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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생활의 자세
제2호 행복한 만보 제3호 소설은 아름다워 제4호 거긴 인도였어요 해설 서영인 작가의 말 |
박금산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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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을 극복하는 방법 혹은 우울을 잊는 방식―“우아한 세계”
이 연작소설의 처음과 끝은 “제도”와 맞닿아 있다. 여기서의 제도는 경우에 따라 ‘구상(적)’일 수도 ‘추상(적)’일 수도 있다. 전태일과 문화예술위원회를 각주까지 달아가며 병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무언가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삶에 그 전부가 닿아 있는” 글쓰기, 그 삶의 진지함과 핍진함이, 그리고 그로 인한 희열과 감동이 문학을 있게 한다고 믿었던 한 시절, 혹은 한 관념이 전태일을 통해 표상된다면, 지금의 작가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문화예술위원회’라는 국가기관, 제도이다. 이때, ‘문화예술위원회’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도에는 서류와 형식만 있을 뿐 개인은 없다. 그래서 거기에 개인의 사정을 말하는 일은 무력하다. 그 사정 역시 형식과 서류를 얻지 않고는 무력하니, 제도와 개인 사이에는 온갖 오해와 불통이 쌓일 밖에. 여기에 작가가 말하는 ‘우울’의 근원이 있다. 그리고 그 우울을 인정하지 못해서, 혹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는 자주 우아해진다. 해서 그가 자주 우아해지는 것은, 혹은 우아의 포즈로 (우아한 척) 제도 앞에 서는 까닭은 그 무력함을 잊기 위한 오버액션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지원금을 받게 되었지만 뒤늦게 그 지원금이 정당하게 지급된 것인지, 이 지원금을 어떻게 하면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야’라고 말하는 방식. ‘또는 제도란 게 원래 그런 거지 뭐, 이렇게 된 거 인도나 한번 갔다 와야겠어. 충전도 하고 작품구상도 하고 말이야’라고 말하는 방식. 모두 우아하다. 그 우아함 아래에 제도를 만나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 백조의 물갈퀴가 있다. 당연히 이 ‘우아’의 수면 아래, 퍼덕거리는 물갈퀴는 너무나 우울하다. 픽션이라는 제도의 관습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거기에 몰입하기에는 너무 명징한 작가적 우울. 그래서 그는 ‘바비 힐더’에게 쉽게 감동할 수도, 인도에 가서 수많은 바비 힐더들의 삶을 확인하겠노라고 결의를 다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멜가트에 대한 그의 생각 역시 우아의 한 방식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소설가 ‘금산 씨’의 “부끄러운 용기”-바디페인팅의 기록 ‘제4호’에 이르러 ‘제1호’에서부터 끊임없이 반복, 변주되어온 소설가 ‘금산 씨’의 가장된 우아의 세계는 절정에 이른다. 멜가트의 ‘mel’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줄임말이라거나, 실은 본인이 ‘나가고 싶어서 요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자기더러 외국에 나가라고 했다거나, 인도의 멜가트를 방문함으로써 문학의 소임을 생각해보려 한다는 이 ‘허풍’ 내지는 ‘허영’이야말로 가장된 우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펼쳐 보이는 이 가장되었으나 우아한 세계는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 이를테면 인도에는 인도가 없고 멜가트에는 멜가트가 없다는 무력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 그것.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대가 여지없이 배반당하는 낯선 세계에 대한 당혹감이며 그 당혹감 끝에서 작가가 만나게 되는 것은 우아도 우울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동정도 연민도 향수도, 우울도 우아도 가능하지 않은 낯선 세계를 통해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탐구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쩌면 「바디페인팅 제2호 행복한 만보」의 한 구절이 답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발로 들어갔다가 내 발로 도망쳐나온 곳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여전히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적은 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라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은 곧 삶이라는 경구는 종종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것만이 삶이라는 식으로 오해되곤 한다. 허구의 형식 속에 들어와 그 질서를 구현하는 삶만이 문학적으로 의미 있다는 식의 해석은 그 원래 의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문학과 삶을 격리시킨다. 작가는 이 격리에 의문을 품고 문학이라는 제도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제도 속에 편입되는 일상을, 그 흐릿한 경계와 혼융에 대해 탐구한다. 그리하여 이 탐구는 스스로의 몸을 화폭으로 삼는 바디페인팅이 된다. 관객 앞에서 발가벗어야 바디페인팅은 전시될 수 있는데, 그렇게 완성된 바디페인팅은 또한 이미 한 벌의 옷이다. 일상적 몸과 예술적 작품의 경계 사이에 서 있는 이 부끄러운 용기, 그것이 작가 박금산의 문학을 밀고 나가는 가능성이 되어줄 것이다. 하여 우리는 우리의 소설가 금산 씨가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 맨발로 걸었던 그 만보(漫步)의 행로를, 전태일의 세부를 위해 쌍문동 208번지를 찾아 헤매던 그 뜬금없는 여정을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소설가 만보는 “무언가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삶에 그 전부가 닿아 있다”는 글쓰기의 다른 영역을 향한 고독한 행군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