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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배움의 길을 따라 허덕이며 걷다 믿음이 사랑의 꽃을 피웠다 들불처럼 타 올라라 오월이 그를 불렀다 최후의 일각까지 불사조가 되어 날아오르다 인물평 : 역사속의 박용준 - 최영태 |
朴惠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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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를 신부삼아 산화 한 그 죽음
폭도의 누명 벗겨진 5·18 국립묘지에 광주의 아들 불멸의 그 이름을 뚜렷이 쓴다.--- 망월동 묘역에 새겨진 묘비명 하나님, 저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입니다. 그리고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주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용준의 마지막 일기중에서 용준이는 상당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웃을 때는 입이 합죽했으며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내 죄 아닌 내 죄에 얽매여 낙엽 따라 떨어진 이 한 목숨 가시밭길 헤치며 걸었다. 배고플 땐 주먹을 깨물었다. 목마를 땐 눈물을 삼켰다. 의리로써 맺어진 우리 사이 목숨까지 바치며 살았다.--- 박용준이 자주 불렀다는 〈고아〉라는 노랫말 박용준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한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박용준에게도 청춘의 봄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필체가 좋은 박용준은 5.18민주항쟁기간 동안 광주시민의 눈과 귀가 되었던 〈투사회보〉를 만드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쏟아 철필로 등사원지를 긁었다. 등사원지의 기름진 부분이 살짝 긁히면서 글자 형태가 하나 둘씩 드러났다. 흡사 피를 찍어 쓰는 글씨 같았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는가/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오른다/ 심지에 불 댕기고 앞서 나가자/ 민족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가/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 들불이 되자 --- 박용준 열사가 강학으로 활동하였던 들불야학당의 야학당가 황급히 흩어지는 시민들. 그러나 잠시 후 거리는 다시 모여든 군중들로 가득 메워지고 그들은 외치기 시작한다. “계엄군 물러가라.” “관제언론 MBC 불태워라.” 그날의 밥이야말로 광주가 하나의 공동체로 변했음을 보여주는 ‘약속의 밥’이었다. 학생은 흰 하복 상의가 피에 젖어 있었다. 바로 부근 건물의 곳곳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현 시국은 단결된 힘만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 오후 6시 30분 계엄군은 탱크를 몰고 돌고개까지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 측 대책본부와 온 광주시민의 결사적 단결된 힘에 후퇴했습니다. (중략) 우리 시민군은 결사적인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모든 광주시민도 이에 동참하리라 믿습니다. 계엄군은 한 걸음도 중심부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결사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전남도민의 승리는 머지않았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다같이 단결하여 내 고장을 내가 지킵시다. --- 투사회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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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스물다섯 살의 청춘이었다
문학청년이었던 박용준. 그는 시인 문병란 시인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자신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했었다. 고아인 그는 따뜻한 가정이 늘 그리웠다. 그러나 소박한 그의 꿈은 1980년 5월 18일, 산산히 부셔지고 말았다. ‘화려한 휴가’를 받고 광주에 진입한 무장군인들의 폭력에 분연히 일어선 그. 광주를 지키고 내 형제 자매를 지키겠다는 그는 1980년 5월 26일 싸늘한 주검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 외롭게 자란 그를 위해 꼭 주례를 서주겠다고 약속한 문병란 시인은 주례사를 피눈물로 쓴 추모시로 대신했다. 〈젊은 혁명가의 초상〉 외 다수의 장편소설을 쓴 박혜강은 스물다섯의 짧은 삶을 살다가 그의 흔적을 찾아 평생을 외롭게 산 그를 우리 곁에 다시 데려다 주었다. 5월의 불사조로. 주례사 대신 쓴 추모시- 문병란 1980년 5월 26일 최후의 만찬 살과 피를 나누듯 빵조각으로 떼운 마지막 저녁 그대는 스물다섯 살의 청춘이었다. 그날 밤 우리들의 예수그리스도는 어디 있었으며 열두 제자들은 모두 무엇을 다짐했을까. 십자가 대신 M1소총을 지급받아 끌어안고 YWCA 2층 양서조합 창턱에 앉아 죽음의 도시 유린당한 광주의 양심과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밤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중략) 주례사 대신 쓰는 추모시 살아온 25년 고아원의 추억은 슬퍼도 최후의 만찬 그 뜨거운 밤을 함께 운다. 민주를 신부 삼아 산화 한 그 죽음 폭도의 누명 벗겨진 5·18 국립묘지에 광주의 아들 불멸의 그 이름을 뚜렷이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