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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의지와 작별하기
인디고 나무 그늘 누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죽였는가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거울이 놓인 방 무도회의 수첩 나의 문학적 연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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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랜만에 서랍에서 꺼내 입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한번 쓸어보고, 따가운 햇빛을 가려 주는 펠트 모자를 고쳐 쓰고, 복고풍 코코 샤넬 악어 핸드백을 다른 팔에 옮겨 든 다음 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스쳐갔다. 바람 속을 살랑이며 걸어가는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달랐는데,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흔들어 사방에 향기를 흩뿌렸다. 재스민과 장미와 이름모를 들꽃에서 뿜어 나 오는 향기를 헤치고 걷는 그녀에게서 은은히 좀약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인디고 나무 그늘」중에서 한순간의 소동이 인 후 거짓말같이 평정을 되찾은 광장을 질러 나오다가 그녀는 땅에 떨어진 책을 보고 주워들었다. 표지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이름을 본 그녀는 조금 놀랐다. 그때 남루한 옷차림의 동양 소년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그 책 제 것인데요.” “베르톨트 브레히트 말이니?”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소년을 살펴보면서 책을 건네주었다. 그 책과 소년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고마워요.” 소년이 굉장히 중요한 귀중품을 다루듯 옷소매로 책 표지를 문질렀다. 그녀는 한두 발짝 걷다 말고 뒤돌아섰다. “네가 브레히트를 아니?”. ---「누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죽였는가」중에서 그녀는 왜 음식들마다 그 남자에 대한 추억들을 달리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리소토 요리는 햇빛 찬란한 토요일 오후의 한적한 시골 식당과 햇볕에 눅진거리는 아스팔트같이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와락 느꼈던 섬뜩한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중에서 난 멋쟁이라든가 세련됐다거나 하는 말을 듣는 게 싫어. 그런 것보다는 감각적이라든가, 분위기가 있다는 말이 훨씬 좋지. 그리고 새 옷만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 그 사람을 특징적으로 만드는 트레이드마크 같은 옷들이 있잖아? 그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그 사람과 옷이 하나인 것 같이 느껴지고, 그 옷을 통해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낡은 옷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좋아. ---「거울이 놓인 방」중에서 수지는 그날 오후 내내 그녀를 열중하게 했던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면서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맞은편 미세스 퐁네 정원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음악을 틀었다. 베니 굿맨 빅밴드의 스윙이었다. 젊은 애들은 흥미 없는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자기들끼리 떠들어 댔고, 올드 타이머들은 감미로운 스윙에 맞춰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무도회의 수첩」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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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하여
상처를 관능이라고 생각하는 불구적 인식, 그런 도발을 충동하는 삶의 폭력성, 세월의 부식성에 저항하는 삶의 열정··· 사치스럽도록 화사한 도피에도 불구하고 송혜근의 글 중심에는 갇힌 연못의 끔찍한 적요가 놓여 있다. 복부를 가르는 긴 상흔 위에 벨벳 원피스를 입고 무상한 표정으로 방울 소리처럼 아프게 웃고 있는 여자들. 우리는 그 화사함 뒤에 삶에의 격렬한 애정과 격통의 전율이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삶에서 비껴선 자들의 아픈 결의가 들여다보인다. 전경린(소설가) 위태로운 여자들에게는 향기가 있다. 향기는 위태로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지만 오히려 향기 때문에 꼬리를 밟히게 된다. 송혜근은 그런 향기의 불온한 기미를 잘 아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맨발로 흑수선화 밭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은밀한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천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작은 종이 보였다. 예민하며 섬세한 송혜근의 손은 그 위태로움이 갖는 매혹을 종 위에 아슬아슬하게 빚어놓았다. 하성란(소설가) 송혜근의 소설 속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매우 이색적인 댄디들이 출현한다. 그들은 세상을 냉소하기보다는 경외심을 갖고 관찰하며, 일상적 삶에 혐오감을 갖기보다는 연민을 갖고 그것의 비의를 탐색한다. 이처럼 도발적인 직관과 낭만적인 열정으로 충만한 매혹적이며 사랑스런 여성 댄디들을 우리가 이 작품집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매우 유쾌하고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송혜근의 작품에 이르러 우리 소설 문학은 직관과 선험적 사유가 통합된 매우 유니크한 엑조티즘과 댄디의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철화(문학평론가) ※노란잠수함 클래식 우리 소설은 현 단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골라,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들의 그림을 표지로 꾸며 ‘이것이 한국문학이다’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