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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책의 저자입니다.
2018-06-17
지성사대는 대외용 위장(僞裝)이었다
1443년 12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관료들은 그것이 지극히 신묘하다고 칭송하면서도, ‘언문(諺文)’으로 낮잡아 호칭하며, 정음 창제가 사대 모화에 위반되고, 문명국인 명나라를 섬기고 있는 현실에 반한다고 압박을 가했다.(세종 26년/2/20) 그런데 이와 같이 거의 협박에 가까운 불손과 억지를 접한 세종은 놀랍게도 미세한 흔들림도 보이질 않았다. 틈만 나면 습관처럼 명나라에 대한 지성사대를 강조하던 모습 대신, 철저한 묵살과 외면으로 상소를 일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냉소와 강경으로 일관하였다. 신하들의 반대의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신을 비난하는 말까지도 귀담아 들었던 평소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상소문을 읽어본 세종은 일곱 명을 어전으로 불러서, ‘이두가 그러하듯이, 훈민정음도 백성을 편리하게 할 것이라.’고 알아듣게 타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리 등이 마치 대들 듯이 변명을 둘러대자, 세종은 일곱 명 전원을 옥에 가뒀다. 그날의 이와 같이 심각했던 분위기는, ‘명나라에 대한 세종의 지성사대가 대외용 위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상소에 대한 세종의 유례없는 냉담과 완강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나 성리학 발전보다 백성의 살아가는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세종은 골수까지 자주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은 경연에 나아가 강독을 하다가 성리학을 창시한 주자가 옛말의 잘못을 바로잡은 대목에 이르러 말하기를, “문공은 진실로 후세 사람으로서는 비판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은 말에 간혹 의심나는 곳이 있고 그 자신이 한 말 중에도 의심나는 곳이 더러 있다. 주자의 문인이면서도 스승의 말을 취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 것을 보면, 비록 주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세종 19년/10/23) 천문 연구를 비밀리에 추진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도 세종의 자주정신을 입증하는 사례로 꼽을 만하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이 하늘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황제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천문을 연구한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보위와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세종은 황제의 응징과 보복을 겁내지 않고 과감하게 연구를 진행시켜 명나라의 수준을 능가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