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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의 열정적인 연주로 듣는 브람스 첼로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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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 : Cello Sonata No.1 In E Minor, Op.38
Brahms : Cello Sonata No.2 In F Major, Op.99
요하네스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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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두개의 첼로 소나타
브람스는 전 생애에 걸쳐 두 곡의 첼로 소나타를 남겼다. 시대의 흐름이나 대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아첨하거나 타협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음악관을 고수해 나갔던 브람스는 바흐와 베토벤으로 집약되는 과거 음악의 전통을 모델로 삼았다. 브람스는 바흐의 음악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파생된 푸가의 기법을 완벽히 구사했으며. 베토벤을 계승한 정교한 형식미와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유기적인 통일성을 잃지 않은 음악적 구성으로 절대 음악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낭만 시대의 자유로운 사고와 모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삶도 음악도 자유로웠지만 언제나 고독했다고 토로했던 브람스의 내면 세계의 표현에 있어 우수에 젖은 듯 풍부한 저음 음색을 지닌 첼로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울림을 담아내는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일하게 첼로 소나타 두 곡을 작곡했고, 베토벤에게 영향 받은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을 제외하고는 첼로 협주곡도 남기지 않았다. 협주곡에 대한 아쉬움은 비단 후대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브람스 역시 인생을 마감하는 노년의 나이에 이러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드보르자크의 열렬한 후견인이었던 브람스는 인생을 마감하는 노년에 드보르자크의 새로운 '첼로 협주곡'을 듣게 된다. 늘 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드보르자크였지만 보헤미안의 민속 선율이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이 작품은 이미 쇠약해진 브람스가 1897년 절친한 첼리스트 하우스만과 더불어 끝까지 연주해볼 정도로 브람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첼로로 이런 작품이 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도 시도했을 것이다"라는 후회섞인 독백을 남긴 이 일화는 작품만큼이나 유명해졌다. 브람스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보석 같은 첼로 협주곡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려함보다는 따스하고 중후함을 추구한 브람스는 바이올린보다는 첼로를, 플루트보다는 클라리넷을 선호했는데, 그가 남긴 두 곡의 첼로 소나타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다. 1865년에 작곡한 첫 번째 '첼로 소나타 E단조'와 그보다 21년이 지난 후에 완성된 '첼로 소나타 2번 F장조'는 외형적인 규모와 구성, 형식은 물론이고 음악이 전달하는 분위기와 내용 면에서도 20여 년에 걸친 브람스 음악 세계의 변화와 발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브람스의 나이 32세 되던 1865년, 함부르크로부터 들려온 어머니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의 사망 소식은 브람스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몰아갔다. 슬픔의 힘을 창작의 세계로 옮겨 부었던 브람스는 사력을 다한 대작인 '독일 레퀴엠'에 착수하면서 그 동안 미뤄왔던 여러 작품도 동시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브람스의 애도와 슬픔이 드리워져 있어 다분히 비가적인 느낌을 준다. 리히텐탈의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 한구석에 허무하고 처연한 정서를 지울 수 없는 '호른 삼중주 E♭장조'와 더불어 브람스는 이 무렵 3년이 넘도록 붙들고 있던 '첼로 소나타'를 완성하게 된다. 첫 번째 첼로 소나타인 'E단조 Op 38'는 비록 후에 작곡된 2번의 위상에 눌려 자주 연주되지는 않지만 30대 초반 브람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깊은 고민과 방황, 고독의 흔적이 엿보이는 수작으로 꼽힌다. 친구인 첼리스트 요제프 겡스바허의 조언을 얻은 이 작품은 알레그로 - 알레그레토 - 알레그로의 3악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브람스가 느린 악장을 일부러 제외한 것은 자신에게도 과감한 시도였다. 느린 악장이 빠져 있지만 1악장 도입부의 명상적이고 우수에 젖은 선율은 한없이 아래로 침전하는 영혼을 이끌며, 악장 전체에 어두우면서도 따사로운 브람스의 선율이 매력적으로 흐른다. 첫 부분부터 등장한 반음 진행의 모티브는 곡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며 E장조에서 딸림조인 B장조 영역으로 옮겨가는 조성 변화의 과정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뉴에트 형식으로 작곡된 2악장 알레그레토는 곡 전체에 활기를 주는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3악장은 바흐의 정신을 이어받은 푸가 기법의 활용이 돋보인다. 피아노와 첼로가 서로 주고 받는 3성 푸가는 진정한 고전주의 음악가로서의 브람스의 진가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준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착수하게 된 두 번째 첼로 소나타는 요하임 사중주단의 첼리스트인 로베르트 하우스만의 요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평소 함께 자주 연주했을 뿐 아니라 음악적인 생각을 나누던 소중한 지우(知友)의 청탁은 첼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 이후에 순수한 관현악을 위한 마지막 곡이자 브람스 관현악법의 최고로 평가 받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이 탄생하게 된다. '첼로 소나타 2번'은 브람스의 새로운 휴양지인 스위스 베른 근처의 툰에서 작곡되었다. 툰 호수와 더불어 자연 경치가 뛰어 났던 이 곳 `초록색의 겉창이 있는 갈색 집'에서 보낸 생활은 브람스에게 큰 만족을 주었다. 브람스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첼로 소나타 2번 F장조, Op. 99'를 비롯해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 100', 그리고 '피아노 삼중주 3번 C단조, Op. 101'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알레그로 비바체 - 아다지오 아페투오소 - 알레그로 파시오나토 - 알레그로 몰토의 전형적인 4악장 구조를 따르고 있는 2번은 앞서 작곡된 1번에 비해 규모 면에서는 물론이고 내용 면에서도 훨씬 광범위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정열적인 힘이 충만하다. 1악장 F장조는 흥분하고 격앙되게 시작하는 제1주제가 강렬하게 제시된 이후 다양한 조성의 변화와 더불어 주제가 다양하게 발전해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모티브를 자유자재로 발전시키는 브람스의 기교가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발전부에서는 브람스의 발전적인 비약이 펼쳐진다. 2악장 아다지오 아페투오소는 F#장조의 가곡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격한 감정의 1악장과는 대조적으로 내면의 음악성이 첼로의 풍부한 저음 음색과 잘 조화를 이루며 부드러운 피치카토는 곡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하고 열정적인 몸짓으로 발전해간다. 첼로와 피아노의 독립적인 위상이 드러나는 대위적인 처리와 자연스러운 멜로디 진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레그로 파시오나토는 F단조로 펼쳐지는데, 전체 악장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면서 아름답고 경쾌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3악장은 베토벤의 스케르초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생동감있는 음들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메차 보체 이후 경쾌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다 종지를 앞두고 처음의 음울한 분위기로의 회귀를 준비하는 듯 마무리된다. 브람스 소나타의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2번의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 몰토 역시 대위법적인 요소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된다. 푸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주제와 부 주제의 제시와 발전 과정은 활발한 분위기 속에 경쾌하게 전개되며, 다양한 조성이 전개되며 시시각각의 변하는 다양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힘찬 화음으로 극적인 종지를 이루며 마지막 한 음까지 깊은 인상을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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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길
1853년 9월 30일, 브람스는 요아힘의 편지 한 장을 들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 부부를 찾아갔다. 슈만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듣고 `베일을 쓴 교향곡'이라며 감탄했다. 곧 슈만은 10년 동안 놓았던 펜을 다시 들었다. '신음악지'에 새 거장의 탄생을 예고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낭만적인 미사여구를 동원해 브람스를 극찬했다. 슈만의 눈에 비친 브람스는 당대 음악계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올 `새로운 길'(Neue Bahn)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11세의 다니엘 리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듣고 난 로스트로포비치는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번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열 다섯이 되어서야 할 수 있던 연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예외로 하는 까닭은 그의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미 다니엘 리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다. 6세에 리처드 아론을 사사하며 첼로를 시작한 다니엘 리는 2년 만에 노스웨스트 챔버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영 아티스트 첼로 콩쿠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문하에 수학하던 시절, 필라델피아 콩쿠르 우승과 노스웨스트 쳄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 등 여러 곳에서 연주 제의가 잇달았지만 스승은 한국에서의 첫 데뷔 무대 이후 공개 연주를 극도로 자제시켰다. 모든 제안을 `3년 뒤'라는 말로 일축해 온 로스트로포비치는 1994년 위그모어 홀에서 열린 런던 데뷔 연주회를 통해 세계 무대에 다니엘 리를 선보였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같은 작품을 완전히 소화하는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조화력, 그리고 테크닉은 각 악구의 표현과 함께 전체를 조망하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스트라드''라는 언론의 극찬과 함께 다니엘 리는 정경화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데카의 전속 아티스트라는 영예로운 계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데카 측은 물론이고 직접 동행해 그의 연주를 지켜본 굴지의 거장 리카르도 샤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 레코딩은 2년 뒤에 하되 매년 전속금을 제공하겠다는 계약 조건은 다니엘 리의 가능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데카와 데뷔 음반을 발매하기 전 이루어진 게오르그 솔티와의 만남은 다니엘 리에게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 역시 18세가 될 때까지 음악에만 전념하라며 18세가 되면 런던 심포니와 협연할 것을 약속했지만 솔티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해 오래지 않아 그 약속은 유언으로 남았다. 현재 뉴 잉글래드 음악원에서 전문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는 다니엘 리에게 새로운 한 해는 더 이상 기다림이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연주를 위해 펼쳐진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미 샤를 뒤트와가 이끄는 몬트리올 심포니를 비롯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캘리포니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의 뉴 퀸스홀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한 다니엘 리는 지난 시즌에는 타이완 내셔널 심포니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함께 연주했으며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국 투어 연주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리버 사이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 등 연간 30회 이상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다니엘 리는 저음역 악기라는 첼로의 특징을 십분 활용한 풍부하고 호소력 있는 소리를 지녔다. 뉴욕 데뷔 무대 이후 '뉴욕 타임즈'는 그의 연주가 `처음부터 매우 독창적이었다. 성숙하고 호소력 있다'라고 평가했다. 다니엘 리가 수많은 거장의 손을 거치면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커티스 음대의 올랜도 콜과 뉴 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폴 캐츠 등 내로라 하는 명교수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도제 식의 엄격한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도 다니엘 리의 음악적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해 낸 두 스승은 연주 뿐 아니라 인간미를 잃지 않게 해 준 다니엘 리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콜 선생은 매우 개방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빛을 발했고, 특별히 섬세하고 박진감 넘치는 리듬 표현에 능하신 분이었죠.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자상하고 멋진 분입니다. 음악적인 것 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도 배울 수 있었지요. 클리블랜드 콰르텟 활동도 함께 했던 폴 캐츠 선생은 스승이자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분들을 통해서 나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더 큰 음악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다니엘 리는 처음에 피아노를 먼저 배웠다. 1991년 워싱턴과 노스웨스트 등 각 지역의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우승하면서 꽤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로도 기대를 모았으나 첼로와 만난 후 미련 없이 진로를 바꿨다. 상대적으로 저음역의 악기를 다루면서도 보기 드물게 뛰어난 절대음감을 가지게 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바이올린 작품이나 성악곡들을 세련되게 편곡할 수 있는 다니엘 리의 특출한 실력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대에 들려주는 앙코르의 대부분은 직접 편곡한 곡들로, 다니엘 리는 앙코르 무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며 청중에게 새로운 묘미를 선사해준다. "작품을 대할 때는 먼저 악보의 모든 음에 담긴 작곡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 한 음이라도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그 다음에는 조각가가 된 기분으로 각각의 프레이즈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구상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나만의 개성과 분위기를 담은 소리로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나 울림에 신경 쓰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에 숨쉬고 있는 음악 본연의 모습에 다가가려고 온 몸으로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연주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 리는 데카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음반으로 브람스를 선택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필두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 엘가의 '사랑의 인사' 등 대중적인 레퍼토리로 다채롭게 선보였던 1998년 첫 음반과는 사뭇 다른 성숙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소신 있는 음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브람스는 음악 본연의 요구에 충실히 반응하는 다니엘 리에게는 더욱 특별한 작곡가로 다가왔으리라. 그는 오래 전부터 이 프로젝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브람스가 남긴 첼로를 위한 레퍼토리가 부족한 데 대한 아쉬움을 소품을 직접 편곡해 연주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던 그에게 이번 음반은 브람스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슈만은 브람스를 두고 `크로노스의 머리에서 철저히 중무장하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브람스는 어린 시절부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차곡차곡 기본기를 갖춰온 음악가에 가까웠다. 다니엘 리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재능을 부여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꿰뚫어보는 혜안의 거장들의 비호 아래 성장해 온 다니엘 리의 음악은 어느 날 갑자기 툭하고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해 차근히 쌓여온 것이다.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다니엘 리가 브람스 정복을 시작으로 앞으로 개척해 나갈 새로운 길을 애정을 가지고 주목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