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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동>
2. 불교와 한중교류 3. 중국 보타산 관음도량과 한국-조영록 4. 천태조사 보운의통과 절동불교-이영자 5. 절동불교의 전입과 번영-방조유(중) 6. 소동파와 고려-포지성(중) 7. <한중교섭과 남방항로> 8. 9~10세기, 황해를 무대로 한 한.중.일 삼국의 해상활동-이기동 9. 장보고시대의 해상활동과 교역-김문경 10. 10~11세기 한중 해상교통로-기경부(중) 11. 선진시대 중국강남지역과 한반도의 해상교통-모소?(중) 12. <황해 뗏목 학술탐사와 그 의의> 13. 황해의 지중해적 성격연구-윤명철 14. 황해 뗏목 학술탐사의 역사적 의의-김건인(중 ) |
曺永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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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가 호국의 관점에서 의천의 제자 수개일행이 입송하여 제를 지내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과 고려사 법도인 정원법사에 대해 대단히 경멸적 언사를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소동파가 몸을 바쳐 호법하겠다고 말했다는 고사는 그가 고려사에 대해 이와 같은 '빚'을 지고 있었던 관계로 사승이 날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를 통해 소동파의 호법상이 비록 명 만력년간에 고려사내에 있었지만 이것이 소동파 생전의 바램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1996년 2월 초, 항주 고려사지에서 거대한 석상이 하나 출토되었다. 필자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이 석상은 명대의 고려사 승려가 소동파에 관한 고사를 부회한 후 가람당에 세웠던 소동파의 호법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동파는 죽은 후 비록 고려사를 '호법'했지만 생전에 두번이나 항주에서 관료생활을 하면서 고려사를 방문했던 적은 없었을까? 그가 희녕4년에서 7년초까지 항주통판을 지낼 때의 혜인사는 여전히 '적락무문'의 황량한 선사에 지나지 않았다. --- p. 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