 어지러웠던 스페인 국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 공동체 안에서 사분오열하여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국가적인 신경증을 개인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예언적이었는가는 우나무노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이 발표되고 20년이 지나서, 스페인은 약 4년간 극심한 내란을 겪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대전 직전에 일어난 이 내란은 공산주의 및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자 간의 대결이 한 국가 내에서 내전이라는 대리전 형식으로 표출되었던 사건이었다. 그 결과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수백만 명이 스페인을 떠나 망명했다. 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시기와 증오의 사회적인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카인과 아벨은 한 공동체의 대립관계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며 그 비극은 또 다시 펼쳐진다. 여기에 『아벨 산체스』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긴 생명력을 갖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