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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12
이백 …… 31 벽지의 신동 촉(蜀)에서의 25년 …… 32 영광을, 다만 영광을 만유(漫遊) 16년 …… 47 한림원의 앵무(鸚鵡) 장안 2년 …… 77 축신유리(逐臣流離) 방랑 12년 …… 94 야랑(夜郞)으로 가는 길 …… 104 이웃의 발견 환남 2년 …… 112 두보 …… 123 가문의 영예 35세까지 …… 124 유관차타(儒冠蹉?) 장안 구직 10년 …… 132 동란의 와중에서 억류, 탈출, 그리고 실의 …… 158 굶주림의 여정 진주로, 다시 동곡으로 …… 185 한때의 평안 성도 5년 …… 199 비추만리(悲秋萬里) 기주, 호남, 그리고 궁사(窮死) …… 211 이백의 문학과 두보의 문학 …… 229 이두우열론(李杜優劣論) …… 230 각자의 특색을 인정하다 …… 234 칠언가행 …… 237 오언고시 …… 264 악부(樂府) …… 278 칠언율시 …… 284 오언율시 …… 291 절구(絶句) …… 307 옮긴이의 말 …… 322 연표 …… 326 이백·두보 관련 지도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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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필요 없이 이들은 하늘에 가득한 별처럼 수없이 많은 당나라 시인들 중에서도 유난히 찬란한 빛줄기를 발하는 양대 거성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3천년 문학사를 통틀어서도 발군으로 우뚝 솟은 양대 봉우리이다.
이 두 사람의 천재가 같은 시기에 살았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생애의 태반을 저 광대한 중국 전역을 떠돌면서 보낸 두 사람이 기이하게도 어느 한 시기에 한 지점에서 딱 마주쳤다는 것은 정말이지 우연의 신(神)이 주관한 덕분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방도가 없다. 더구나 두 사람은 단지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친밀한 벗이 되어 함께 여행하면서 노닐었으며, 술잔을 주고받으며 문학을 논하고 작품을 서로 보여주었다.”(12쪽) “현종 시대의 개시는 일반적인 황위의 계승이 아니라 당 왕조의 재출발이다. 무후 시기와 중종 시기를 통해 황실과 그에 얽혀 있는 권신(權臣) 사이에는 살육이 계속되어 조정은 거의 붕괴 상태에 있었다. 현종은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79쪽) “이백이 처음으로 황제에게 문안을 드린 날, 현종은 수레에서 내려 다정하게 그를 맞이하고는 식탁으로 불러서 친히 국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 이는 물론 극히 정중한 대우로서 이백을 감격도 시키고 득의양양하게 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이는 이백이 관리로서가 아니라 도사나 은사(隱士)로서 대우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백을 부른 현종의 생각도 이미 이때부터 부름을 받은 이백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82-83쪽) “여기서 이백은 스스로를 앵무에 비유했다. 왕의 응접실에 있는 그림을 보고 우연히 그런 발상을 하게 된 것이겠지만, 이 비유는 그때 이백이 생각하고 있던 이상으로 통절한 것이었다. 이백은 틀림없이 말을 조금 잘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귀여움을 받은 앵무였던 것이며, 앵무라는 자신의 처지에 의문을 느꼈을 때 앵무는 버려지는 수밖에 없었다. 날개가 꺾인 패잔(敗殘)의 앵무는 새장에서 쫓겨나 불안과 자유를 아울러 얻고 정처 없이 넓은 하늘을 향해 날갯짓한다. 천보 3년(744년) 춘삼월, 이백은 44세였다.”(93쪽) “서민의 세계에서 올라온 이백은 선비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영예와 명성을 얻으려고 평생 악전고투했다. 그리고 결국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반도(叛徒)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늙은 이백을 선비 세계는 결코 따뜻하게 대우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지요(李之遙)라는 사람에게 준 시에서 이백은 그것을 ‘문전에서는 인사를 하면서 뒷문은 닫아걸고, 오늘 사귀었다고 생각하지만 내일은 이미 마음이 변해 있다’다는 말로 표현하며 탄식하고 있다.”(119쪽) “이백은 보응 원년(762년) 11월에 당도현 현령 이양빙의 집에서 죽었다. 방랑 끝에 신세를 지기 위해 찾아든 곳에서 병에 걸려 죽은, 객사에 가까운 죽음인 듯하다. 옆구리가 썩어 들어가는 병이었다고 한다. 향년 62세였다.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물론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120쪽) “생각건대 이백은 아버지의 성도, 이름도, 출신도 분명치 않다. 그리고 지금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후예도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다. 참으로 이백은 문득 하늘 한쪽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우주 끝으로 사라져 간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122쪽) “이 점이 평생을 혼자 떠돌면서 네 아내를 두었지만, 그 아내들에게도 냉담했던 이백과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는 또 주변 사람에 대한 이백과 두보의 태도 차이기도 하다. 이백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하나뿐이었다. 두보에게는 자기 주변 사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백보다 두보가 인격적으로 훌륭했다고 성급히 결론 같은 것을 내리는 건 아니다. 두보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고는 해도 당시의 전중국인 중에서 보면 극소수의 혜택 받은 계층인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고, 일족의 친척도 모두 나름의 지위를 가진 관리였으며, 일족 전체가 서로 끌어주고 원조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서 이백은 서민 계층에서 출발해서 혼자 선비 사회에 들어가, 애초부터 서로 이끌어줄 친척도 동료도 없이 끝끝내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다. 가족의 상호 원조 따위는 이백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아내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두보와 이백의 성격 차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출신의 차이이기도 했다.”(128쪽) “두보가 당나라 왕조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와 존숭의 생각을 품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나라 왕조의 영원한 안태(安泰)와 번영이야말로 두보가 생각하고 또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보는 그 안태와 번영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달성될 수 없다든가, 자신이 거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훌륭한 천자와 성실한 신하에 의해 달성된다면 두보는 만족할 것이고, 그는 다만 자신도 꼭 거기에 조력할 수 있기를 바란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점이 두보와 이백이 조정이나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 전혀 다른 점이다. 이백에게 조정은 자신이 역량을 발휘해서 영광을 얻기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 거꾸로 두보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조정 혹은 국가였다. 이백을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두보가 더 보수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도 물론 두 사람의 개성 차이라기보다는 출신 차이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148쪽) “이 엄청난 양의 시들을 읽으면, 두보에게 시를 짓는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대다수 선비에게 시는 시험 합격의 수단이자 독서인 사회의 교제 수단이며, 명성을 얻는 수단이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취미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 무렵 이후의 두보에게는 이미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 화주를 떠난 이래 두보의 생활을 보면, 그저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간신히 살아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명예로운 선조의 자부심을 지키고, 천자를 섬겨 천하와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온 두보 자신에게 당시의 생활은 그야말로 무의미하고 헛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공백을 무언가로 충전하려고 하는 두보의 정신이 저절로 시를 짓게 한 것은 아닐까.”(196-197쪽) “전혀 믿기지 않는 일이겠지만, 두보는 보통의 문장을 조리 있게 쓸 줄 모르는 사내였던 것이다. …… 물론 두보가 쓴 문장이 없지는 않다. ‘서(序)’라고 해서, 시의 제하에 그 시가 나온 유래나 사정을 설명한 문장이 자주 덧붙여진다. 그런데 두보가 지은 서들은 모두 말이 안 되는 악문(惡文)이다. 의미불명, 맥락불통이어서 예로부터 주석자를 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 …… 분명히 두보는 그 발달이 심하게 왜곡된 천재였다. 그는 시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해 봐야 지리멸렬이었다. …… 두보는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걸핏하면 자신은 처세가 서툴러서 인간관계가 어렵고 남들에게 미움을 산다고 한탄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매우 힘이 들어 부드럽게 대응할 수 없다는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217-218쪽) “되풀이해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보라는 사람은 자신이 비참하면 할수록 자신과 마찬가지로 혹은 자신 이상으로 비참한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기 드문 정신의 소유자였다. 신에 가까운 호인이라고나 할까. 체제 이데올로기의 전형과 같은 유학의 가르침이 가장 정직하게 받아들여져 어떤 인격과 결합하면 때때로 이런 인간과 이런 정신이 출현한다는 하나의 예를 두보는 보여주는 것 같다.”(22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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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과 두보가 갈라지는 곳 ―
이백과 두보는 (잠깐이기는 하지만) 실제 만나기도 하고 서로를 격려해 주기도 했으며, 또 위에서 본 것처럼 유사한 형태의 삶을 살았지만, 실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그 출신이 달랐다. 두보는 대대로 관리를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이백은 그 가계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성도 이름도 확실치 않은 상인으로, 이백이 4~5세 무렵 서역에서 촉으로 이주해 성을 이씨로 바꾸었다고 한다(이 때문에 이백의 아버지가 이민족 출신이거나 수배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계층상의 차이는 두 사람의 인생의 향방과 구체적 모양새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선 관직에 나가기 위해 두보는 당연히 과거를 염두에 두게 되지만, 이백은 가계가 불명확해 과거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백은 처음부터 유력자의 추천(몇 번 시험에서 낙방한 두보 역시 이 길을 택하게 된다)이나, 왕실과 유착되어 있던 도교 교단을 통해 조정에 진출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이백은 도사 오균의 추천으로, 따라서 도사의 신분으로 천자를 알현하게 된다. 이 가계의 차이는 단지 조정 진출 과정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평생 이루고자 한 꿈과 희망에서부터 서로 큰 차이가 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출신의 상이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백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화려한 옷을 입고 퇴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는 호사스런 생활이었다(?고풍? 제18수, 265쪽). 또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선비의 세계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 그에게, 왕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무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대로 왕실을 섬겨온 관료 가문 출신의 두보는 달랐다. 왕조의 성쇠가 그의 집안 및 자신의 성쇠와 직결되기 때문에 국가와 인민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그가 꿈꾸었던 삶은 전쟁의 참화가 없는 평화로운 사회와 그 속에서 유지되는 행복한 가정이었다(?위팔처사에게 드림?, 274쪽). 이백이나 두보 모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그 목적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백과 두보는 가족을 대하는 모습도 전혀 달랐는데, 예를 들어 이백은 네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모두에게 냉담했고 두보는 단 한 명의 아내만을 두어 평생 소중히 아꼈다. 이는 주위 사람에 대한 태도로도 연결된다. 이백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하나뿐이었지만, 두보에게는 주위 사람도 자신 못지않게 소중했다. 하지만 이 역시 둘의 개인적인 인격과는 관계가 없다. 두보는 극소수의 혜택 받은 선비 가문의 출신으로서 일족도 모두 나름의 지위를 가진 관리들이었으므로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환경에서 자랐다. 이에 비해 이백은 애초부터 서로 이끌어줄 친척도 동료도 없이 끝까지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교유관계도 달랐는데, 이백은 가는 곳마다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지만 또 금방 헤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에 비해 두보는 교제의 범위는 좁지만, 몇 안 되는 벗들과 깊은 친교를 유지했거나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백과 두보의 관계에서도 그런 각자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이백은 두보를 곧 잊은 듯하지만 두보는 두고두고 이백을 떠올리며 전달될 가망성이 없는 편지를 시로 짓곤 했던 것이다. 이백과 두보의 문학 ― <이백, 두보를 만나다>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시를 논하는 데 있어 정치적?도덕적 평가는 피하고, “이백에게는 한두 가지 묘처(妙處)가 있는데 그것은 두보가 흉내낼 수 없고, 두보에게도 한두 가지 묘처가 있는데 그것은 이백이 흉내낼 수 없다”는 남송 때의 엄우의 견해를 따른다. 결론적으로 두보는 칠언율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오언율시와 칠언가행도 훌륭하고, 이백은 칠언가행에서 독보적이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도 능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또한 이백의 경우 칠언율시, 두백의 경우 칠언절구는 별로 볼 것이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백은 고시에 능하고 두보는 근체시에 능한 셈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칠언가행의 경우 이백이 특히 능했는데,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칠언가행과 같은 자유로운 시 형식 속에서 마음껏 펼쳤다. 가행은 ‘노래’이므로 그다지 구성이 치밀하지 않거나 대구가 갖춰져 있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보다는 자유자재로 분방하게 짓는 게 좋은 시형식이다. 이백은 이 칠언가행으로 자신의 환상을 자유롭게 전개하고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었다. 두보도 칠언가행에 능했는데, 이백과는 조금 다르게 이 형식에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냈다. 절구라는 시형은 시인에게 특별한 재능과 기량을 요구하는 것으로 일류 시인이라도 절구만큼은 서툴게 짓는 경우가 있다. 이백은 누구와 비교해도 단연 으뜸이라고 할 만큼 절구에 능했다. 그러나 두보에게는 그다지 잘된 절구가 없다. 심지어 “두보는 율(律)을 가지고 절(絶)을 만들었다. …… 이는 비단이나 명주를 잡아당겨 반으로 찢은 거나 마찬가지다”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이다. 그러나 칠언율시의 경우 이백에게는 잘된 작품이 없는 데 비해, 두보는 매우 우수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칠언율시는 원래 궁정에서 천자의 덕을 찬양하고 천수만세를 축원하던 시형으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왔었다. 하지만 두보는 이 칠언율시라는 시형에 주목했고,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 내용을 일신했다. 즉, 이 시형에는 전혀 없던 경지를 개척하여 칠언율시의 활용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두보에게는 전에 없던 소재를 발굴하여 한시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린 공로가 있다. 즉, 한시의 소재는 매우 제한되어 시가 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두보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크게 감격해서 열심히 노래하기도 하고, “산적한 서류더미와 씨름하고 있자니 머리가 이상해져 고함이라도 칠 것 같다”(?이른 가을 너무나 더운데, 문서는 산처럼 쌓이다?, 177쪽)는 따위의 시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아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기도 하는(당시까지 중국의 시에는 자신의 아내를 노래하는 용어도, 표현도, 방식도 없었다) 등 누구도 시로 씌어질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척척 시로 표현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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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백과 두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
동양 문화의 자장 안에 있는 사람치고 이백과 두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당나라 중기에 활약한 이 두 시인은 시선(詩仙), 시성(詩聖) 등으로 불리며 천 년이 넘도록 큰 영향을 미쳐 왔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두 인물의 이름은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술을 좋아한 이백의 시가 호탕하고 환상적인 데 비해 두보의 시는 사회현실을 극명하게 담아냈다는 정도,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몇 수의 시를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닐까. 이백과 두보가 갖고 있는 그 대중적인 명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독서계는 이제껏 그들을 거의 무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이백과 두보의 삶, 그리고 문학을 매우 세밀하게 짚어 내는 한편, 일반 독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이백과 두보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이 사실은 상당 부분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고 있던 이백과 두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이백과 두보를 만나게 될 것이다. 호방하고 은자적 풍류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는 이백, 그리고 국가와 민중의 안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두보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젊은 날 관직을 구걸하기 위해 세력가들의 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불세출의 시인 두보가 사실은 산문에는 전혀 무능해서 시 외에는 다른 글을 거의 쓰지 못했음도 알게 된다. 물론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이백과 두보에 대한 기괴한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이 전혀 아니다. 전반부에서는 이백과 두보의 삶을 철저히 고증, 복원해 냈고, 후반부에서는 그들의 시편들을 섬세히 검토할 뿐만 아니라 누가 어떤 시형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고 어떤 형식에서는 다소 뒤처지는가 하는 점까지 밝힐 정도로 깊이 있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히 고체시, 근체시, 가행, 악부, 율시, 절구, 배율 등 당시(唐詩)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백과 두보의 삶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당나라 중기의 역사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후와 중종 시대를 마감한 현종과 그의 아들 숙종 대의 정치 상황, 당시의 관리 등용 제도, 도교와 황실의 관계, 안사의 난의 전개 과정, 당나라의 이민족 정책 등이 두 시인의 삶 혹은 문학과 교차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좀 더 여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 실린 이백?두보 관련 지도를 직접 더듬으며 이 두 시인이 살아낸 삶의 족적을 그 현장에서 직접 되짚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이백과 두보가 만나는 곳과 갈라지는 곳 이백과 두보가 만나는 곳 ― <이백, 두보를 만나다>는 실제로 이 두 시인이 낙양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거대한 두 봉우리가, 그것도 삶의 대부분을 방랑 생활로 보낸 두 사람이 광활한 중국 대륙의 한 지점에서 딱 마주쳤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꼭 이런 구체적인 대면이 아니고도 이 둘의 삶에서는 여러 접점이 발견된다. 두 시인 모두 일찍이 관직에 뜻을 품고 고관이나 실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시를 지어 바쳐 눈에 띄기를 고대했다. 비굴하게 세력가들을 터무니없이 높여야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는데, 자신을 앵무새에 비유하기도 하고(이백, 92쪽), “아침에는 부자의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귀공자의 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남은 술과 식은 고기, 어디를 가나 괴로운 심정”(두보, 138쪽)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던 것이다. 10여 년 만에 어렵사리 관직을 얻게 되지만 처세가 서툴러 곧 관직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이로 인해 둘은 10여 년 동안 여러 지역을 방랑하게 되는데, 이들은 정작 어느 한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면서 중국 전역이라 할 정도의 머나먼 거리를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포부도 없이 헤매고 다닌다. 관직을 얻기 전에는 중앙 고관들에게 벼슬을 구걸했다면, 관직을 잃고 난 후에는 지방 관리들에게 생활을 의지하는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또 그들의 삶이 안사의 난이라는 당시의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 들어갔다는 것도 동일하다. 이백은 방랑중에 안사의 난을 만나는데, 촉으로 도피한 현종의 16번째 아들 영왕의 군대에 참여했다가 반역의 무리로 지목당해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한다. 두보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관직을 얻은 후 가족을 데리러 간 사이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데, 그 와중에 반군에 의해 장안에 억류되기도 하고 현종 계열로 분류된 방관 일파로 지목되어 관직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된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현종으로서도 숙종에게 양위를 할 리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두보의 삶도 예상치 못하게 굴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랑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백은 술에 취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고 하고, 두보는 오랜만에 얻어걸린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만 배탈이 나 죽었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백은 방랑 끝에 신세를 지기 위해 찾아간 당도현 현령의 집에서 옆구리가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 객사한다(서기 762년, 향년 62세). 학질과 천식, 중풍 등으로 고생하던 두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배를 타고 상강을 내려가다 악주 근처에서 생애를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70년, 59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