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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시간
다얀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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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허무한가?
그렇다면 죽을 각오로 벼락을 맞아라! 눈을 뜨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젊음이 찾아올 것이다.” 벼락을 맞고 죽음 대신에 얻은 영원한 젊음 100년을 산 남자의 신비한 삶과 운명적 사랑…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보르헤스, 칼비노, 코르타자르에 비견된다.”《뉴욕타임스》 현대 지성계를 대표하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환상소설 100년을 산 남자의 삶과 사랑에 대한 황홀한 미스터리 20세기 가장 뛰어난 종교학자이자 소설가로도 잘 알려진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소설 『백 년의 시간』이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백 년의 시간』에는 벼락을 맞고 30세로 회춘하여 100년을 산 언어학자 노교수의 신기루 같은 삶을 이야기한 「백 년의 시간」과 한쪽 눈을 다쳐 검은 안대를 하고 다니던 젊은 수학 천재가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베루스’라는 신비한 노인과 만나 세상의 멸망과 구원에 대해 얘기 나누는 몇 시간 동안의 기묘한 이야기를 그린 「다얀」, 두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일생 동안 성취해 낸 신화, 역사, 철학, 종교학에 대한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이 두 편의 글은 신화와 역사, 꿈과 현실, 자연과 초자연을 교차하며, 역사적 시간 속 영원한 젊음의 의미와 현실과 허상, 존재의 실재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환상의 조화가 경이롭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소설은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데 초자연적인 것과 신화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 《라이브러리 저널》 “이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갈등을 초점으로 하는 ‘상상적인 혹은 창조적인 해석학’이 작용하는 환상소설이다.” ― 마테이 칼리니스쿠(인디애나대학 비교문학 명예교수) 벼락을 맞고 30세로 회춘한 언어학자 노교수에게 일어난 삶의 신비 첫사랑의 현신과도 같은 여인과의 운명적 사랑, 신기루 같은 100년의 시간 「백 년의 시간」은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38년 부활절 밤, 자살을 결심한 한 70세의 노인이 벼락을 맞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시작한다. 피부가 100퍼센트나 탄 채로 병원에 실려 간 그(도미닉 마테이)는 현대 의술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억력과 초능력에 가까운 지적 능력을 갖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음을 목도에 두었던 노인이 하루하루 예전의 젊음을 되찾더니, 서른 살로 회춘해 버린다. “벼락을 맞은 방식으로 봐서는, 당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십에서 십오 분 안에 질식사해야 했어요. 최선의 경우라도 마비되거나 벙어리나 장님이 되었겠죠. 그러나 당신 경우에는 매일매일 의문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략) 정상적으로 식사하고 말할 수 있도록 틀니를 맞춰드릴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장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엑스레이를 봤더니 새 치아가 나오려 하고 있더군요.”(p.31) 그는 죽음 대신에, 자신에게 다시 찾아온 기적 같은 젊음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빛나던 젊은 시절이 비껴가고 노망 든 “노친네”, “도미닉 할배”라고 불리며 회한만 남은 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그가 언어, 사회, 가족 등 모든 제도의 기원에 대해 필생을 걸었던 미완성 책을 완성할 수 있는 시간도 기력도 지적 능력도 모두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 “사진들 하나하나 전부, 찍었던 연도와 장소가 완벽하게 기억나요. 어떤 날이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있을 정도예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그들이 한 말도, 그날 그 장소에 고유한 냄새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여기 보세요. 티볼리에 라우라와 같이 있는 사진이죠. 이 사진을 보자마자 그 아침의 열기와 올리안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동시에 뜨거운 아스팔트의 자극적인 냄새도 났어요. 우리가 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원유 통이 두 개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어요.”(p.53) 도저히 일반 과학과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기이한 현상은 신체적 재생만이 아닌 초인적인 기억 회복력, 언어 능력, 인지 능력으로까지 확대되더니 꿈속 경험과 깨어 있는 상태 사이가 교차하기기 시작하고,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인 ‘분신’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런 현상이 차츰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신(新)인류에 대한 광기를 보이던 나치 세력에 집요하게 쫓기게 되어, 그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채 유럽 전역을 방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사랑의 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 ‘베로니카’와 운명적으로 만나 이미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낀다. 그러나 그와 함께할수록 스물다섯 살의 베로니카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기 시작한다. 그가 또 다른 자신이라고 인정한 분신의 존재를 통해 실재와 허상, 꿈과 현실, 신화와 역사의 교차를 경험하게 만든 시간의 괴이한 흐름이 자신의 연인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삶과 영원한 젊음을 얻었지만 인류의 역사적 시간 안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그에게 기적처럼 찾아낸 안식처는 결국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신기루 같은 한낱 꿈이었을 뿐인가. 점점 늙어가는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괴로워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예감한 도미닉 마테이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기회가 다시 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신화적 상상력과 인간 역사의 꿈이 창조한, 두 번째 삶의 비밀 인간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보통의 경우 오래 살고 싶어 하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면 100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실재하는가? 우리 자신이 ‘분신’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가? 자연과 초자연, 신화와 역사, 꿈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신비롭게 생동하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소설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시간과 의식, 현실의 허상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자연스레 던진다. “모든 작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힘에 의해 발생하지.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경험을 겪었으면 너도 네 철학 원칙을 수정해야 하는 것 아냐.”(p.91) 이게 엄밀히 말하면 꿈은 아니지만, 미래의 문제이고, 따라서 시간의 문제이며, 시간이야말로 비현실이기 때문에, 꿈이 갖는 환영이라는 성질을 공유한다고 얘기하죠……. (p.126) 엘리아데는 도미닉 마테이의 분신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에 대해 거론하며, 영원한 젊음에 대한 문학적 환기가 초감각적 투시력을 가진 사람이나 신비술을 부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신체의 재생을 통해 회춘한 도미닉 마테이는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인류가 아직 도달할 수 없는 인식 수단을 가진 어떤 다른 시간대에 실재하는 신화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있어 먼 미래일 수도 있고, 가까운 내일일 수도 있는 “역사 종말 이후의 인간”, 혹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인류의 원형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나의 경험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들 가운데 성인, 진정한 마법사, 보살 또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다른 어떤 존재들이 있다고 말한다면 나는 믿을 것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으로 인해 보통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p.97) 핵전쟁이 터지고 나면, 서양 문명부터 시작해서 여러 문명들이 파괴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은 틀림없이 인류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염세주의의 파도를 불러 일으켜서, 비관론이 일반화되어 퍼질 것이다. 모든 생존자들이 자살의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호모 사피엔스 종보다 우월한 인류가 가능하다고 소망할 만큼 활력을 간직한 사람들의 수는 아주 적을 것이다. 그때 이 증언록이 발견되고 해독된다면, 사람들의 절망감과 멸종을 향한 보편 의지를 상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먼 미래에 태어날 인류의 정신 능력을 나타내는 한 예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로 말미암아, 이러한 문헌은 역사 종말 이후의 인간을 예견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의 실재를 증언하는 것이다.(p.117) 또한 도미닉 마테이의 분신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개자”라고 말한다. 그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신성 사이, 이성과 에로스, 여성성과 남성성, 어둠과 빛, 물질과 정신”(p.78) 사이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이런 중개자적 존재들은 “수호천사” 같은 표현으로도 통용되며 기독교 신학과 의식, 인류 역사의 신화와 전통 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 가능하다. 역사적 순환을 너머 우주적 순환 안에 있는 우리의 경험은 “장자와 나비”의 경우일 수도 있다. 경험적 현상은 한순간 사라져버릴 신기루일 수도 있다. 영원회귀의 신화 안에서 ‘영원한 젊음’을 얻음으로써 죽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도미닉 마테이는 긴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실재”는 세상 곳곳에 잠들어 있는 신화적 시간 안에서만 증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뜨면 사라져버릴 한순간의 신기루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도미닉 마테이를 통해 삶을 되묻게 된다. 그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가끔 언급하며, 우리 모두 그것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깨어난 순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는 환희를 느꼈다. 자신이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기쁨은 물론이거니와 그 기쁨을 넘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계절이 변한다는 것, 하루하루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는 기쁨, (중략) 자신이 커다란 공동체에 속해 있?, 세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폐기물과 쓰레기로 뒤덮인 공터같이 보기 싫은 것들조차 내면의 빛으로 신비롭게 빛나는 듯했다.(p.147) 애꾸눈 수학 천재에게 일어난 기묘한 시간 이야기, 세상의 멸망 혹은 인류 구원의 ‘최종 방정식’ 이 책에 실린 또 하나의 이야기는 「다얀」이다. 눈 한쪽을 다쳐 검은 안대를 하고 다녀서 이스라엘의 애꾸눈 장군 이름을 따 ‘다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한 젊은 수학 천재는 어느 날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베루스라는 묘한 노인과 마주친다. ‘아하스베루스’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잠시 쉬어가려 하자 쫓아낸 인물로 세상의 종말이 도래해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까지 죽지 않고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 기독교 성전에 등장하는 신비의 인물이다. 그 유대인 노인과 만난 후, 다얀의 멀쩡했던 눈과 다친 눈이 서로 뒤바뀌며 안대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고 다니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정부 기관마저 비밀리에 그의 뒤를 밟는다. 대학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다얀은 방랑하는 유대인과 다시 만나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의 멸망을 알려줄 “최종 방정식”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이 멸망해야만 자신의 방랑이 끝나는 노인에게는 ‘멸망’은 성스러운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최종 방정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 구원의 방정식으로도 화하는 셈이다. 다얀은 자신의 뒤를 미행하던 사람들로부터, 단지 몇 시간으로 느껴진 유대인 노인과의 만남이 실제로는 며칠 동안의 일이었으며 그동안 자신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밀경찰들로부터 취조를 받으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환상이었는지, 경험적 시간과 생리적 시간이 분리되는 경험을 통해 상황에 따라 줄었다가 늘어났다가 하는 시간의 위력을 발견한다.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세상의 신비는 여전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다른 눈으로 볼 때 익숙한 것들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들이 익숙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해 세상의 존재 원리이기도 할 “최종 방정식”은 현대 문명이 비과학적이라고 경시해 온 신화와 꿈과 초자연적인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단지 성스러운 형태에서 세속적인 형태로 변화했을 뿐이지 우리들의 일상 안에 스며들어 있다. 엘리아데는 과거에 우화와 전설을 통해서 얻었던 것처럼 세상의 신비를 자연적으로 이해하던 그때로 돌아가려면 “일상 언어 밑에 숨겨진 언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자네가 끊임없이 나한테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이 뭔지 아네. 이게 정말로 사실인지를 묻고 싶은 게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네. 다얀, 사람들이 전설을 좋아했던 옛날에는, 마술 같은 얘기를 진지하게 들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세상의 신비들을 많이 풀었었어. 우화와 전설을 듣거나 이야기해 주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배우고 발견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다네. 그렇게 해서 옛날 사람들은 나를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베루스라고 믿었네. 그리고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진짜로 받아들이는 동안은 나는 정말로 그 방랑하는 유대인이었네. 나를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닐세. 그런데 내가 사람들 곁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데는 어떤 의미가 있네. 심오하고 무시무시한 의미네. 이쪽 세상에 속한 당신들이, 기독교인이었건 유대인이었건, 회의주의자였건, 무신론자였건, 심판받는 날, 당신들은 내 이야기를 이해한 바에 따라 심판받게 될 걸세.” (pp.200~201) 이렇듯 엘리아데의 소설 속에 나오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위치를 바꾸어주며, 우리가 현실로 인식하는 사실들이 거짓일 수 있으며 오히려 비현실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이전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의미의 세계를 발견하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