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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호세인 바쉬리예(시라쿠스 대학교 교수)
머리말: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이란을 보자 들어가며: 호메이니의 눈빛, 이란 첫 한국유학생을 끌다 *이란에 대한 상식: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1부 현대 이란의 탄생 -시아파 이슬람 왕조의 탄생 -반외세 저항운동으로서의 담배 불매 운동 -미완으로 끝난 중동 최초의 근대화 혁명 -어린 시절의 호메이니 -시아파의 영혼, 종교도시 ‘콤’ -한 성직자의 청춘 시절 -영국의 지원으로 탄생한 팔레비 왕조 *이란 종교의 두 뿌리: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2부 민중의 저항과 호메이니의 등장 -수피주의자에서 정치가로 -석유 국유화 운동과 친미 쿠데타 -팔레비의 공포정치 -저항과 투쟁의 시작 -고조되는 반왕정 투쟁 -추방당하는 호메이니 *이란화된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 3부 망명생활과 혁명의 토대 -터키에서 시작된 망명생활 -‘뱀의 소굴’ 나자프서 세운 이론 -들불처럼 번지는 반정부 투쟁 -미국이 임명한 ‘중동의 헌병’ *이슬람교 이해하기: 이슬람교와 수니파의 기원 4부 이슬람 혁명과 호메이니 -혁명의 불길은 타오르고 -호메이니, 세계의 주목을 받다 -쫓겨나는 샤 -이맘의 귀환 -여명의 10일 -집중되는 권력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 -공화국 헌법과 마르자에 타클리드 *시아파의 특징: 원리주의 강경파의 기원 5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실험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란의 문화혁명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 -자유주의 세력과 좌파 세력의 몰락 -성직자 대통령 시대 -반격에 나선 이란, 수세에 몰린 이라크 -‘삶의 열매’ 몬타제리와의 결별 -이란과 이라크, 8년 전쟁의 끝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시아파의 분류: 5이맘파, 7이맘파, 12이맘파 6부 호메이니가 떠난 자리 -이맘의 최후 -호메이니 이후의 이란 나오며: 2009년 이란 대선과 후폭풍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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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혁명의 구호는 크게 세 가지였다. 자유, 자주, 그리고 이슬람 공화국. 따라서 이슬람 혁명은 ‘반제반봉건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혁명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고 특이한 혁명이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은 아무런 배경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역사는 이 혁명을 향해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사파비조는 이란 최초의 시아파 정부였다. 이 시기에 성직자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약 1세기의 내전을 거친 다음 18세기에 카자르조가 다시 이란을 통일하게 되었다. 카자르조는 종교와 성직자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이 시기에 성직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독립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립한 성직자들은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전통과 문화로의 복귀를 의미한 운동이었고 이슬람의 가치와 이상에 토대를 둔 성직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었다. 이슬람 공화국은 독특한 정치체제로 전통적인 요소와 근대적인 요소를 결합시켰다. 공화국은 체제의 형태를 나타내고, 이슬람은 체제의 내용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교조적이고 일방적인 이슬람 정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면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 p.10
미국은 이란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개입을 시도했다.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은 모사데크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시한다. 이 작전은 CIA에 근무하는 육군 소령 케르미트 루스벨트(Kermit Roosevelt)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그는 시오도어 루스벨트 제26대 미 대통령의 손자였다. 8월 19일 자헤디(Zahedi) 장군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 민족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팔레비 왕정을 복원시켰다. --- p.97 아야톨라 보루제르디는 진정한 종교를 보존하기 위해서 샤와 협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이러한 시각이 오히려 진정한 이슬람의 가치와 정신을 훼손시킨다고 파악했다. 호메이니는 샤의 정책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자 칸의 아들이 이란에서 이슬람을 파괴하고 있다. 나는 혈관에 피가 흐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반대할 것이다.” 아야톨라 보루제르디 사망 이후 호메이니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 p.107 아침부터 호메이니의 집 앞에는 무장 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페이지예 신학교에서 개최되는 호메이니의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 앞으로 나서는 호메이니를 군인들이 막으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게 임무인 군인입니다. 당신은 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의 피를 보길 원하지 않습니다.” 호메이니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나는 호메이니가 아니다.” --- p.119 호메이니는 진정한 이슬람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이슬람 정부의 건설을 주장했다. “우리는 통일, 힘, 투쟁의 준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외국침략자에게 희생된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전제적이고 사욕에 넘친 지배자들이 이슬람의 영역을 분할했다. 무슬림의 통일과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자들이 장악한 억압정부를 타도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정의로운 이슬람 정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정부의 건설을 반제국주의, 반전제주의 투쟁으로 인식했다. 그는 외국세력과 결탁한 군주제를 대신해 이슬람법학자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h)을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은 “이슬람법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슬람법학자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호메이니는 이맘의 은폐기 동안 이슬람법학자를 이맘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그는 진정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 전까지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과도기 형태로 주장했다.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명시된 최고지도자의 지위와 역할을 통해 규정되어 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최고정책의 결정 및 집행 감독, 헌법수호위원회 이슬람법학자 임명권, 대통령 인준권 및 해임권, 군통수권, 군사령관 임명권 등이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1989년까지 호메이니가 최고지도자였고 호메이니 사후 현재는 하메네이가 이 지위에 있다. --- pp.141-142 2월 8일 운명의 신은 호메이니의 손을 들어주었다. 테헤란 부근 파라하바드(Farahabad) 공군기지에 있는 불사조 연대 소속의 전투기 100대가 레파 학교로 날아왔다. 그들은 샤의 최정예부대였다. 그들은 호메이니의 앞에 다가가서 충성을 맹세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호메이니를 보위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은 바흐티야르 정부에서 최후의 보루인 군대의 분열을 의미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이란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혁명세력의 사기는 높아져갔다. 게릴라 조직과 군중들은 경찰서와 군 병영을 공격했고 병기고도 습격했다. 마침내 바흐티야르 정부는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바흐티야르 정부는 2월 10일 오후 4시 30분부터 다음날 오후 5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호메이니가 거주하는 레파 학교 주위에는 전차 부대가 출동했다. 호메이니는 이 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통행금지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고 군대가 국민들에 대한 살상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란 전역에는 시위대의 혁명 구호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총성과 함께 전투가 벌어졌다. 긴장감이 감돈 가운데 2월 11일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1시 15분 테헤란 라디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9년 2월 11일 오전 10시 20분 군 최고위원회는 무질서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정치적인 중립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모든 병사들은 기지로 즉각 복귀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호메이니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바흐티야르도 자취를 감췄다. --- pp.181-183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선제공격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이라크는 전쟁 초기 도화선이었던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를 장악했고 곧바로 후제스탄(Khuzestan)의 주요 도시 호람샤흐르(Khoramshahr)와 아바단(Abadan)을 점령하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대부분의 서구 군사전문가들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견했다. 하지만 이 예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들을 규합해 대규모 민병대를 조직해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이에 따라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 지속되었고 양국에서 비공식 추계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이라크 30만 명, 이란 70만 명)가 발생했고 3,000억 달러 이상의 전비가 소모됐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한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637년 이라크의 카디시야에서 제2대 칼리프 우마르의 아랍군대는 페르시아의 사산조 군대와의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사산조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반면에 이란은 이 전쟁을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 명명했다. 즉, 미국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 침공을 비난하고자 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곧바로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지우고 미군의 무기가 이라크로 송달되는 것을 승인했다. --- pp.222-223 1989년 6월 3일 오후 1시 호메이니가 입원해 있던 테헤란 북부 병원으로 그의 가족들이 방문했다. 그 전날 호메이니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호메이니는 자신이 곧 신을 만날 것이라면서 특유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길이다.... 너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켜 보거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머무르고 싶은 자는 남아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가도록 해라. 불을 끄거라. 나는 자고 싶구나.” (중략) 호메이니는 병원으로 입원하기 전 가족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그것은 신의 뜻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가족들과 측근들의 통곡소리가 퍼져 나왔다. 호메이니의 사망소식은 곧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전문가회의에서 새로운 최고지도자를 선출할 때까지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6월 4일 오전 5시 30분 라디오에서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쿠란을 암송했다. 오전 7시 라디오에서는 흐느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높은 정신은 거룩한 천국으로 갔습니다. 기나긴 포악의 밤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새벽의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라디오 보도 이후 하메네이 대통령, 라프산자니 군총사령관 대리, 아르다빌리 사법부 수장, 무사비 수상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언자와 이맘 이후 이슬람 역사에서 최고의 신적인 인물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40일간 애도의 기간을 선포하면서 5대 국경일로 규정한다.” --- pp.275-276 호메이니의 사망 이후 이란의 권력구도는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다. 혁명 초기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았던 급진파로부터 보수파와 중도파로 권력 이동이 이루어졌다. 보수파의 상징인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1989년 8월 중도파의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호메이니의 사망, 이란-이라크 전쟁의 종식 및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진해 온 이슬람 좌파 그룹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최고지도자, 대법원? 및 국회 대변인을 보수파에게, 내각의 수반을 중도파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1997년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개혁파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 pp.282-283 2005년 제9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의 내부 분열을 가속화시킨 또다른 사건이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강력한 이슬람 사회를 위한 평등주의를 제기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슬람 혁명 정신을 사회정의라고 주장하면서 빈곤 타파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아흐마디네자드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구호보다는 빈부격차 해소, 부정부패와의 전쟁이라는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임금 인상, 물가 인하, 부정부패 척결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한 저소득층 가계자금 확대, 농촌 개발기금, 건강보험 확대 등을 제시했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벌어들인 부를 공평하게 나누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사회 문제는 혁명1세대인 하타미, 라프산자니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당선을 통해서 혁명1세대에서 혁명2세대로 세대교체가 나타났다. 비록 그가 보수파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그의 지지기반과 이론적 토대는 보수파와 구별되며 이를 신보수파라고 부를 수 있다. 신보수파의 지지기반은 급진적인 성직자, 군부 및 민병대이다. 신보수파의 이론적 토대는 이슬람 가치를 수호하는 보수파와는 달리 사회정의를 강조하고 있다. --- pp.284-286 이란은 중동의 자존심이다. 이란은 중동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이며 이란인들은 사실상 중동의 역사를 움직인 주역이다. 20세기 이란은 중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왔다. 1906년 입헌혁명은 중동에서 발생한 최초의 근대화 혁명이었고 중동 지역의 근대화를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51년 석유 국유화 운동은 석유 민족주의 운동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주류 이론으로 부상시킨 전환점이 되었다. 이슬람 혁명 30주년을 맞이한 이란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의 폐쇄 사회와 통제 경제를 비판하는 이란인들의 개혁 열망은 점차 증가하고 있고 이를 둘러싼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그리고 보수파와 신보수파의 갈등은 확산되고 있다. 앞으로 이란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p.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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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오늘날 국제 정치 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나라다. 이슬람 원리주의 강경파의 나라로 미국으로부터 ‘악의 축’으로 지목될 만큼 위험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찬란한 페르시아 문명에 기반하고 있고 중동 최초로 근대화 혁명(1906년 입헌혁명)을 이루었으며 ‘자유, 독립, 이슬람 공화국’을 목표로 이슬람 혁명을 일구어낸 경험이 있는 단단한 전통과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리고 바로 이 이란의 오늘을 만든 사람이 호메이니다. 한국인 첫 이란 유학생이었으며 현재 한국외대 이란어과에 재직하고 있는 유달승 교수의 안내로 격동의 이란 현대사와 그 중심에 있었던 호메이니의 삶을 살펴보자.
국제 뉴스의 단골손님, 이란 미국, 일본, 중국 등 주변 강국을 제외하고 신문 국제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 중 하나가 이란일 것이다. 최근에도 핵 협상 문제로 국제면에 오르내리더니 대규모 시위 소식으로 또 한 번 지면을 장식했다. 지난 11월 4일은 1979년에 벌어진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이 있은 지 30년이 된 날이었다. 이란과 미국은 이 사건으로 수교가 단절되어 아직도 미수교 국가로 남아 있다. 2009년의 11월에도 테헤란은 반미 구호로 가득했다. 국제 뉴스를 통해 접하는 이란의 이미지는 일견 부정적이다.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꼽힐 만큼 위험한 반미 국가, 이슬람 혁명부터 최근의 부정선거 시위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들, 이슬람 원리주의 강경파,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21세기에 성직자들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독특한 정치체제……. 한편, 이란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나라이기도 하다. 서울에 ‘테헤란로’가 있듯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이고 이란은 한국의 4대 원유공급국이다. 두바이를 거치는 수출 물량 중 40% 이상이 이란을 향하고, 해외 건설 수주 중 1/4 이상이 이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본문 17쪽 참조) 하지만 시중에서 관련서를 찾기는 쉽지 않다. 특히 오늘의 이란을 이해하는 핵심 고리가 될 호메이니에 대한 책은 전무하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서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국제정치에서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나라인 이란, 또한 경제 교류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란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교양서’가 이 책이 지향하는 바다. 저자는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란은 우리의 시각이 아닌 미국의 시각으로 보는 이란이었다”(11쪽), ‘이제 우리의 시각으로 이란을 보자’(머리말 8~17쪽)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인 이란 유학생 1호 교수가 쓴 국내 첫 이란 현대사 교양서 이 책의 저자 유달승은 한국인 이란 유학생 1호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 당시 외신을 통해 혁명 소식과 호메이니의 ‘눈빛’을 접한 후 생긴 호기심 때문에 한국외대 이란어과를 거쳐 테헤란 국립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직접 이란을 보고 느끼고 돌아온 그는 현재 국내에 거의 유일한 이란통으로 정부기관과 각종 언론매체의 자문에 바쁘다. 저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이란 현대사 관련 대중교양서인 만큼 이 책이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다가서면서도 복잡한 이란 현대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 속에서 격동의 이란 현대사를 꿰뚫는 키워드라 할 수 있는 호메이니를 통해 이란 현대사를 접근하는 방법을 찾았다. 이란 현대사를 꿰뚫는 키워드 호메이니 지난 6월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두고 이란 사회가 심한 분열을 보이고 있지만, 각 계파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호메이니의 노선을 추종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곧 오늘날의 이란 사회가 호메이니의 제안을 토대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오늘의 이란을 이해하기 위해 꼭 넘어야할 산이 호메이니다. 외세에 결탁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2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구상(3부)과 이슬람 혁명(4부),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외부 갈등과 자유주의 및 좌파 세력과의 권력 투쟁이라는 내부 갈등(5부) 등 이란 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은 모두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정치 불개입을 원칙으로 했던 앞선 성직자들과 다르게 본격적으로 정치 문제에 개입하여 민중들의 염원을 대신하다 망명길에 올랐고, 망명생활에서 정립한 이론을 바탕으로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혁명 이후 내우외환의 시기를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끈 호메이니는 이란 사람들로부터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현대 이란의 국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메이니를 통해 이란 현대사와 만나다 보면 이란에 팽배해 있는 반미 정서의 근원, 현대사회의 신정체제인 이슬람 공화국 체제의 꿆징, 페르시아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국제정치의 흐름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 이란은 아랍이 아니라 페르시아다. 이란에서는 자신들을 아랍으로 여기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에 사는 아랍어를 쓰는 사람인 반면, 이란인들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있으며 쓰는 언어도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다. 인종도 아랍인이 셈계에 속한다면 페르시아인은 인도-유럽계에 속한다. 또한 7세기에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무지(자힐리아)의 시대였던 아랍과 달리 이란에는 찬란한 페르시아의 문화가 있었다. 조로아스터교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던 페르시아제국이 이슬람의 침공으로 이슬람화가 되긴 했지만 그들은 다수파인 수니파가 아닌 소수파인 시아파를 형성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어왔다. 이란이 원리주의 강경파 국가가 된 것도 소수파로 살아남기 위해 도덕적 우월성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로아스터교에서부터 이어진 선악 이분법적 역사인식(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한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역사를 인식한다)도 강경파의 성장에 영향을 줬다. 오늘날의 이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란의 현대사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역사와 종교 전반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각 부의 사이에 부록 형식으로 이란에 대한 상식과 이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삽입해 위와 같이 오늘의 이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배경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란에 대한 상식: 이란은 아랍이 아니다(28~33쪽) -이란 종교의 두 뿌리: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80~85쪽) -이란화된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127~131쪽) -이슬람교 이해하기: 이슬람교와 수니파의 기원(154~155쪽) -시아파의 특징: 원리주의 강경파의 기원(204~206쪽) -시아파의 분류: 5이맘파, 7이맘파, 12이맘파(268~27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