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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월 2
완결
이서윤
저
가하
201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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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 책 소개
“결코 널 다시 놓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기대하지 마.”
기만당했다 생각했다.
운명의 장난으로 비틀린 관계는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그와 그녀의 엇갈린 시선, 마음,
그리고
마주침.
효월(曉月),
푸른 빛이 흩어진다.
2. 작가 소개
이서윤
iseoyun@daum.net
착실한 직장인에서 일탈을 꿈꾸고파 글을 시작한 소심쟁이.
꿈은 이뤄진다(夢想成眞)라는 믿음을 가진 낭만주의자.
해피엔딩이 좋아 로맨스를 쓰는 해피엔딩 마니아.
작가연합 ‘깨으른 여자들’에서 활동.
▣ 출간작
『안개 속에 숨다』, 『왈가닥 결혼하다』, 『태양의 제국』, 『프레지던트』, 『매화우』, 『비연』, 『독감』, 『해후』, 『효월』 外
3. 미리 보기
눈을 뜬 율이 제일 처음 본 것은 갈대로 엮은 실내의 높은 천장이었다. 원뿔 모양의 파루. 끝이 높고 뾰족한 천장으로 햇살이 스며들어와 가느다란 실선처럼 아래로 퍼지는 모양이 화려한 장막과 같다.
파루는 단족의 가옥으로 유하벌판의 갈대로 엮어 만든다. 성기어 바람은 잘 통하지만, 뜨거운 열기는 막아줄 수 있고, 안의 공간은 넓고 아늑하였다.
아무런 다른 살림살이가 없는 파루의 중앙 침상 위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율은 깨달았다. 실내는 그늘졌지만 낮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환하였다. 갈대로 촘촘히 엮은 천장과 벽을 뚫고 황금빛으로 쏟아지는 것은 분명 햇살. 그 줄기를 타고 더불어 황금빛 먼지가 춤추는 것을 율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길고 긴 새벽을 지난 듯했다. 깨어나고 잠들고, 또다시 깨어나길 여러 번. 깨어나면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보듬어 안았고, 그것은 기진하여 잠이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깊었던 한기와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이 기어이 견딜 수 없는 쾌감으로 번질수록, 사내와 그녀의 심장은 하나가 된 듯 거세게 뛰었고 그의 불이 그녀에게 옮겨온 듯 몸에는 온기가 돌고 이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아.
작은 한숨이 터졌다. 그녀를 녹이던, 보듬어주던 온기가 사라진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질 때면, 당장이라도 자신이 사라지기라도 할 듯 온몸을 얽어 안아 쓰다듬고 주물러주던 손길이 사라진 것이다. 단단하고 넉넉하던 사내의 품은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었던 것처럼 이미 익숙해졌다. 그 가슴에 안겨 숨을 쉬고, 까무룩 잠이 들고, 그가 건네준 약물을 받아 마신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생한 것은 그녀 안으로 들어와 들끓던 그, 천휘의 생생한 생명력. 그리고 애타던 마음.
은애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온몸으로 받은 건 그의 사랑. 사랑받고 있다. 한없이. 한 사내의 온전한 여인으로. 율은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지금 그가 없다. 새벽까지 보듬어주던 그가 없는 지금. 율은 문득 허전해졌다. 그리고 또한 긴장으로 죄어들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기도 했다. 환한 햇살 아래 천휘를 마주 볼 것이 정신이 돌아온 지금은 조금 두려워졌다. 부끄럽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를 끌어당기고 매달렸던 것이 살기 위함인지, 그를 원해서였는지, 지금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연리율. 네 마음 너도 모르지?
후, 깊은 숨을 내뱉은 후 손가락 발가락부터 시작하여 몸을 조금씩 움직이니, 사각거리는 비단의 감촉이 온몸을 감쌌다. 사락사락. 눈처럼 흰 비단 침의가 그녀의 몸에 매끄럽게 휘감겼다.
“깨어나셨습니까?”
문득 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인기척을 느낀 순간, 율의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무치인 군주로 자랐다지만, 간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떠오른 것이다. 사내가 아닌 여인으로서 다른 사내를 알아버렸다.
“전하.”
무표정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율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새삼스레 ‘전하’라 부른 시현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다. 왕의 그림자, 여시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설핏 흐려진 그녀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율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맙습니다. 이리 돌아오셔서.”
문득 율의 눈빛이 변했다. 얼른 눈물을 훔친 시현의 입가에 설핏 걸린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평생을 곁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시현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이틀 밤을 누워 계셨습니다. 오늘이 사흘째십니다.”
사흘?
율의 눈빛이 문득 흐려졌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길고 긴 하룻밤뿐이었으니, 그동안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인가. 머릿속에 잠시 혼란이 일었다.
“단족마을에 도착을 했지만, 의술을 할 수 있는 자도 손을 쓸 수 없다 물러섰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시현의 변명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건만. 율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떠오른다. 자신이 심장을 찌른 흑표, 천휘가 잡았던 손, 그와 함께 매달렸던 벼랑. 그리고 흐르던 검은 하천. 자신을 살리고자 했던 천휘의 움직임. 애타게 들리던 그의 속삭임.
“아휘 님은 지금 약재를 구하러 가셨습니다.”
마치 율이 물은 것처럼 시현은 조용히 대답하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보이지 않았구나.
실망한 눈빛을 감춘 채, 율이 조금씩 상체를 들었다. 일어나 앉으려는 그녀의 뜻을 읽고 시현이 다가서 부축하여 일어서자,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구나.”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고 망설이던 율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니 됩니다. 며칠 더 기운을 보하셔야 길을 떠날 수 있으십니다.”
“낭랑께서는……?”
“그것이……. 어제 돌아오셨지만, 낭랑께서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운기조식(運氣調息) 중이십니다.”
“많이 안 좋으신 것인가?”
“아직 아무 말씀 없으셔서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지난 며칠의 일이 마치 꿈과 같았다. 벌판에 있던 자신이 눈 감았다 뜨니 이곳이 된 것 같아 율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마치 꿈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고 싶지만, 엄연한 현실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또렷이 기억나게 했다.
“시현. 꿈을 꾸었다.”
율의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그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춘 충직한 신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림의 호수에 잠기던 그날, 내 팔을 붙들던 네 목소리를 들었다.”
원망하였다. 네까짓 것이 무어라서 과인의 뜻을 꺾느냐, 고함을 질렀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열세 살 연리율은 이리 살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웠던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시현은 모른다. 사실은 고마워서,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을수록 이대로도 좋으니, 모후의 뜻대로 움직일 테니, 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여섯 살 어린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 호수로 뛰어든 시현이 고마웠는데 소리만 질렀다.
“전하, 알고 계십니까?”
“무얼?”
“전하께서 제 앞에서 용루를 보이신 적은 단 한 번뿐이십니다.”
그때, 그날.
“여인으로 살게 해달라 하셨지요.”
그날 그랬다. 그를 살려놓은 시현에게 여인으로 살게 해달라 통곡했었지. 이리 사는 것이 어찌 사는 것이냐며 애원했었지. 어느 날이고 발각되면, 나도 죽을 것 아니냐, 원망했었지. 그러느니 내 스스로 선택을 하겠다고, 이 선택이 최선이 아니냐고……, 그리 말했다.
“하지만 아휘 님 앞에서는 많이 우셨습니다.”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의 말이 나무라거나 잘못됐다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무거워졌다. 많은 일을 겪었다지만, 그토록 나약해졌던가. 천휘의 앞에선 줄곧 눈물을 흘렸다.
“아휘 님은……. 처음부터 전하를 여인으로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전하 또한 아휘 님께는 여인이셨지요. 그리고 그분의 마음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전하 또한 알고 계실 테지요.”
“후.”
율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아. 나는 그 사내의 마음을 이용했다. 여인의 몸으로 여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사내에게 의지하였구나. 하지만……, 그것조차…….”
율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마음을 접는 것조차 이제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서글픈 눈빛이 시현을 향했다.
“내 마음이 그때와 같아, 시현. 그대에게 펑펑 울며 매달리던 그때와……. 죽었다가 깨어난 것 같아서…….”
율의 느릿하고 무거운 말에 시현의 눈빛이 더없이 가라앉았다. 여인으로 살고 싶다 하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은애하고 은애받고 싶다 하시는 것이다. 애틋함에 섞인 서글픔이 심장을 울렸다. 시현의 눈빛이 툭 꺾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 하지만 천신의 대답 또한 그때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사내이든 여인이든 제게는 상관없이 전하는 제 주군이십니다.”
여인으로 살고 싶다 하였다. 사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고, 그냥 허울 좋은 왕일 뿐이구나, 탄식하던 율에게 왕께선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된다, 시현은 그리 말하였다. 그리고 세류국의 왕 연리율은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다. 그 한 달은 왕실의 기밀이 돼 그저 와병하여 누웠다고, 세상은 알고 있었다.
파루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 침묵이 답답해질 때쯤 조심스럽게 파루의 문이 열렸다. 환하게 갠 하늘이 문틈으로 살짝 보이고, 청량한 바깥공기와 함께 훅 날아온 것은 달콤하고 짙은 꽃향.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리지만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현이 일어서자 공손히 절하며 들어온 이는 열서너 살쯤 됐을까. 자그마한 키, 하얀 얼굴에 희고 붉고 파란 색색의 색실을 넣어 머리를 땋아 늘인 단족 소녀였다. 울긋불긋 화려한 문양으로 짜인 두루마기를 입고, 정교한 화문이 수놓인 흰빛의 허리띠를 둘렀다.
“단족 의술스승의 일을 돕고 있는 아이입니다.”
시현이 소녀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곳 단족마을 촌장의 막내딸이기도 한 소녀는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영민한 아이였다. 지금도 율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아가씨가 이리 일어나셔서 너무 좋아요.”
생긋 웃던 소녀가 자신의 손에 든 꽃 화분에 코를 가져다 대고 흠뻑 꽃향기를 들이마셨다.
“내일부터 단족의 월량화절이 시작되거든요.”
단족의 풍습인 모양이다. 어쩐 일인지 아침부터 바깥이 분주하였다. 그들의 집인 파루의 안팎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손길이 바빠 보였다.
“월량화절에는 마을 곳곳과 파루마다 월량화 가지를 꽂거나 꽃나무를 놓아두는 것이 단족의 풍습이어요. 카이 님께서 월량화는 해열과 해독 작용을 하니, 이곳에도 한 그루 놓으라 하셨습니다.”
소녀가 들고 온 작은 화분에는 유백색의 꽃송이 몇 개가 소담하게 핀 꽃나무가 심겨 있었다. 비록 몇 송이임에도 은은한 향기가 진동을 한다. 꽃잎과 어울린 연푸른 잎사귀가 싱그러워 보였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카이 님께 가려던 참입니다.”
“어쩌나. 카이 님은 아휘 님과 함께 출타하셨어요.”
“아. 그러셨군요.”
시현이 화분을 받아들었다. 본인의 일이 끝났는데도 소녀는 율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앳되고 맑은 얼굴, 큰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율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이지? 어찌 부르면 되느냐?”
“지이예요, 율아 아가씨.”
궁금함이 가득인데, 율의 물음이 반가운 모양이다. 지이의 환한 얼굴 위로 웃음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동안 한 여자에게 더없이 지극정성인 사내의 정혼녀가 궁금하였는데,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기분은 좀 어떠셔요?”
“괜찮아. 꽃향기가 정말 좋아 기분도 날아갈 것 같구나.”
정말 월량화의 은은한 달콤함에 취할 것 같았다. 머릿속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월량화 숲에 꽃이 피면 향기가 천 리는 간다 해서 천리화라고도 해요. 그런데 올해는 아직 때가 일러 꽃송이가 다 피질 않았어요. 마을에서 가꾼 것만 이리 피었답니다.”
지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율아라는 여인에게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어쩌면 이리 곱고도 어여쁠까.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손짓 하나에도 고귀함이 묻어난다. 태어나 단족마을을 벗어나본 적 없는 소녀의 눈빛에 흠모가 서렸다.
“율아 아가씨!”
지이의 부름에 율이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이가 활짝 웃었다.
“오늘 월량화의 밤에 참가하지 않으시겠어요? 정혼자이신 아휘 님은 참가하고 싶으신 것 같았어요.”
정혼자? 무슨 말이냐는 듯 율의 가뭇한 시선이 시현을 향했다. 시현은 약간 당황하여 주저하다가 결국은 진실을 토해냈다.
“태원에 가시면 아가씨와 아휘 님, 곧 혼인하실 거라고…….”
천휘와 그녀의 관계를 말함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도가 없어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율도 마찬가지였다. 정혼자. 혼인할 사이……. 입 속을 맴맴 도는 단어들이 상당히 낯설었다.
“왜 그러셔요, 율아 아가씨?”
지이의 밝은 목소리가 이내 들렸다. 계속 당황하고만 있을 수 없는 율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움, 그리고 두근거림이 섞여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잘못 물은 건지 표정이 어두워지는 지이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월량화의 밤이 무엇인가 궁금해져서 그래.”
“음. 뭐라 설명 드릴까.”
율이 호기심을 가지니 신이 난 지이가 설명을 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현국에서도 변방의 소수민족인 자신들의 풍습을 이들이 이해할까, 걱정이 앞섰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량화절이 시작되는 밤의 축제예요. 축제의 주인공은 혼인을 할 수 있는 남녀고요. 참! 우리 단족은 일 년에 한 번, 월량화절에만 혼인을 할 수 있어요, 아가씨. 월량화의 밤은 혼인의 예식 중 일부랍니다. 아쉽게도 전 혼인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축제의 주인공은 되지 못해요.”
지이가 빙그레 입술을 늘여 웃었다. 황홀한 눈빛으로 율을 바라보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여러 날 앓았다지만, 율은 그녀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척한 모습이 더욱 가냘파 순수해 보여 요요한 빛을 내고 있다.
“율아 아가씨는 가장 어여쁜 신부가 되실 텐데.”
신부라는 말에 율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하고 쑥스러워 고개를 돌리는데, 지이가 두루마기의 앞주머니에서 월량화 한 송이를 꺼내들어 율의 귓가에 슬쩍 꽂았다. 불시의 손길이라 거절하지도 못한 채, 그녀의 귓가에 하얗고 단아한 월량화가 꽂혔다.
“이거 보세요, 시현 언니. 꽃만 꽂았을 뿐인데도 어쩜 이렇게 어여쁘실까.”
훌쩍 다가온 향기.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한 번도 여인의 모습이 되어 성장한 적 없지만, 지이의 제안이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꼭 참가하셔요, 아가씨. 아휘 님과 율아 아가씨는 고귀한 댁의 자제분들이시니, 태원에서 성대한 혼인식을 여시겠죠. 그것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좋은 추억이 되실 거예요. 제가 어여쁜 신부로 꾸며 드릴게요. 앗, 그럼 집에 좀 다녀와야 되는데.”
자꾸만 졸라대는 지이가 밉지 않은 것은 그녀의 말대로 추억 한 자락은 남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절도 수락도 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 그것을 수락으로 받아들인 지이가 좋아 팔짝팔짝 뛰었다.
“아. 신나요, 정말! 율아 아가씨의 모습에 모두들 정신 못 차릴걸요.”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가는 소녀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 보였다.
“괜한 짓을 했구나.”
괜스레 멋쩍어 한마디 한 것이다. 율의 혼잣말을 들은 시현이 슬쩍 일어난 미소를 지웠다.
“주군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섰다.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시현이라도 잘라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율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시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나가보겠습니다. 지이가 오기 전, 잠시라도 더 누워 계십시오.”
율은 돌아서는 시현을 붙들 수 없었다. 귀에 꽂힌 월량화의 향기가 가슴을 조근조근 울리게 했다. 지금 없는 그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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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0장.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장. 낙원
12장. 붉은 바람
13장. 잿빛, 폐허
14장. 기로
15장. 비틀린 운명
16장. 비련悲戀
17장. 애련哀戀
18장. 귀환, 을유의 가을
19장. 천애天愛
끝내는 이야기
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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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2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370쪽 | 386g | 128*188*30mm
ISBN13
9788993883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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