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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
2. 첫사랑 3. 취리히, 취리히 공과 대학 4. 결혼 계획 5. 일자리를 찾아서 6. 수학 교사 7. 예비 아빠 8. 개인 교수 9. 특허 사무소 10. 올림피아 아카데미 11. 특수 상대성 이론 12.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생각 13. 프라하에서 다시 취리히로 14.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 15.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 16. 위험 신호 17. 아인슈타인, 미국을 발견하다 18. 노벨상 19. 불확정성 원리 20. 축복이 된 아픔 21. 통일장 이론 22. 세계 순회 강의 23. 낙원의 아인슈타인 24. 선택의 갈림길 25. 난민 아인슈타인 26. 프린스턴에서의 새로운 삶 27. 둥지를 틀다 28. 가족 문제 29. 세계 정치의 격랑 30. 제2차 세계 대전과 핵분열 31. 폭탄을 향한 경주 32. 아인슈타인, 참전하다 33. 원자 폭탄 34. 유대 국가를 위해 35. 이스라엘의 탄생 36. FBI의 아인슈타인 사냥 37. 매카시 선풍 38. 대화와 논쟁 39. 로젠버그 사건 40. 오펜하이머 사건 41. 마지막 인터뷰 42. 아인슈타인의 유산 |
Denis 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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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주의는 뛰어난 과학자들을 계속 미치광이로 만들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신문이나 뒤적이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 미헬레 베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나치당원들을 “독일의 미치광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수학의 악귀에 쫓겨 통 쉴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수학의 악귀는 사사로운 문제를 잊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끔찍한 세상사를 잊어버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베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여전히 과학 연구로 여념이 없다는 듯 최근의 아이디어를 장황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자기 딸이라고 자처한 그 여자, 또는 여자들 얘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엘자가 몹시 아팠다는 것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유럽에 비해 미국 사회가 신분에 대한 편견이 적고, 전통의 굴레도 느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는 미국을 칭찬하면서 동시에 야유했다. 미국에서는 모두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사회주의 개혁안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도 미국에서는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금기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 언론과 불편한 관계였다. 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퍼붓고, 근사한 인용문을 뽑기 위해 답변을 왜곡하는 기자들과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로버트 스미스의 인터뷰 요청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프린스턴 캠퍼스 신문의 신입 기자로서,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하는 것이 첫 임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최근 먹물(egghead)들이 열중하고 있는 3차원 체스에 아인슈타인도 푹 빠져 있는가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이 답했다. “아냐. 난 휴식을 취할 때 내 정신에 부담이 되는 짓은 하지 않는다네.” 어떤 꼬마와 한두 번 체스를 해 보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임을 할 시간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생전 카드놀이를 해 본 적도 없었고, 모노폴리 게임이라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그는 로버트에게 설명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주 미국적인 게임이로군.”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이탈리아에 사는 누이동생 마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어렸을 때처럼, 여기서도 나는 꼼짝 않고 앉아서 하염없이 계산하며 생각을 한단다. 심오한 비밀이 드러나기만을 바라면서 말이야. 예전에 사람들이 법석을 떨었던 이른바 대우주라는 것도 이젠 관심이 시들해져서, 날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은둔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구나.” 자칭 은둔자인 아인슈타인의 은신처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의 은신처에는 아내가 있었고, 입주 비서이자 가정부가 있었고, 의붓딸이 있었고, 가끔 친척이 들렀고, 손님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렸다. 그는 주말이나 휴가 때에는 대부분 친구들, 특히 부키 일가와 함께 지냈다. 침실이나 서재에 있을 때를 빼면, 그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의 연구실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그는 원하기만 하면 찬란한 고독 속에서 연구에 파묻혀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네시 호프만과 레오폴트 인펠트라는 두 젊은이가 그와 함께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고 싶다고 제안하자, 그는 열렬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대중을 피하며 고독을 즐겼고, 불청객이 접근하면 재빨리 몸을 숨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은둔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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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은 미국 고등 교육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당시 널리 보도되어 열띤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교양 과목을 꼭 가르쳐야 한다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일반 교양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자기 회사에 채용하지 않았다. 그는 입사 지원자에게 다음과 같은 “실용”적인 질문을 했다. 로그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의 도시 커노샤는 어느 주에 있는가? 백혈구란 무엇인가? 세탁기를 가장 많이 만드는 미국 도시는 어디인가? 그레이프 너츠 시리얼의 재료는 무엇인가? 뉴욕에서 버펄로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 차동 권양기란 무엇인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얼마인가?
150개 정도의 이런 질문에 대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입사 시험을 본 수백 명 가운데 30명 남짓만이 이 시험에 통과했다. 그들 가운데 대학 졸업자는 거의 없었다. 에디슨은 이렇게 꼬집었다. “나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놀랍도록 무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는 기존 직원들도 시험을 치게 해서, 합격하지 못한 직원에게는 1주일치의 급여를 주고 해고했다. 에디슨은 에드워드 마셜 기자와의 면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반 대학 졸업자에게는 1페니도 주지 않겠다. 공과 대학 출신만이 예외이다. 그들은 라틴 어와 철학 같은 어리석은 것으로 머리를 채우지 않았다.” 맨해튼의 버클리 스쿨 교장인 B. 버클리 경은 에디슨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은 어떤 사람이 에디슨의 질문 가운데 80퍼센트를 쉽게 맞추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물론 과거에 그 시험 문제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시험 때문에 매사추세츠 주 홀리오크 출신의 한 젊은이가 미쳐 버리기까지 했다. 그 젊은이는 에디슨의 질문지에 자기 답을 적어 놓은 책을 여러 명의 남자들이 훔치려고 했다면서, 그 책이 백만 달러 가치는 나간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그가 에디슨의 질문지를 연구하다가 일시적으로 미친 거라고 판정했다. 아인슈타인은 에디슨의 여러 질문에 답해야 할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아주 태연했다. 그는 에디슨이 축음기와 각종 전기 제품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소리의 속도는 얼마인가?”라는 에디슨의 질문이 독일어로 통역되길 기다렸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이 영어로 통역되었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난 책만 뒤져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을 외우지 않거든요.” 사실에 관한 지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게 에디슨의 소신이라는 말을 들은 아인슈타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에 대해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거야 책을 보면 되니까요. 대학에서 교양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는 데 가치가 있습니다. 그건 지식이 기록된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인간이 능력을 지녔다면, 그 능력을 펼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대학 교육입니다.” --- 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