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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소거나 눈비 섞인 궁창에서 눈물 흘리는 하마 등속이 멀고 먼 기억의 우듬지에서 얕은 숨을 뱉고 있다. 발아래엔 제 상처를 혀로 핥는 새끼가 피 흘리고 있거나 사냥감으로 잡힌 초식동물이 마지막 숨을 삼키고 있는 건지 모른다.
'늙은 마부' 백현진은 낡은 숟가락으로 식도를 긁어대는 듯한 소리로 부지불식 괴이한 적막을 이끌어낸다. 소리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란 폭우 내린 창밖 풍경처럼 실제 가시거리와는 무관한 법. 그 순간, 마음 속 풍경과 마음 밖 풍경이 핏물 콧물 눈물 빗물 뒤섞인 영혼의 비탈면에서 눈길을 맞춘다. 슬픔, 그는 눈물 날 찰나를 지나 웃음으로 일그러진 곡성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는다. 아픔, 그는 훨거워질 대로 헐거워져 되레 단단해진 육질의 상처를 툭툭, 침 뱉듯 내뱉는다.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듣는 이쪽의 혀가 축축해져 폭염에 늘어진 황소처럼 헤벌쭉 죽은 공기를 핥는다. 코가 아프고 눈이 시큰거린다. 귀가 벌름벌름 다른 세상을 향해 움직인다. 귓구멍이 나팔 되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소리를 두루 훑는다. 그렇게 참 기가 막힌 통증이 그만의 음계로 드러난다. 문득, 돼지 막창과 빼갈, 소맥에 참치 뱃살이 뒤죽박죽 놓인 술상 앞에서 돌연 무릎 꿇은 채 껄껄껄 웃고 싶어진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가 아니라, 한상에 엎질러진 체증과 오열과 막돼먹은 개그가 하도 반가워서. 아니면, 그 모든 걸 단숨에 마시고 뱉어버리는 그의 통 큰 공명통이 흠칫 이물스러워서. 사는 게 무서워서. 그래, 사람이나 짐승이나 사는 게 너무 우스워서……. "가스기기 기술교육원" 간판이 내다보이는 길모퉁이 기사식당에서 내장이 동동 떠다니는 순댓국에 소주 한잔 더 하고 싶다, 새벽 눈발을 맞으며. 글/ 강정 이 앨범에 실린 음악들을 처음 들었던 2003년 7월의 어느 밤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갑자기 넋이 나간 듯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사일만에 집에 돌아온 여자 끝내 이유를 묻지 못한 남자의 옛 사연들…." 이런 희안한 목소리로, 이런 불온한 내용의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백현진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건 뭔가? '가스 기기 기술 교육원' 같은 아무런 정서도 느껴지지 않은 단어에 초현실적인 슬픔을 실어나르는 저 목소리의 정체는, 하고 무척이나 어리둥절해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목소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기이한 서정의 힘이랄까? 어쨌든 그 특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는 그를 둘러싼, 이 도시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울컥 설움이 복받쳐서 갑자기 울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안주 없이 술을 많이 마신 날, 아스팔트 위에 맑게 쏟아놓은 도시인들의 토사물을 보는 듯 아리고 아팠다. 그게 바로 단독자 백현진의 세계였다. 일반성의 회로와 상상계의 틀 안에 작동하지 않는 자기만의 이야기와 멜로디로 아슬아슬하게 보편성을 획득하는…. 아마 이런 걸 거다. 우리 모두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부터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고독과 불안을 안고 태어났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존재 방식으로 저 마다 이 말도 안 되게 무섭고 섬뜩한 거대 문명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거다. 그로 인한 보편적인 슬픔이랄까? 백현진을 둘러싼 저토록 기이하고 불온한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보통 백현진을 두고 르네상스 맨이라고 한다. 자기만의 기이한 방식으로 음악에, 그림, 영화, 글쓰기까지 척척 해왔으니까.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내가 음악하는 백현진을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이유도 바로 그 아슬아슬하게 획득하는 보편성 때문일 거다. 쉬우면 재미가 없다. 자기만의 독단적이고 독보적인 취향과 감각으로 아슬아슬하게 획득하는 보편성. 이 라이브 앨범 또한 대체불가능한 그 단독자의 솜씨일 테지만, 이번엔 방준석과 계수정 같은 친구들이 있어 더 빛이 난다. 글/ 김경('하퍼스 바자' 편집 부장) 한 사내가 노래를 한다. 아무리 좋게 들어도 결코 노래를 잘한다고 할 수 없는 목소리, 그는 읊조리듯 노래하고 고함치듯 노래하고 울부짖듯 노래한다. 백현진, 그의 노래는 박자를 맞추고 멜로디를 따라가며 노래하는 일반적인 보컬리스트들의 노래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의 노래는 음정과 박자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 한탄과 통탄을 따라가며 토로하는 발화 그 자체이다. 노래가 있기 이전에, 그러니까 노래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노래를 구성하는 감정과 자신의 이야기 그 자체에 충실한 그의 노래는 노래를 구성하는 것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노래가 단지 기술적으로 꾸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는 노래가 가장 날 것 그 자체캷서 존재할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고 말해야 더욱 어울릴 그의 노래는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와 기타 반주 정도로만 자신의 노래를 수식하고 있다. 여백이 많은 노래의 틈새에서 연주는 대체로 한발 떨어진 위치에서 묵묵하다가 이따금씩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을 휘두를 뿐이다. 결국 거의 모든 노래의 주인공은 바로 백현진의 보컬이며 백현진의 보컬이 갸르릉 거리며 토로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악기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백현진의 보컬은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모노 드라마를 펼치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처럼 강력한 개별성과 독자성을 발휘한다. 열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원초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국내에서는 한대수나 전인권, 해외에서는 자니 캐쉬(Johnny Cash)나 닉 케이브(Nick Cave)에 비견할만큼 아우라 강한 그의 보컬은 라이브 무대의 공간과 다른 악기를 압도할만큼 막강하다. 그러나 그의 노래 속에 특별하고 독특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어부 시절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은 라이브 콘서트에서 그의 노래에는 오히려 너무나 범상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만이 가득하다. 자위, 빨래방, 막창, 섹스, 젓가락, 스포츠신문 같은 일상이 고스란히 노래로 불려지는 그의 노래는 거침없고 솔직하기 그지없는 극사실주의적 표현으로 오히려 개성적이고 아방가르드한 힘을 획득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담지하고 있는 낭만성을 모방하지 않고, 멋스러움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낭만과 서정성을 구성하는 사건들 아래 말해지지 않는 일상의 사소함과 부질없음과 무력함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백현진의 방법론은 냉정하다 못해 잔혹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와 아방가르드와 통속의 경계, 관습과 비관습의 경계까지 허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백현진의 노래에 대해 호평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다. 주로 자신의 첫 솔로 앨범 수록곡들을 불러제낀 첫 번째 라이브 앨범에서 그의 노래는 앨범보다 더 쓸쓸하고 더 영롱하며 더 거친 에너지를 발산한다. 하나같이 핍진한 노래들이지만 특히 그가 부른 옛 노래 리메이크 가운데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원작의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백현진 특유의 돌발적인 분위기로 탈바꿈시킨 라이브의 절정이다. 단지 독특해서만이 아니라 강하게 아름다워서 좋은 노래 11곡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함께 막막하고 함께 슬프고 함께 처절해진다. 이런 체험, 어디서 쉽게 하겠는가? 오늘, 백현진의 노래가 아니라면. 글/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언뜻, 머뭇, 자유 언뜻, 잠깐이다. 갑자기 멜로디는 찾아온다. 머뭇, 멜로디가 생성되는 그 해구는 매우 깊다. 그 안을 언뜻, 머뭇, 바라보면, 어지럽다. 너무 깊고, 너무 우주다. 언뜻. 뜻이 얼어 있다. 영하 55도의 체감온도 상태에서 물티슈는 고체다. 언뜻, 그런 변화들. 언뜻, 개방성, 우연, 자유, 말라르메와 꾸 드 데un coup de des(주사위던지기), 뭔지 알겠는데, 잠깐 머뭇거리자. 머뭇머뭇머뭇머뭇...잽싸게 개념화시키지 말고, 놔둬 보자. 듣자. 들어보자고. 제발. 좀. 듣자. 눈을 치우듯, 개념을 빗자루질하면 드러나는 얼어버린 발자국을 따라 가봐야지. 여백을 마련해 그 사이로 소리들이 들어오게 해야지. 알겠는데, 눈을 감고 모른 체 하는 게 우선이다. 그 동면 비슷한 외면을 통해 ‘무심함’이 김처럼 서리고, 글씨는 거기다 쓰는 거다. 창문에 서린 김 위에 낙서하듯, 글은 그런 것이다. 글을 너무 믿지 말아라. 백현진의 요즘 그림을 보니 서린 김 위에 찍힌 자국들 같더라. 마음과 머리 사이에 존재하는 0.01초의 간극, 관상동맥 어딘가에 살짝 끼워져 있는 비늘의 통로를 통해, 그 비늘이 암시하는 시간으로 내려가 보자. 어류로서의 내가 되어 보자. 어류가 되어 보자구. 그 어류들과 대화하는 늙은 어부가 되어보자구. 물고기는 측선이라는 귀를 가지고 있다. 어류는 액체 속에서 살고 사람은 기체 속에서 산다. 사람은 귀로 듣고 어류는 몸으로 듣는다. 사람은 공기의 진동을 느끼고 물고기는 물의 스침을 느낀다. 물고기의 몸-귀가 진화-분화해서 지금 우리의 동그란 귀가 되었다. 귀 속에 북이 있다. 따라 내려가면, 세월을 거슬러 아주 멀리, 수억년을 따라 내려가면, 귀 속의 북은 나의 피부에 드러나 있었다. 몸이 북이었고 몸이 귀였다. 거기까지 내려가 보자. ‘듣기’라는 행위는 사람을 늘 그 시절까지 끌고 내려간다. 고체상태의 물티슈를 다시 사용하려면 언뜻, 기다려야 한다. 깊이 내려가면 따뜻해진다. 거기까지 내려가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듣자. 듣는다. 존 케이지가 질문의 형식을 바꿔놓았다. 50년 전의 일이다. 그는 ‘너 4분 33초라는 음악 들어봤어?’라는 질문을 무력화시킨다. 아무도 그 음악을 듣지 못했으며 누구도 그 음악을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너 들었니?’라는 질문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진다. 대신 새로? 질문이 그로부터 솟아오른다. ‘너 거기 있었니?’ 너 거기 있었니? 그래. 원래의 음악의 상태로 돌아간다. 물고기가 듣던 음악은 그것이었다. 존 케이지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 마침표는 그들의 마침표. 말라르메가 백지를 노래하는 절대적 우연의 세계를 열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백지. 우리에겐 예전부터 그런 경지가 있었다. 예술은 당신의 현존을 건드리는 무엇이어 왔다. 우리에게는 말이다. 음악은 현존의 알리바이다. 백현진이 보내준 파일을 듣는다, 가 아니다. 그러면 안된다. 사실 나는 늘 듣는다, 라는 타동사를, 함께 있다, 라는 자동사로 바꾸어 놓아왔다. 그것이 내 듣기의 비밀이다. 이번에도, 그 앞에 함께 있는다. 그 소리들과 함께 있어 준다. 듀레이션을 지닌 모든 것들은 소리를 발산한다. 시간축으로 붙들린 공간의 벡터값이 소리라면, 그 소리는 시간의 지표이자 공간의 표상이다. 나는 그리로 간다. "이것은 느닷없는 2010년 11월 4일 오후의, 약 80분간의 기록이다." 백현진이 보낸 메일에 그렇게 써있다. 그렇군. 2010년 11월 4일이면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이면 조금 미묘한 날이다. 왜그런지 술이 쏠리는 날이기도 하다. 주 5일 근무제의 한반도 남쪽 직장인들에게 목요일은 예전 금요일과 예전 목요일의 중간쯤 되는 위태롭고 우발적인 어떤 충동을 자극하는 날이다. 주 5일 근무제의 한반도, 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겐 얼마만큼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자유를 사용한다. 목요일의 자유는, 누리기보다는 사용해야하는 재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건 서구도 마찬가진데, 자유라는 개념 또는 상태를 누리는 법은 차단되어 있다. 우리는 누리는 법을 모른다.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사용하는 법을 알 뿐이다. 카드 영수증이, 자유라는 재화를 사용한 비용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경전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송창식의 선운사로 공연이 시작된다. 백현진의 목소리 솔로다. 백현진이 목소리를 고르고 있다. 백현진의 머릿속에 암시된 수많은 소리들의 뭉텅이. 그것이 순간순간 짧은 프레이즈로 명멸한다. 아마도 공연 내내 그럴 것이다. 그것들을 불러들이고, 다시 딜리트하고, 불러들여진 그 소리들이 서로 반응하여 언뜻, 노래들이 되고. 방준석의 기타와 계수정의 피아노 역시 서로 불러들이고, 반응하고, 부딪히고, 찢어지며 불똥을 튀기며 증식할 것이다. 아마도 공연 내내 그럴 것이다. "어떡해야 만날 수 있나. 어떡해해야 만날 수 있나." 신음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울려퍼지며 두 번째 곡이 시작되는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울림은 다른 울림들과 교배하면서 증식할 것이다. 울림들의 증식.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공연의 시간 속을 유영하는 내 측선은 우리의 오랜 우정이 지어놓은 직경 일만 킬로미터의 공감대를 느끼고 나의 가시들은 그것을 관람하느라 한 번 쭈뼛거린다. 한 때 나도 너의 이 목소리를 반주한 적이 있었다. 나의 재즈마스터가 너의 목소리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 시간이 왠지 너무 멀어 머뭇, 언뜻, 뼈아프다. 방준석의 딜레이 먹은 액체같은 기타가 그 다음에 등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정해진 하나의 순서다. 그 순서는 그 시간 속에서 유일한 무엇이 되고 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도록 노래가 시작된 것이다. 공연이라는 것은 그 돌이킬 수 없음의 시간들을 펼쳐내는 일이고, 듣는다는 것은 그 돌이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언제부터니. 언뜻, 피아노가 들어와 있다. 계단에 앉아서 당신을 기다렸던...그 대목에서 계수정의 피아노가 아까부터의 코드다발을 벗어던져 버리고 A 프렛 음으로 존재를 알리는 구나. 들어온다고 하지 보통. 움직이기 시작한 공기가 가만히 있던 피아니스트의 측선에 전해지고 피아니스트는 헤엄치며 그 측선의 감각을 손가락으로 옮긴다. 그리고 계단에 앉아 있는 백현진의 이마 위로 A 프렛의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A 프렛의 빗방울. 기억의 바다 위로 비가 오면, 그것은 비니, 눈물이니, 뭐니. 폴 발레리는 ‘잃어버린 포도주 Le vin Perdu’라는 소네트에서 이렇게 노래했지. J'ai, quelque jour, dans 1'Ocean, (Mais je ne sais plus sous quels cieux) Jete, comme offrande au neant, Tout un peu de vin precieux... 내 어느 날, 넓은 바다에 (어느 하늘 아래에선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허무에 선사하듯, 고귀한 포도주 한 방울을 던졌네... 드넓은 소리의 바다가 있고 백현진, 방준석, 계수정, 이 세 물고기는 유영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붉은 와인을 조금씩 바친다. 그 소리의 방울들이 뚝, 뚝, 떨어진다. 떨어지기 시작한다. 당신과의 그 시간들. 당신과 나누었던 사랑. 세 물고기가 물속에 그려내는 아무 흔적 없는 그 소리의 시간들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 앞에 있다. 무릎베게에서 목구멍으로, 목구멍에서 어떤 냄새로. 어떤 냄새에서 시간은 한 번 도약한다. 가스기기 기술교육원에서 횸미를 일으키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대목에서 소리들은 급기야 진한 냄새를 풍긴다. 거기서 학수고대 했던 날, 여기까지, 한 순간을 거쳐 여름바람에 이르러서는 바람을 일으키고. 습한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모든 기억을 축축하게 적시는 최고조의 단계가 지나 오후만이 있던 일요일, 그 잔잔하고 병적인 시간이 찾아온다. 눈물 닦은 눈물, 봄의 풍경, 이 두 곡은 사운드의 내리막길을 엄청나게 프리한 속도로 하강한다. 하강의 뜨거움. 희미하게, 희미하게, 희미하게, 희미하고 강렬하게 흔들리네. 방준석의 피드백이 불을 뿜고 계수정의 양 손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어떤 물결 같은 파도 위를 때린다. 처음의 A 프렛의 빗방울이 이렇게 거세지면서, 나는 왠지 스무살 때 읽었던 폴 발레리의 그 소네트의 마지막 구절로 달려간다. Perdu ce vin, ivres les ondes! J'ai vu bondir dans l'air amer Les figures les plus profondes.... 포도주는 사라지고, 물결은 취해 일렁인다! 나는 보았네 씁쓸한 허공 속에서 가장 심오한 형상들이 파도처럼 뛰노는 것을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들. 시간은 이처럼 고조되었다가, 잦아들었다가, 언뜻, 자유롭게 흐른다. 있어야 하는, 와야 하는 것들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이탈하여 외침과 화성의 뭉치와 떨림의 덩어리로 눈덩이처럼 굴러가다가, 바람처럼 흐르다가, 다시 있어야 하는, 와야 하는 것들 사이로, 마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다시 이정표로 돌아오듯, 그렇게 흐른다. 한시간 십칠분이 그렇게 흘러준다. 나는 카페에서 두 잔의 맥스 오백을 그 사이에 비웠고 담배 세 대를 피웠으며 할 수 있는 한 무심한 상태로 그 시간과 함께 한다. 그것뿐이다. 그러면서 울컥, 수저를 놓듯, 자유의 사용법들을 놓는다. 그래. 자유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백현진의 음악이, 이 우발적으로 붙들린 시간을 함께 하는 동안 알려주는 것은 그것이다. 자유를 어떻게 누릴 것인가. 우리는 자유를 사용함 없이 누려야 한다. 어떻게 미역이 될 것인가. 미역의 모든 실루엣이 다 옳은 것이듯,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것인가.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숲을 무시할 수 없다. 숲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알아보다가, 몰라보다가, 하면서, 언뜻, 머뭇, 자유를 누린다. 물고기가 되어 나의 측선으로 소리들을 느끼며 무표정하게 백현진 실황의 바닷 속을 유영한다. 관객 모두, 그런 방식으로 그 소리를 누렸음을 느낀다. 제발, 이 소리들을 사용하지 않고 누리는 것이 이 소리들의 현존을 실감하는 유일한 길임을 느끼게 되기를, 빈다. 글/ 성기완(시인,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