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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물의 눈 / 백지 위의 유목민 / 설산 미라 아이스맨 외치(The Ice Man Oetzi) / 향초를 태우며 / 단추를 달면서 / 호두 / 담석증 진단 보고서 / 이명증 / 지렁이 타령 / 절벽의 오리나무 / 샌드위치가 쓰다 / 새끼 낙타를 그리며 / 돌의 연가 / 야행성 나무들 / 수상한 밤 제2부 산정 유감 / 싱싱한 어제 / 허수아비 영농일지 / 감자꽃 타령 / Super moon / 신공무도하가(新公無渡河歌) / ‘탕(湯)의 화(花)’ 제조법 / 자전거 보관소 풍경 / 쐐기 / 두꺼비 육아법 / 목련꽃 번데기 / 그늘의 행로 / 제비콩 덩굴탑 제3부 교차로 점경 / 둔배미 하오 / 연못 요새 / 어떤 재회 / 종로의 콘도르 / 자장가 / 멧돼지 회식의 추억 / 느티나무 공법 / 똥 퍼 장로님 / 장마를 기다리다 / 의문형 낙엽 / 물맛 / 암거래 / 미아리 사루비아꽃 제4부 비비추 / 그, 마을 / 고원의 밤 / 허가(許家)바위 / 새 문장론 / 빛과 어둠 사이 / 천사의 나팔꽃(Angel's Trumphet) / 족두리풀꽃 / 메꽃 광신녀 / 섬초롱꽃 / 겨울 청간정 / 메밀국수 / 아크로폴리스에서 / 영국사 은행나무 1 / 영국사 은행나무 2 / 영국사 은행나무 3 / 영국사 은행나무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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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의 변
여섯 번째 시집을 낸다. 시인이란 이름을 가진 후 어언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에 비하면 그리 많은 시집을 내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보면 시는 새로운 하루를 여는 방식이자 결실이었다. 나는 안개에 가려진 채 매 순간마다 다가오는 세계와 그 낯선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나 자신의 실재를 찾기 위해 시인이란 하찮은 이름을 운명처럼 지켜온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 자기 의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는 어떤 대상을 언어로 축조하여 인식하고 그 내용에 따라 대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사실은 축복이자 늘 외로움을 천형으로 앓으며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형벌이다. 언어는 기호 중에서 가장 정밀하게 발달된 것이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늘 대면해야 할 나와 세계의 진실은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언어로 끝내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불가능성 그 자체가 아닌가. 일탈의 문법을 찾아 쓴 시는 바로 그 숨은 존재의 진실을 천착함으로써 운명적으로 지워진 외로움이란 무거운 짐을 벗고 세계와 참된 만남을 이루고 자유를 누리기 위한 길이라 믿는다. 시 「돌의 연가」로 나의 이러한 비극과 고통을 고백하였다. 이 시는 내가 왜 시를 써야 하는가, 시란 나에게 무엇인가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래에 시와 함께 그 전문을 옮겨본다. 그대가 백지에 얼굴을 그려놓고 돌, 이라 이름 짓는 순간 오히려 나는 돌 속에 갇혀 까마득히 멀어질 뿐 사라지는 나를 잡으려 다시 이름을 지어 부르지만 나는 그대 잠든 사이 봉창을 두드리다 나비 무늬 얼룩만 남기고 가는 바람이거나 그대 사는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에 자욱하게 끼었다가 빈 꽃대만 남기고 해 뜨면 사라지는 물안개 끝내 그대와 나는 온전히 만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쓰고 강 언덕에 올라 서로 구겨진 손수건만 흔들고 독방에 갇힌 채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 애인의 머리칼에서 풍겨 오던 아카시아 샴푸 냄새에 취해 선잠을 자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깨어나 돌아오지 않을 애인의 발자국 소리를 헤아리고 그대는 타는 목을 적시느라 물을 다 비운 유리잔 투명한 바닥을 내 가슴이라 여기길 나는 목심을 썩히고 썩힌 고사목이 바람이 불면 들려주는 뼈 피리 소리가 그대 목소리인 줄 알고 늘 귀를 씻고 기다리겠네 꽃도 다 지고 눈이 내려 평행선을 긋던 그대와 나의 발자국을 지워주겠네 비로소 우리는 이름을 버리고 눈에 묻혀 함께 잠들겠네 ― 졸시 「돌의 연가」 「돌의 연가」는 언어 현상학이나 기호학적 인식의 방법적 회의(懷疑)를 형상한 특별한 작품이다. 시인이 주제로 삼고 있는 풍경은 ‘돌’이지만, 돌은 모든 사물적 대상을 상징한다. 곧 사물과 언어와의 기호학적 관계를 심층적으로 파고들면서, 동시에 그런 담론적 사실을 정서화하고 있는 것이다. 돌은 돌을 돌이라고 불러줄 때 돌이 된다. 이런 인식의 방법이나 담론적 회의(懷疑)는 이미 김춘수, 문덕수, 신규호 등등의 여러 시인들에 의해 나름의 방식대로 실천되어왔던 터이다. 문제는 세상은 인간의 언명에 의해 열린 기호의 공간이며, 관념의 세계인 데 있다. 그러니까 꽃이 꽃이 아니듯, 그 자체가 될 수도 없다. “그대가 백지에 얼굴을 그려놓고 돌, 이라 이름 짓는 순간 오히려 나는 돌 속에 갇혀 까마득히 멀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구조인 기표와 기의 사이는 지극히 자의적(恣意的)이며, 인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자가당착적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 기호는 대상을 근본적으로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마침내 돌을 ‘나비 무늬 얼룩만 남기고 가는 바람이거나’, ‘해 뜨면 사라지는 물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추상화시켜버린다. 그러므로 끝내 인간(언어)과 사물은 “온전히 만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쓰고 강 언덕에 올라 서로 구겨진 손수건만 흔들고 있는” 풍경인 것이다. 이름(언어)에 갇힌 돌(사물)의 풍경을 제2연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독방에 갇힌 채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로 빗대고 있다. 그리고 “……기다리겠네 꽃도 다 지고 눈이 내려 평행선을 긋던 그대와 나의 발자국을 지워주겠네//비로소 우리는 이름을 버리고 눈에 묻혀 함께 잠들겠네”라고 끝맺음으로써, 이름 부름과 불림의 주·객체가 사라진, 사물의 원형적 풍경을 설정해 보여준다. (조명제, 『시문학』, 2016년 2월호, 78~79쪽) 축복으로 주어진 언어가 “본질적으로 자가당착적인 것”이라서 “대상의 진실을 건드릴 수 없다”는 조명제 시인님의 말은 곧 언어의 불확실성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불확실한 언어를 무기로 광부가 삽과 곡괭이로 지하에 묻힌 금맥을 찾아 캐내듯이 대상의 숨은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 이미 기표와 기의 사이를 묶은 매듭을 풀고 새로운 질서를 스스로 창조하여 언어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 새로 축조한 집도 결국 언어로 지어진 것이라 온전한 진실의 거주지가 될 수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그 진실의 세계를 찾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소재를 찾고 공법을 스스로 익혀야 하는 고통을 스스로 즐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피하고 남이 말해주는 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기 일쑤였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써서 발표한 시들을 한 곳에 묶어보기로 하였다. 막상 몇 년 동안 쓴 시를 모아 다시 살펴보니 설익은 것들이 절반이라 더 묵혀두기로 하고 나머지 반을 묶어보았다. 편의상 유사한 시들을 찾아 4부로 나누었으나 그 경계를 구분하기란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시집을 내기 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웃 평론가들에게 해설을 부탁하는 게 통례인 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혹시라도 독자들의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이었다. ■ 시인의 말 그대는 타는 목을 적시느라 물을 다 비운 유리잔 투명한 바닥을 내 가슴이라 여기길 나는 목심을 썩히고 썩힌 고사목이 바람이 불면 들려주는 뼈 피리 소리가 그대 목소리인 줄 알고 늘 귀를 씻고 기다리겠네 꽃도 다 지고 눈이 내려 평행선을 긋던 그대와 나의 발자국을 지워주겠네 비로소 우리는 이름을 버리고 눈에 묻혀 함께 잠들겠네 ― 시 「돌의 연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