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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도 불행한
자유연애 Epilog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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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만 오면 어린애가 됐다. 네가 조금만 다정해도 기뻐하고, 네가 조금만 놀려도 토라지고, 너와 조금만 다퉈도 울면서.
나는 이곳에만 오면 옷을 벗었다. 그간 내가 노력해오던 것들을 모두 무가치하게 만들고, 나를 억압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유일한 유토피아. 친구가 있는 동네가 그립지 않았고, 가족이 있는 우리 집이 그립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알고 있는 그곳들은 나를 더 공허하고 외롭게 했다. 최소한의 너로 최대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곳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 p.43 그러니까 나 사실 그날 그 바다 위를 잊지 못하겠다. 어쩌면 나는 그날 네게 사랑에 빠졌고 그와 동시에 더는 이상으로 너를 사랑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날 그 낯선 감정은 마치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일정하게 일렁이다 나를 네 안에서 젖도록 내버려 두기도 했고, 거친 바람과 함께 그 속내를 비쳐 나를 혼란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 사실 그날 그 바다 위에서 황홀과 절망을 동시에 만나 너 모르게 고개 돌려 울었다. --- p.123 가끔은 헤어진 사람의 편지를 읽는다. 새벽 늦게까지 전화를 끊지 않는 나 때문에 “미안해, 아가”로 통화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 답장을 쓰고 싶어지는 밤. 사랑하고도 불행했던 시간에 종지부를 찍고자 이별해놓고 다시 다른 이를 사랑하고 불행해진다. 사랑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파멸을 흉내 낼 뿐, 결국 아무도 파멸하지 않는다. --- p.129 우리는 무더운 여름에도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손에 쥐고 산책을 즐겼지. 선풍기 조차 없는 가게에서 무제한 돈가스를 먹으면서도 우린 웃었지. 너랑은 이런 싸구려 행복도 너무 좋은데. --- p.159 제발 당신이 나를 다시 사랑의 황홀경으로 데리고 가주길 바란다. 사랑만이 전부였던 나의 신념과 가치를 당신이 다시금 깨우쳐주길 바란다. 이 시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우리의 만남이 황폐한 오늘날 전무후무한 예술적 가치로 남아주길 바란다. 최소한 그런 역사로 가는 등용문이라도 되어주길 바란다. --- p.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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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비의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고도 불행한』은 193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자유연애에 매력을 느껴 펼친 시집이다. 암울했던 사회상에도 사랑의 가치를 꽃피웠던 그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김은비만의 시체로 담아냈다. 이번 시집은 「사랑하고도 불행한」, 「자유연애」라는 큰 제목만 존재한다. 영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고도 불행하지만, 계속해서 사랑을 추구하면 충만해진다는 작가의 용감한 통찰이 돋보인다. 그리고 사랑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자유연애를 떠올리며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특별히 이번에는 무라야마 도시오의 일어 번역이 더해져 보는 재미와 깊이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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