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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Gilbert Kaplan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 길버트 카플란 (Mahler: Symphony No. 2 '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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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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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CD 1 - Mahler :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01 ~14. I. Allegro Maestoso

CD 2 - Mahler : Symphony No.2 In C Minor ' Resurrection'

  • 01 ~05. II. Andante Moderato
  • 06 ~14. III. In Ruhig Fliessender Bewegung
  • 15 IV. 'Urlicht' (From Des Knaben Wunderhorn) Sehr Feierlich, Aber Schlicht (Choralmassing)
  • 16 ~28. V. Im Yempo Des Scherzo - Langsam - Maestoso - Allegro Energico - Langsam - 'Der Grosse Appell' - Langsam Misterioso - Mit Aufschwung, Aber Nicht

아티스트 소개 3

작곡Gustav Mah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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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중 3곡은 역대 최고의 교향곡 10위 안에 올랐다.

보헤미아(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에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직을 연이어 맡아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됐다. 빈에서 10년 동안, 감독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는 반유대 언론의 적대와 비판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공연 수준의 기준에 대한 고집은 특히 바그너,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후반기에는 잠시 동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았다.

말러의 삶의 대부분은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다. 그가 빈에서 학생이었을 때 작곡한 피아노 사중주곡과 같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러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 관현악단, 교향악 합창단, 그리고 오페라의 솔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초연 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예외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 〈부활〉, 3번째 교향곡, 1910년 그의 8 번째 교향곡은 성공적이였다. 말러의 음악 후계자들 중에는 제2 비엔나 학교의 작곡가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또한 말러에게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는 작곡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설립되었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교향곡과 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교향곡과 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말러는 베토벤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10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관현악단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출생에 관하여 말러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높은 지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서는 빈의 비평가의 평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말러 교향곡 작품이 빈에서 호평을 받게 된 것은 만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말러 자작 연주에 대해서 빈의 저널리즘 등에서 "자작의 선전에 열중하고만 있다"와 중상하는 것도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11곡 중 7곡(1번을 현재 판에서 생각하면 8곡)이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이미 외국이 되고 있던 독일에서 초연되고 있다. 말러에게 "아웃사이더(부외자)"로서 의식은 평생 사라지지 못했고, 가장 만년에는 뉴욕에서 독일인 기자가 "무슨 사람" 물어 그 언론인의 기대되는 답인 "독일인"와는 전혀 다르게"나는 보헤미안입니다(Ich bin einBohme.)"이라고 답했다. 흑맥주를 좋아했으나 본인은 그렇게 술에 강하지 않았다.

성격은 불같이 화를 잘냈고 완벽주의에 괴팍했다. 무자비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로서 말러는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양보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고 일방적인 대화에 자주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조울증, 정신강박증도 있어서 어떨 때는 기분이 업다운되기까지도 했다. 지휘자로서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무자비한 완벽주의, 자기중심적, 고압적, 신경질적인 성격이 따랐고 지휘대의 독재자라고 불렀다.

말러는 자신과 같은 계의 음악가이자 제자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발터는 말러에 심취하고, 음악적인 면만 아니라 친구처럼 말러를 적극적으로 보좌했다. 클렘페러는 말러의 추천에 의해 지휘자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일에 대해서 훗날까지 말러에 감사했다. 그 외, 빌럼 멩엘베르흐와 오스카 프리트와 같은 당시의 일류 지휘자도 말러와 교류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멩엘베르흐는 말러로부터 "내 작품을 마음놓고 맡길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인간은 따로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멩엘베르흐는 말러의 사후, 남겨진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20년 5월 6일부터 21일까지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한편 말러는 완고한 성격과 완벽주의로 인해 주위의 반발을 산 적도 많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말러의 고압적인 태도(리허설에서 참다못한 때에 바닥을 발로 구르고 음정이 나쁜 단원들과 아인 자츠가 갖추어지지 않을 때 지휘봉으로 지적하는 것 등)를 싫어했다. 당시의 반유대주의의 융성과 함께 말러에 대한 태도는 점점 굳어졌고, 어느 날,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 명이 "말러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한스 리히터도 심하지만요."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이 "그렇구나. 하지만 리히터도 한통속이다"고 말했다. 당시 빈의 음악 저널리즘에서도 반유대주의에 입각한 부당한 공격을 받았으며, 이들은 말러가 유럽에서 활동을 그만 두게 된 큰 요인이 되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은 1902년 2월 알마 앞 서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것을 언급한 때에 등장하고 있다.

“그(슈트라우스)의 시대는 끝나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까지 내가 그대 곁에서 살아 있었으면 좋지만! 하지만 너는 나의 빛이여! 너는 분명 살아 그날을 찾는다!”

말러는 당시 악단의 정점에 오른 최고의 지휘자였다. 음악성 이상으로 철저한 완벽주의, 완급 자재인 속도 변화, 극심한 몸짓과 소절선에 얽매이지 않은 초서적인 지휘법은 체험화할 만큼 강한 충격을 당시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캐리어쳐인 "초현대적인 지휘자"(Ein hypermoderner Dirigent)에는 1901년 빈 초기 시절 심한 운동을 동반한 말러 지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그 지휘 솜씨는 점차 평온한 것이어서, 만년에 의사는 심장 질환을 선고 받고는 "거의 불길에서 조용한 그림 같았다"(발터의 증언)과 다른 것이었다.

말러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벌써부터 나오고 있으며 1890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상연된 돈 조반니를 들은 브람스는 "진짜 돈 조반니를 듣기 위해서는 부다페스트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말러는 연주되는 곡에 대해서 악보를 수정, 편곡하는 경우가 많았고 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말러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떠난 후 수정이 들어간 이들 악보를 보고 "말러 놈, 수치를 알라!(Shame on a man like Mahler!)"과 분개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슈만의 교향곡 2번, 교향곡 3번의 연주에서는 토스카니니는 말러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변경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지휘에 대해서 말러의 말이 몇가지 남아 있다.

"모든 음의 길이가 정확히 나오면 그 템포가 바르다."
"음이 전후 서로 겹치고 프레이즈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그 템포가 너무 빠르다"
"식별할 수 있는 극한의 곳이 프레스토의 올바른 템포이다.그것을 넘으면 더 이상 무의미하다"
"청중이 아다지오에 따라오지 못할 때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루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많은 개혁을 실행하고, 그것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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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Gilbert Kap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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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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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VPO),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Gustav Mahler 1860-1911

soprano : Latonia Moore
mezzo-soprano : Madja Michael
Wiener Singverein
Wiener Philharmoniker
conductor : Gilbert Kaplan

* Recording : Vienna, Musikverein, 11 & 12 / 2002

Stereo DDD ⓟ 2003 The Kaplan Foundation

품목정보

발매일
2003년 11월 14일
시간/무게/크기
122g | 크기확인중
KC인증

제작사 리뷰

'말러의 자필 교정'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는 새 음반의 핵심에 이르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플란의 새 음반이 새로운 관현악 총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카플란은 말러 자신이 사용했던 '부활'의 악보를 가지고 있었다. 말러는 이 악보 위에 자필로 수많은 메모를 적어넣었다. 1910년 개정판 악보를 만들기 위한 메모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메모를 바탕으로 인쇄된 말러 자신의 '개정판'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말러의 의도에 더욱 다가가기 위한 카플란의 작업에 2000년 음악학자 레나테 스타크보이트가 가세했다. 두 사람은 말러가 개정하고자 의도했던 500여개의 부분을 꼼꼼히 찾아내 검토했다.
"처음 듣고서 놀랄 만한 변화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카플란은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플루트로 연주돼온 부분이 트럼펫으로 바뀐다던가 하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잘못된 악상표시, 강약표시, 음높이의 잘못 등이 크게 교정됐다. "말러는 항상 작은 부분을 중시했고, 작품이 발표된 뒤 미세한 부분의 개정에 항상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미세한 부분이야말로 말러를 말러답게, 또한 지금까지보다 더 말러답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카플란의 레퍼토리는 '부활'에 한사코 머물러있다. 예외가 있다면 1992년, '장례식풍'으로 지나치게 느린 연주경향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 녹음한 5번 교향곡의 4악장 '아다지에토' 정도다. 또 하나의 예외로, 사적인 축하자리를 위해 한두번 지휘한 생일축하 노래(Happy Birthday)가 있을 뿐이다. 앞으로는?
그는 언제까지나 힘닿는 한 자신의 '부활'을 '더더욱 말러답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할 것이다. 머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일생을 기울여온 작업을 서울 음악팬들 앞에 직접 소개하게 될 지도 모른다. "베이징, 샹하이, 타이페이, 싱가포르, 도쿄, 마카우에서 '부활'을 연주했다. 한국은 내게 남겨진 중요한 무대 중 하나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글 : 유윤종
'두 차례의 레코딩'
길버트 카플란의 음악인생에 전기가 된 것은 1988년 '부활' 교향곡의 음반 발매였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 코러스가 협연한 이 음반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말러 음반으로 기록된다. 미국과 영국에서 클래식 차트 1위에 오른 이 음반은 2년동안 차트에 머물렀고 지금까지 18만장 가까운 판매기록을 세웠다. 1998년에는 1992년 발매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등을 첨부한 새 에디션으로 선을 보였다.
첫 번째 음반으로 듣는 카플란의 '부활'은 오래동안 단 한 곡의 악보에 천착한 지휘자답게 디테일이 돋보인다. 반면 이렇다할 개성을 찾기 힘들어 '흠잡을 점도, 강력한 매력도 없는 말러'라는 지적도 이 음반을 따라다녔다.
"번스타인의 고도로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지휘도, 불레즈의 쿨하고 깨끗한 말러도 다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말러 해석은 모두 일종의 극단을 대변한다"고 카플란은 말한다. 그러나 첫 번째 녹음 당시 카플란은 이 작품의 전곡지휘 경험이 단 5회였다. "그 동안 내 지휘에는 여러 가지 기법상의 진전이 있었다."라는 말로, 그는 첫 녹음의 '중립성'이 자기 개성을 관철시킬 '수단'의 부족과도 관련된 문제임을 밝혔다.
그가 DG와 녹음한 새 음반은 그러나 단지 '지휘실력의 진보'라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먼저 상징적이지만, 이번에 그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과 빈 징페라인은 100년전 '말러의 악기'였던 바로 그 악단과 합창단이다. 녹음장소인 빈 무지크페라인 역시 말러의 체취가 배어 있는 연주공간이다. "당연히 연주는 더 빈풍으로 세련되어졌다. 2악장의 소박한 춤곡, 미끄러지듯한 포르타멘토, 그 밖의 여러 부분에서 빈의 체취가 더해질 수 있었다."
'1류 악단들, 아마추어 지휘자?'
처음 듣는 말러의 교향악과 연결된 '감성의 끈'을 그는 느꼈지만, 이제 막 뉴욕 금융계에 발을 디딘 사회 초년생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2년 뒤, 그는 25세의 나이로 금융 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를 창간했다. 시작부터 1만8000부라는 범상치 않은 부수로 출발한 이 잡지는 이윽고 100여개 나라에서 10만부 이상 판매되며 그를 세계 금융계의 대표적 '성공인' 중 하나로 띄워올렸다.
그가 금융 이외의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부활'을 처음 접하고 18년이 흐른 뒤인 1983년이었다. 객석에 앉아 '부활하리라, 나의 진애(塵埃)여, 무(無)로부터!'를 들으며 전율하던 젊은이는 40대의 중년이 되어 지휘대에 섰다. 18년전 객석에 있었을 때와 같은 카네기홀, 같은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지인들만 초대한 콘서트였지만 뉴욕 데일리 뉴스는 이 사건을 83년의 공연계 10대 이벤트중 하나로 꼽았다.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뛰어난 연주 중 하나였다'는 평이 곁들여졌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2년 전인 1981년, 그는 '독선생'을 들이고 매일 5시간씩 '음악 공부'에 돌입했다. 악보 읽기를 다시 배우고, 지휘법을 배웠다. 그리고 '부활'의 총보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최소한 이 시작단계에서 악단을 '돈으로 샀다'는 것을 부인할 이유는 없었다. 돈으로 산 연주였지만 그는 충분 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고, 다시 지휘대에 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봉을 든 잡지사 회장'의 다음 연주를 기다리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휘생활 20년, 그가 지휘한 '부활'공연은 50건을 헤아리고 그가 지휘한 악단의 리스트 역시 30곳을 넘었다. 그 대부분은 세계 초1류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들기에 손색이 없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함부르크 북독일 방송교향악단, 라스칼라 관현악단, 오슬로 필하모닉, 스톡홀름 필하모닉,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키로프 오케스트라, 상트 페테르부르그 필하모닉, 세인트 루이스 교향악단, 피츠버그 교향악단,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 등이 그의 지휘봉을 거쳤다. 그러나 그의 레퍼토리는 변함없이 단 하나, 데뷔때와 다름없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이다. 이 '지정곡'으로 1996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 개막연주에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연구가의 말러 '부활'교향곡 - '말러, 1960년대, 길버트 카플란'
구스타프 말러가 1911년 불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분명 애석한 일이었지만, 이는 어떤 면에서 절묘하기도 했다. 1960년과 61년에 세계는 그의 탄생 100주년과 서거 50주년을 연이어 맞이했다. 이 낯선 '작곡가'의 작품은 2년 내내 도처에서 연주됐다.
작곡가로서 말러의 자질을 의심하는 시각은 반세기동안 사라지지 않았었지만, 대 지휘자로서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대가 머리 희끗하나마 유럽과 아메리카의 양 대륙에 걸쳐 남아있었다. 그의 추억을 간직한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 제자들도 아직 살아있었다. 두 차례의 대 전쟁을 겪은 세계는 모처럼 맞은 평화속에 풍요를 회복하고 있었으나 한편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두려움이 끊임없이 위안과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무조주의에 점령된 작곡계는 대중들에 어필할만한 산물을 내놓지 못했던 반면, 연주자와 악단들의 기량은 날로 일취월장해져 작곡가들의 상상속에서나 이뤄졌던 높은 수준의 연주가 실제로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속에서 말러는 LP와 FM으로 무장한 새 시대의 음악팬 앞에 훌쩍 돌아왔다. '축제'는 2년이었다. 그러나 곧 사그라들 것 같았던 불꽃은 꺼지지 않고 더욱 휘황하게 피어올랐다.
이 시기를 되돌아볼 때 말러가 교향곡 2번에 붙인 제목은 사뭇 시사적이었다. '부활(독·Auferstehung·영·Resurrection)'이라는 이름은 1차대전으로 사라져버린 오스트리아 제국 및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와 함께 땅에 묻혔던 대 작곡가를 다시 지상으로 불러내는 키워드이기도 했다. 오늘날 5번 이후 말러의 순기악적 교향곡들이 많은 감상자를 찾아가고 있지만, 60년대에 말러 해석과 수용의 중심은 단연 1번 4번, 그리고 '칸타타적'으로 웅대한 2번 교향곡이었다.
이 음반을 스스로 구입한 독자는 대부분 길버트 카플란의 '신화'에 대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카플란 또한 60년대 초 '말러 부활'의 충격파가 남긴 여진에 포로가 된 인물이었다.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지휘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부활'을 들을 때까지 그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운 스물 세 살의 평범한 음악애호가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말러의 작품은 그때 처음 듣는 것이었다. 당시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벼락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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