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작가 서문
1. 해를 쏜 소년 2. 400년 전 편지 3.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 4. 여자의 아침 5. 불면 6. 중독자들 부 록 1. 알면 더 가까워지는 선욱현 55배 즐기기 - 최원종 2. 2011년 최신판 선욱현 사전 - 차근호 3. 작가 연보 |
|
[해를 쏜 소년] 중에서
오영신고보 시절부터 난 신성 동요회 회원이었어. 동요회 선생님들과 친분이 있던 윤일남 부장님을 그때 우연히 알게 됐지. 그 분이 언젠가 사석에서 선생님들과 이 단파방송 얘기를 하시는 거야. 순간 난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몰라. 미국의 소리, VOA 단파방송 얘기를 듣던 날, 그날 밤, 난 잠을 이루지 못했어. 식은땀까지 흘리며 사시나무 떨 듯 공포에 휩싸였어. 왠 줄 알아? 그것은 내가 배웠던,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아니었거든. 너무 낯설었고 너무 무서웠어. 그 충격, 알겠어? 조선이 독립된다는 그 얘기를 듣고, 난 기뻤던 게 아니라, 무서워했다구! 무서웠어! 구로다일본이 패망한다고? 오영신(조심스럽게) 그래야지 않니? 내 말이 틀렸어? 연합국 수뇌들도 카이로에서 그런 선언을 했대. 우리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 시켜야 한다고. 구로다사대주의 근성이야. 그들이 우리를 독립시켜 주길 바라는 거야? 오영신그럼 우린 계속 일본인으로 살아야 하니? 이렇게 조선말을 하면서? 구로다일본이 항복을 한다? 죽었던 조선이 다시 독립을 하구? (사이) 그럼 난? 오영신뭐? 구로다(쓴 웃음) 그럼 구로다 겐시로, 나는 뭐야? 오영신… 민규야. 어려서부터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알지? 커서 널 또 만났지만 지금도 나 그래. 민규 너를 미워할 수 없어. 구로다(오영신을 본다) 지금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오영신뭐라구? 구로다니 말대로라면 난? (사이) 수많은 친구들에게 나와 함께 전장터로 나가 영광스럽게 죽자고 한 나, 조민규가 아니라, 이 구로다 겐시로는 뭐가 되고? 일본이 망한다고? 그럴 수 없어. 또 그래서도 안 돼! 나를 위해서! 넌 사대주의에 젖어서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거야. 이제 곧 전장터로 나갈 내게 뭐? 일본이 곧 망한다고? 그런 얘기할 거라면 우리 다시 만나지 말자. (의미 있게) 아니! 어차피 우린 다시 만날 수도 없을 거야. 오영신민규야… 널 이렇게 보낼 순 없어. 구로다왜?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을텐데? 오영신날 봐. 조민규…! 구로다(돌아선다) 조민규는 죽었고 또 구로다 겐시로도 머지않아 죽을 거야. 하지만 달라.(사이) 조민규는 나라 때문에 죽었지만, 구로다 겐시로는 나라를 위해 죽는다. (나간다) 텅 빈 무대에 오영신만이 덩그라이 남았다. 오영신내가 정말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 거니? (주변엔 아무도 없다) (중략) ---본문 중에서 |
|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은 그동안 선욱현을 규정짓던 [풍자희극]의 계보에서 살짝 벗어난 작품들이 눈에 띈다. 초기 작품들인 까닭에도 그렇고 최근작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소재를 다루고 있음이 새롭다. 그동안 선욱현은 현대의 다양한 사건들을 소재로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작품집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인간 실존의 고민을 담아낸다던가 (중독자들), 이십대 후반 청춘들의 사랑과 번민(불면), 가정주부의 수다로 듣는 사랑과 결혼, 여성, 엄마 이야기(여자의 아침) 등 다채롭다. 특히 [중독자들]은 선욱현의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다소 길고 추상적인 대사들이 최근의 속도감있는 전개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선욱현의 기본적인 정서와 문학의 시원을 더듬어보는데는 좋은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불면], [여자의 아침] 또한 선욱현이 썼나 할 정도로 느낌이 다른 작품이지만, 작가가 서문에 밝혔듯이 선욱현의 정체성을 가름하는데는 나름 참고가 되는 소중한 초기 작품들이라 하겠다. 또 역사적 소재를 다룬 세 작품도 눈에 띈다. [400년 전 편지]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기존에 알려진 단짝 친구로 개구쟁이지만 삶의 지혜를 전달해주는 식의 동화가 아니라, 그들이 나라의 재상으로서 임진왜란을 겪은 고민과 우리 민족에게 던지는 과제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타임머신을 탄 청년 ‘정충신’이 미래로부터 와서 현대 여주인공 ‘미라’를 데리고 과거 오성과 한음의 시대로 여행을 가는 과감한 파격을 농담처럼 다룬다. 그리고 그들은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곁에서 그 고민을 목도하게 된다. 결국 오성 이항복이 우리 민족에게 보내는 편지(400년 전 편지)를 통해 우리 민족이 진정 부강하기 위해서 어떤 고민과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정극인의 상춘곡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 안빈낙도의 전형적인 시로 잘 알려져있다. 선욱현은 정극인의 생애에 적절한 픽션을 가미하여 수양대군의 반란을 전후로 세 친구의 입신양명과 우정과 배신, 사랑까지 적절히 섞어 왜 정극인이 한양 땅을 버리고 결국 낙향하여 진정한 도를 꿈꾸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아주 현실감있는 전개가 일품이라 하겠다. 그리고 [400년 전 편지], [상춘곡]은 우리 전통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가무극의 형태를 띠고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해를 쏜 소년]은 1943년 실존했던 경성방송국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오영신’이라는 여성아나운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일제 말기, 그들의 패악이 극에 달햇을 시점에 동요극을 통해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전달하려 했고 우여곡절 끝에 방송이 저지되는 비극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방식을 쓰고 있다. 그만큼 선욱현은 항상 현실을 져버리지 않는 극 구조와 내용을 고집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그 속에서 현재를 꼬집고 진단하는 방식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하겠다. 작가의 바램처럼, 이 세 번째 작품집은 그동안 출간된 두 희곡집까지 포함하여 등단 17년차를 맞는 극작가 선욱현의 정체성이 정리되고, 이후 작가의 방향성에 대한 비판과 연구의 자료로 십분 활용되는 책이라 하겠다. 그는 오늘의 현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현실에 절망하며 때론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절대 현실을 놓지 않는다. 붙잡고 관객을 향해 묻는다. 희망이 없냐고. 정말 희망을 찾을 순 없는 거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