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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문외한인 한 여자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한 남자의 인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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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화이트 크리스마스
시간은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지금까지 기다리며 참아온 인내심은 모두 바닥이 드러난 듯 그는 아침 내내 우리에 갇힌 짐승마냥 호텔 방 안을 초조하게 돌고 돌았다. 마침내 시간이 되자, 열린 창문을 닫기 위해 창가에 선 현준은 눈 쌓인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을 내려다보았다. 새벽녘부터 내린 눈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었다.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지 새벽 무렵에 퍼뜩 잠에서 깨어난 그는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 희미한 아침 햇살이 창가를 물들일 때까지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루하고 기나긴 기다림은 이제 끝이다. 그녀는 지금쯤 아무 것도 모르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창문에 부딪치는 눈발이 굵어질수록 심장의 고동 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어쩌면 저 아래 자동차 속 어딘가에 그녀가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조여들었다. 이윽고 창문을 닫고 나갈 채비를 끝낸 현준은 준비한 선물 상자를 들고, 호텔 방을 나섰다. ‘하고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이라니!’ 투덜거리며 아파트 현관을 나오던 해연이 무심코 고개를 들자, 찌뿌드드한 하늘을 뒤덮은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눈앞 가득 펼쳐졌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거무죽죽한 아스팔트 위에도, 뿌연 먼지가 뒤덮인 자동차의 지붕 위에도, 아파트 화단의 추레한 잔디 위에도 솜이불 같은 흰 눈이 제법 쌓여 있다. 건물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기던 해연은 발밑에서 나는 ‘뽀드득 뽀드득’ 하는 규칙적인 마찰음에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멈춰 섰다. 이리저리 어지러운 발자국을 찍으며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하얀 정적을 가르며 울려 퍼지고, 부지런한 누군가가 벌써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눈사람 하나가 아파트 길목을 지키고 서서 삐뚜름한 눈과 입술을 하고 빙긋 웃고 있다. 그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자, 해연의 마음속에 걸려 있던 뭉쳐진 응어리들이 눈처럼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만 같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지러진 동그라미를 그리며 떠오른 하얀 입김은 그녀의 들릴 듯 말 듯한 어색한 속삭임과 함께 허공으로 스르르 흩어져 버린다. 휘날리는 눈송이 하나가 치켜뜬 속눈썹 위에 걸렸다가 주르륵 미끄러지며 떨어져 내렸다.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어 코끝으로 떨어지는 눈발을 ‘후’ 불어 날리고 고개를 드는데, 하늘 사이로 걸린 길쭉한 마른 나뭇가지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올해엔 유난히도 일찌감치 옷을 벗고 바들바들 떨던 앙상한 나무줄기들도 오늘만은 넓게 펼쳐진 비틀어진 가지 위로 하얀 드레스를 걸치고 기분 좋게 웃고 서 있다. 아무래도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너무 오래 한 모양이다. 나무들이 웨딩드레스를 걸쳤다니……. 해연은 반듯한 미간을 무심코 찌푸리며 붉은 가죽장갑 한 짝을 입에 물고 다른 한 짝에 왼손을 밀어 넣었다. 눈발이 제법 굵었지만 다시 들어가서 우산을 가져올 틈이 없다. 그럴 여유는커녕 빨리 택시를 잡지 못하면 지각하고 말 것이다. 둥글둥글한 겉모습과는 달리 한 성깔 하는 걸로 소문이 자자한 미스 김의 잔소리를 아침부터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곰은 온순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영리할 뿐만 아니라 성질이 매우 사나운 동물이라 했었던가! 깔끔하지 못한 일 처리로 인해 미스 김에게 혼쭐이 나 눈물 콧물 뽑은 아르바이트생이 여럿이었다. 해연은 아무리 쏟아 부어대는 눈 때문이라고 해도, 아침부터 자존심 벅벅 구겨가며 구구절절 변명할 꼬투리만큼은 절대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일 년에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짝이 있는 연인들은 쌍쌍이 크리스마스의 흥분을 맛보기 위해 북적대는 인파에 발을 밟혀가면서도 거리로 몰려들고, 어제 이미 화끈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맛본 연인들은 아직도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워 달콤한 꿈속을 헤매며 뒹굴고 있을 것이다. 짝이 없는 외로운 솔로들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눈을 맞아가며 일터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눈먼 남녀 한 쌍이 영속적인 결합을 하는 것을 세상에 알리며, 새 출발을 위해 발맞춰 행진하는 경건한 결혼식장으로……. 마저 장갑을 손에 끼우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린 채,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건물 사이로 뛰어든 해연은 급하게 서두르느라 깜박하고 모자를 챙겨서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바람과 함께 굵은 눈발이 눈앞을 가린다. 택시를 빨리 못 잡는다면 예식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눈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다행히도 쏟아지는 눈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오는 택시가 보이자 해연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절로 목소리가 씩씩하게 나온다. “택시!” 기어오는 것만큼이나 느리게 다가와 정차하는 자동차를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교통 체증이 극심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다고 해도 택시의 지붕 아래로 뛰어들고 나자 안도감이 든 해연은 택시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몸에 붙은 눈들을 살살 털어내었다. “아저씨, 신화예식장에 가주세요.” 따라 나오려던 ‘빨리요’라는 한마디는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며 해연은 걱정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혹시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언젠가 그는 겨울을 참 좋아한다고 했었다.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그는 파란 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후, 엷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었다. “눈을 좋아하거든. 한번은 오대산으로 겨울 산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이른 새벽에 눈을 떠보니 산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온통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어. 그때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 기분은 마치 신세계를 향한 문을 처음 여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갑자기 가슴에 싸한 통증을 느끼며 해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기억을 다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눈도 참 많이 오네…….” 혼잣말을 하는데 택시 기사의 대답이 들려온다. “일기예보로는 내일까지 내린다고 하더군요.” “어머! 내일까지요?” 방에 처박혀서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 터라 미처 일기예보를 보지 못한 그녀였다. 몇 년 만에 올까 말까 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지만, 그녀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정말 최악이었다. 짝꿍이 생긴 친구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작년과 달리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함께 맞이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미안해 했다. 덕분에 홀로 방바닥을 긁으며 궁상맞은 밤을 보내게 된 해연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 신간을 두 권이나 구입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백수 생활을 목전에 앞둔 그녀는 느는 게 눈치뿐인지라 엄마의 안색을 살피며 이 눈치, 저 눈치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방바닥 신세만 지고 있는 한심한 딸의 모습을 보고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대학 졸업을 앞둔 말만 한 딸내미가 남자친구도 없이, 아니, 어머니의 바람대로라면 적당한 신랑감도 없이, 더구나 아직 변변한 직장조차도 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쯧쯧’ 혀를 차실 만한데도 어쩐 일인지 고구마까지 쪄 내오시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 것이다. 하긴 3주 전에 심한 몸살로 앓아 누운 뒤로 어머니의 태도가 좀 변하긴 한 것 같다. 그 악몽 같던 3주 전, 해연은 지독한 열병을 앓으며 일주일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