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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도피|봄눈의 기억|운명의 재판|꽃샘잎샘|다연(茶煙)|업이|파랑(波浪)|사실과 진실|붕과 곤, 물고기이거나 새이거나|사랑,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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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도피|봄눈의 기억|운명의 재판|꽃샘잎샘|다연(茶煙)|업이|파랑(波浪)|사실과 진실|붕과 곤, 물고기이거나 새이거나|사랑,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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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싫다. 살고 싶다. 필사적인 삶의 욕구로 단단하게 부르쥔 주먹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울컥 들이닥치는 것은 강물이 아니다. 핏물이다. 들이치는 핏물과 솟구치는 토혈이 한데 뒤엉켜 그녀의 입을 막는다. 향기로운 입이 끈끈한 피로 가득 찬다. 역한 비린내에도 불구하고 내치는 힘보다 들이치는 힘이 강하니 핏물은 좁은 목구멍을 찢을 기세로 꿀꺽꿀꺽 밀려든다. 온몸의 통점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눈을 홉뜬다. 어딘가 산산이 부서져가고 있는 모양이다. 갈가리 찢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팔은 풀리지 않는다. 칼이라도 가졌다면 단번에 끊었을 텐데, 사내는 취흥이 도도해진 연회의 자리에서 주장의 명령으로 갑주를 벗고 환도를 풀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물속의 시간은 저승의 그것처럼 헤아릴 수 없이 빠르고도 느리게 흘렀다. 그는 달군 차돌을 삼킨 듯 가슴을 갈가리 찢는 격렬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서(序)」중에서 “어머니, 우리 도망가요!” 동그마니 머리맡을 지키고 앉았던 딸의 입에서 느닷없는 말이 새어 나왔다. “뭐, 뭐라고? 네가 지금 나에게 무어라고 말한 거냐?” “도망가자고요. 숙부가 나를 김 풍헌 댁에 시집보낸다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도 모르는 약조를 했다지 않으셨어요? 난 싫어요! 어머니랑 헤어지기 싫어요. 아버지도 안 계신데 어머니 혼자 두고 어떻게 가요? 난 시집가지 않고 평생 어머니와 같이 살 거예요!” 어디서 무슨 소릴 어떻게 들었는지 어린것은 입술까지 감쳐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박씨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뜩하고 가슴이 우둔우둔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쪽의 연락을 기다리다 못한 김 풍헌네서 받아 보낸 납길일(納吉日)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일 년 중 혼사에 가장 적합하고 경사스러운 시기가 묘월이니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고 그들은 짐짓 정중하게 알려왔다. 하지만 격식을 차리는 그 모양새가 더욱 가증스러웠다. 갓 쓰고 도포 차려입은 채 몽둥이를 들어 개를 어르는 꼴이었다. ---「도피」중에서 “논개야! 부디 곱고 참된 사람으로 자라주렴!” “당신, 지금 아이의 이름을 무어라 부르셨습니까?” “논개, 주논개요. 이 아이의 사주에 개가 넷 들었으니 말하자면 당신은 개를 낳은 셈이고, 우리 고향 사투리로 ‘낳는다’를 ‘놓는다’고 말하지 않소? 그래서 이두문식으로 말할 논(論) 자에 끼일 개(介) 자를 써서 아이의 이름을 논개라고 지었소. 어떻소? 당신도 아이의 이름이 마음에 드오?” “사주에 개가 네 마리라고요? 논개, 논개라! 듣고 부를수록 듣기 편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이긴 한데…….” “이 아이는 비록 여아이나 특이한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장차 큰일을 성취하고 명성을 드높일 것이 분명하오. 내 성의를 다하여 여공(女功)이라 칭하는 침선방적(針線紡績:바느질, 직물)뿐만 아니라 시서서산(詩書書算:시, 글씨, 산수)까지도 가르칠 작정이오. 시서와 육예로 총명함을 드높이고 범절과 인사로 진선진미한 품성을 기르려오. 그러면 반드시 국사에 이름을 남길 여군자가 될 터이니, 우리 내외의 나이가 많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을까 봐 염려스럽고 한스러울 뿐이오.” ---「봄눈의 기억」중에서 논개는 땅고집에 생고집을 부리는 벽창우가 아니었다. 본디 가졌던 신분과 이력은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다. 더 이상 귀해질 수 없고 얼마든지 더 천해질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았다. 논개는 공연한 강샘을 부리는 사람들의 험담에서처럼 도도하고 건방지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간절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소녀였다. 숨이 붙어 있는 모든 날들이 사랑으로 채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아무나 사랑할 수 없었다. 그저 상대가 나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없는 사랑에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배반이요 사랑에 대한 모욕일 것이었다. 논개는 애초에 박 지통과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눈만 맞춰도 입을 맞췄다 배를 맞췄다 소문을 내는 음침하고 흉악한 사내들의 속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선 추문의 그물을 던져 사냥감을 에워싼 다음 탈로를 막고 올가미를 씌웠다. 음란하다는 소문만으로 아비가 딸을 죽이고 오라비가 누이를 죽이는 세상이었다. ---「파랑(波浪)」중에서 “얼굴이나 몸매만 어미를 빼쏜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심지 굳고 야문 것이 고스란히 닮은꼴이구나!” 박씨가 며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문병인 듯 문상인 듯 찾아온 관비들은 입을 모아 박씨의 의연함을 칭송했다. 부녀들끼리의 말로는 나이 사십이면 매지근하리니 며느리에게 살림을 맡기고 편안히 물러나 살 때라고 하였다. 하지만 박씨는 그 낙낙한 중년에 자식을 잃고, 새로이 자식을 얻고, 다시 남편을 잃는 환난을 겪었다. 치욕을 견디며 살아내었고 천한 신분으로 굴러떨어져서도 살아남았다. 물론 사랑하는 딸이 있었기에 견뎌 버틴 일들이지만, 과연 그 모두가 자식을 위한 것이기만 했겠는가. 논개는 청정한 말로를 걷고자 간힘을 쓰는 박씨의 심정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정신이 혼혼히 드나드는 짬짬이 울기보다는 웃고 통곡하기보다 속삭였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어린 딸에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옛이야기가 이제 그 추억으로 자라난 딸이 어머니에게 바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사실과 진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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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장수의 한미한 양반 가문 사람인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늦둥이로 태어난 논개는 여자로서는 특이한 사주로 태어나 주달문은 그녀에게 ‘논개(개를 낳다)’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주며 사랑을 듬뿍 주었다. 논개가 다섯 살 되던 해 주달문이 병사하고,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숙부인 주달무에게 몸을 의탁한다.
집안의 망나니였던 주달무는 이웃 마을 세도가인 김 풍헌에게 여섯 살의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난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외가로 피신했으나 결국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는다. 장수의 현감 최경회는 공평무사하게 재판하여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하고 둘은 최경회의 배려로 관내에서 잔일을 하게 된다. 박씨는 최경회의 부인 김씨의 시중을 들고, 논개는 무자리로 고된 일상을 시작한다. 최경회의 부임지를 따라 옮겨 다니던 논개는 그의 반듯하고 따뜻한 성품에 남몰래 마음속에 사랑을 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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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면서 전설이고, 전설이면서 역사인……
모두가 아는 듯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인! 사랑을 품고 삶을 던진 논개를 통해 충(忠)과 절(節)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는 김별아 장편소설 임진년의 왜란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여인 논개. 1593년,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논개는 의로운 기생[義妓]이자 순국(殉國)의 아이콘으로 후손들의 기림을 받아왔다. 최근 ‘논개 정신’이란 무엇인가로 논쟁이 벌어지기까지 할 정도로 익숙한 이름 속에는 진정 충절의 정신만이 있었던 걸까? 혹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역사의 한 줄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작가 김별아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2007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논개』가 새 편집으로 개정 출간된다. 단종 비 정순왕후의 내면고백을 소설화한 『영영이별 영이별』에 이어 작가가 조선시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두 번째 작품이다. 작가는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봤으나 정작 어느 누구도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해, 논개의 일화를 담아낸 『어우야담』『진주서사』『노량기사』등을 검토하여 그 자취를 추적했고, 마침내 ‘논개의 성장’과 ‘임진왜란의 발발’을 중심으로 한 원고지 2,293매를 집필해 두 권 분량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집안의 몰락으로 관기가 되고 결국 기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바탕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넘어 한 사람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었음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작가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조선 중기 ‘부패한 사회와 그 안의 사람들’을 흥미진진하게 소설에 드러낸다. 지방에서 많은 백성들이 향리들의 수탈로 고통받고 있을 때,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은 향리를 감독하기는커녕 그들과 함께 어울려 노닥거리기에 바쁘고, 일본으로 떠난 조선 통신사들은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친 일본의 상황을 거짓으로 보고해 자신들의 안위를 챙긴다. 또한 국왕 선조는 전쟁이 나자 백성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친다. 마침내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나 팔을 걷어붙이고 전장으로 나선다. 논밭은 물론이고 산천의 열매와 동물들까지 씨가 말라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른 끔찍한 전쟁 속에서 작가는 마지막까지 조선을 지켜낸 것은 약한 자들임을 밝혀낸다. 작가는 향리, 벼슬아치, 국왕이 말로만 외쳐대는 충(忠), 절(節), 의(義)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허황된 이념과 처절한 현실 사이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유교 이념의 허상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백성들 사이에서 논개는 가슴속에 사랑을 품었기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포착해낸다. 논개의 고귀한 사랑은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능숙한 상황 묘사로 구체화되어, 한 사람을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백성과 더 나아가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었음을 밝힌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진 논개에게서 애국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장편소설『논개』는 어떠한 이념보다도 더 큰 사랑의 힘을 알려준다. 사랑으로 가득한 논개의 일생은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등장인물 논개 ‘개를 낳다’는 뜻의 특이한 이름으로 태어난 아이. 사고뭉치 삼촌 때문에 여섯 살에 지방 향리의 민며느리로 팔려갈 뻔했다가 현감 최경회의 도움으로 관청에서 일하며 지낸다. 학식이 깊고 반듯한 최경회를 사랑하게 되어 그의 첩실로 들어간다. 박씨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가난하지만 다정한 남편과 근근이 생활하는 주논개의 어머니. 첫 아들을 잃고 늦둥이로 논개를 얻으나, 곧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하나뿐인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로 살아간다. 최경회 병약한 부인을 극진히 보살피는 전라남도 장수의 현감으로, 어려움에 처한 논개 모녀를 구해 주고 관청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모친상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다. 김씨 최경회의 부인으로, 병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지만 부부의 의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남편의 배려로 자신의 시중을 들게 된 논개가 어느덧 남편과 서로 좋아하게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극심히 질투한다. 업이 관청에서 살게 된 논개를 살갑게 대하며 친하게 지내는 노비의 아이. 기생이 되어 자유롭게 살길 원하여 논개를 배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