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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3.11
대지진과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를 사유한다
그린비 20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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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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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아 총서

책소개

목차

옮긴이 서문 / ‘멀다’와 ‘가깝다’ 사이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_ 사사키 아타루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_ 쓰루미 슌스케
지금부터 인류는 위험한 다리를 터벅터벅 건넌다 _ 요시모토 다카아키
전쟁으로부터, 고베로부터 _ 나카이 히사오
인간은 이미 기술을 어찌할 수 없는가? _ 기다 겐
두 가지 신화와 무상전략 _ 야마오리 데쓰오
미래로부터의 기습 _ 가토 노리히로
시작도 끝도 없다 _ 다지마 마사키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_ 모리 이치로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 있고 때론 생각하는 편이 좋은 것도 있다 _ 다테이와 신야
사건의 때 _ 고이즈미 요시유키
자연은 당연히 난폭하다 _ 히가키 다쓰야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_ 이케다 유이치
노동?-?생의 경계와 마주하여 _ 도모쓰네 쓰토무
중간 휴지와 취약함의 규모 _ 에가와 다카오
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_ 고소 이와사부로
원전에서 봉기로 _ 히로세 준
반원전의 증표 _ 『도래해야 할 봉기』 번역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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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저자 소개

저자 : 사사키 아타루
1973년 생. 철학자·작가. 현대사상과 이론종교학에 기반해 문필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저서로는 『야전과 영원』, 『잘라내라, 저 빌고 있는 손을』 등이 있다.
저자 : 쓰루미 슌스케
1922년 생. 사상비평가. 『사상의 과학』 창간을 주도했으며 아카데미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대중문화를 관찰하며 일본적 사고방식을 해부하고 있다. 저서로 『추억 봉투』, 『불령 노인』 등이 있다.
저자 : 요시모토 다카아키
1924년 생. 사상비평가. 문학, 서브컬처, 정치, 사회, 종교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평론활동에 나서고 있다. 저서로 『심리적 현상론.본론』, 『빈곤과 사상』 등이 있다.
저자 : 나카이 히사오
1934년 생. 정신병리학자. 한신대지진 이후 설립된 효고현립 ‘고코로케어센터’의 초대소장으로 일했다. 현재는 효고피해자지원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재해가 정말로 덮쳤을 때』, 『부흥의 길 한복판에서』 등이 있다.
저자 : 기다 겐
1929년 생.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연구하고 있다. 메를로퐁티 등 현대서양철학의 주요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저서로 『우연성과 운명』, 『반철학 입문』 등이 있다.
저자 : 야마오리 데쓰오
1931년 생. 종교학자. 종교사와 일본사상사를 전공하고 있다. 다신교적 종교가 일신교적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저서로 『내가 죽음에 대해 말한다면』, 『신란을 읽는다』 등이 있다.
저자 : 가토 노리히로
1948년 생. 평론가. 현대철학과 현대문학에 기반해 일본사상계의 쟁점들에 관해 폭넓게 발언하고 있다. 1997년 출간한 『패전후론』은 일본사상계에서 역사주체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저서로 『패전후론』, 『잘 가세요, 고질라들』 등이 있다.
저자 : 다지마 마사키
1950년 생. 철학자. 언어철학에 기반해 형이상학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근대의 정치철학과 예술을 연구하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끌어와 연구활동에 나서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철학』, 『신학?정치론』 등이 있다.
저자 : 모리 이치로
1962년 생. 철학자. 철학자. 후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니체와 아렌트를 참조해 근대성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 『죽음과 탄생』 등이 있다.
저자 : 다테이와 신야
1960년생. 사회학자. 복지사회학회, 일본생명윤리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만 삶』, 『좋은 죽음』 등이 있다.
저자 : 고이즈미 요시유키
1954년 생. 철학자. 주로 데카르트, 들뢰즈, 레비나스를 연구하고 있다. 만화와 서브컬처에 대한 평론도 작성하고 있다. 저서로 『윤리』, 『병의 철학』, 『생식의 철학』 등이 있다.
저자 : 히가키 다쓰야
1964년 생. 철학자. 프랑스와 독일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아울러 자아론, 생명론, 언어론 등 현대사회의 철학적 과제를 탐색하고 있다. 저서로 『순간과 영원』, 『푸코 강의』 등이 있다.
저자 : 이케다 유이치
1969년 생. 평론가. 소설비평 이외에도 칸트에 관한 독자적인 독해에 근거해 도덕의 근거를 되묻는 작업에 나선 바 있다. 저서로 『칸트의 철학』이 있다.
저자 : 도모쓰네 쓰토무
1964년 생. 역사학자. 일본근대사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전후의 피차별 부락민 운동사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탈구성적 반란』, 『시원과 반복』이 있다.
저자 : 에가와 다카오
1958년 생. 철학자. 서양근현대철학과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를 경유해 반도덕주의 철학을 재구성하고 있다. 저서로 『죽음의 철학』, 『존재와 차이』 등이 있다.
저자 : 고소 이와사부로
1955년 생. 아나키스트. 미국에 거주하면서 도시 공간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새로운 아나티즘의 계보학』, 『죽어가는 도시 회귀하는 거리』 등이 있다.
저자 : 히로세 준
1971년 생. 영화평론가. 현재 프랑스에 체류하며 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영화비평지 VERTIGO 편집위원이며 스트로브-위예, 사카모토 준지 등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다. 저서로 『씨네 캐피탈』, 『전투의 최소회로』 등이 있다.
역자 : 윤여일
‘수유+너머 R’ 연구원. 동아시아 사상사를 공부하고 있다.
역자 : 『도래해야 할 봉기』 번역 위원회
『도래해야 할 봉기』(L’insurrection qui vient)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사막과 오아시스」, 「소문의 범람은 이미 혁명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등의 논고를 발표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3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11g | 153*224*20mm
ISBN13
9788976823748

책 속으로

실로 어려운 대목입니다. “말해”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망자와 이재민을 ‘이용’하지도 않고, 그런데도 이 사태에 관해 진지하게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면 말이죠. 거의 줄타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느 작가가 제게 다소 침통한 내용의 글을 보내 왔습니다. 즉, 이 사건조차 옴진리교 사건처럼 2, 3년 동안 문학, 사상, 비평에서 ‘소재’로 소비되고 그대로 잊혀지지는 않을까라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들뢰즈가 비난했듯이 “이용”하고 “시체를 먹는” 사람들은 또 등장하겠죠. 예를 들어 지진 재해를 화젯거리로 삼은 소설이 차례차례 출판되거나 ‘9.11에서 3.11로’ 등을 제목으로 뽑은 사상, 비평의 게임이 전개되겠죠. “자, 축제다. 일대 이벤트, 게임의 시작이다. 소재는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 사고다. 누구 머리가 제일 좋은가?”라고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중에서

전력 업계는 지역 독점 기업인데도 텔레비전 업계에 거액의 광고료를 뿌려 여론을 조직적?전략적으로 유도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전 사업에 반하는 이견을 봉하는 데는 광고를 끊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원전을 반대하는 의견은 조직적으로 밀려난다. 일단 그런 흐름이 만들어지면 구태여 개개인을 매수하러 나설 필요는 없다. 원전 정책이 일을 만들어 내고, 따라서 조직과 직장을 만들어 내고, 많은 낙하산 인사, 연구기관, 심의회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조직과 인원은 서로를 보증하고 뒷받침하고 인가하고 익찬한다. 개중에는 돈에 눈이 멀어 먼저 나서는 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저차원의 관심’에서 움직이는 경우는 예외적일 것이다. 대개는 시대의 물결에 올라타서 옮겨 가는 것일 뿐이고, 오랜 세월의 친분과 신사적 교제가 있어서 임원이 되는 걸 뿌리치지 못한 것일 뿐이고, 자리에 이름을 올린 것일 뿐이리라. 부러 이기적인 짓을 할 작정도 없고, 그런 습관이 있는 자들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의견과 반대 입장의 목소리를 도통 알아듣지 못하니 식견이 좁고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은 면키 어렵다. 그리고 그게 이단을 꺼리고 대립을 배제하고 원만히 화합해 나가자는 익찬체제의 본질이다. --- 「시작도 끝도 없다」 중에서

지키고 전해야 할 사물을 돌보는 것이 곧 세계를 사랑하는 수업인 것이다. 반면 후대에게 남겨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언제까지고 끈질기게 남아 있는 사물도 있으니 그런 것은 늘리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한번 불붙으면 다음 세대에도 피어올라 언제 어느 때에 다시 타오를지 모를 복수심에,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골치를 썩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용서의 기적을 바라는 심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수만 년이 지나야 겨우 반감기로 들어가는 방사성 물질은 일단 제조되면 돌이킬 수 없으며 반영구적으로 저주를 뿌린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당사자가 범한 잘못뿐이다. 세계를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눈앞의 편리나 이익에 이끌려 핵연료 쓰레기를 세계에 부지런히 쌓아 가는 21세기의 원자력 주민 -별칭 지구 시민- 의 비도를 미래의 인류는 결코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중에서


경제권력은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를 가장 괜찮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최선의 제도라고 믿도록 만드는 역할도 경제권력이 갖고 있는 임무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경제권력은 이제 국가·정치권력이 형성·유지·확장될 수 있도록 돕는 일등공신입니다. 어찌 보면 국가·정치권력의 유지와 확장은 곧 경제권력의 무한팽창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 p.54

국가·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작당모의해서 자행하는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통속이 된 트로이카 권력은 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요창출된 부를 되도록 많이 가져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적게 나눠주고 모은 돈을 그들이 적당히 나눠 갖고 있습니다. 트로이카 권력 사이에 벌어지는 암투와 갈등은 싹쓸이한 부를 나눠 갖는 과정에서 “왜 내 몫은 이렇게 적냐”는 불만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p.67

나꼼수의 등장과 열풍은 스마트 권력의 가능성과 문제점을 동시에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치 무관심 세대로 치부되던 10~30대의 놀라운 정치적 집중력과 특유의 무한확장성을 일깨웠습니다. 자신의 요구와 입장을 대변하는 채널을 발견하자 정치 무관심 세대는 응집력 있는 정치집단의 초기 형태를 보였습니다. 나꼼수가 새로운 정치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분명 스마트 권력이 껍데기를 벗고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펼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으로 예고합니다. 반면 나꼼수의 한계는 스마트 권력이 한사코 배제해야 할 한계와 오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엄숙함에 똥침을 놓겠다”는 재치는 유연하고 신선하고 확장성을 갖춘 접근이지만 국가·정치·경제권력의 거대한 힘에 도전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자각을 넘어 실제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엄숙함과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 pp.120~121

이처럼 스마트 권력의 확산으로 기존 권력 주체들은 크게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글로벌 현상입니다. 노마드 권력이자 반권력인 스마트 권력은 끊임없이 팽창하며 전 세계 기존 권력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 권력이 순순히 스마트 권력의 요구에 굴복할까요 엄청난 기득권과 통제수단과 힘을 갖고 있는 기존 권력이 그럴 리 없습니다. 낯설고 강한 놈이 등장해 당황했지만 곧 특유의 적응력과 통제력을 발휘하려 할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양보하고 타협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스마트 권력을 길들이고 통제해 그 힘을 약화시키려 할 것입니다. 스마트 권력이 더욱 확산되기 전에 그래야 할 것입니다. 스마트 권력은 등장 초기부터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p.170

일단 스마트 정당이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하면 스마트 권력은 기존보다 더욱 빠른 속도와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스마트 정보, 스마트 의지, 스마트 집단지성, 스마트 정당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인류, 스마트 인류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 p.226

출판사 리뷰

여성주의는 왜 다시 ‘민족’을 사유해야 하는가?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정치’를 말한다!!


민족이냐, 여성이냐. 이는 2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과 함께 싸워 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줄곧 맞닥뜨려 왔던 문제다. 한편에선 여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문제라고 언성을 높였고, 또 다른 한편에선 민족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폭넓은 여성들 간의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젠더’와 ‘민족’이란 키워드는 많은 이들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자리 잡아 갔다. 얼마 전 광복회와 순국선열유족회 등의 조직이 ‘독립운동을 폄하시키고, 순국선열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를 들어 서대문 독립공원 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을 반대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불편한 문제는 또 다시 우리 앞에 출현했다. 이 사건은 여성이 민족으로서 존재하되, 민족의 주변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에게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민족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모든 여성은 연대할 수 있는가. 한국 재벌 가문에서 태어나 대기업 임원직을 맡고 있는 여성 A, 필리핀에서 태어났지만 현재 미국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수입의 상당 부분을 필리핀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는 여성 B, 이슬람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엄혹한 근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여성 C, 평화 운동가인 여성 D와 군 고위급 장교인 여성 E.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성들……. 이들은 공통의 지점을 통해 연대할 수 있는, ‘같은’ 여성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책 젠더와 민족(Gender and Nation)은 ‘젠더’와 ‘민족’의 문제가 교차되면서 각각의 위계 관계를 강화시키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리고 동시에 인종, 계급, 직업 등 다양한 사회적 분할이 서로를 강화시키며 여성들 간의 위계를 구성하는 방식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은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개별 민족의 담론 안에서 억압과 통제를 견뎌야 하는 상황과, 민족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많은 분할들에 따라 차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 상황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여성들 간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니라 유발-데이비스(Nira Yuval-Davis)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다양한 정체성들을 가로질러 여성들이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 방안으로서 ‘횡단의 정치’(transversal politics)를 주창한다. 젠더와 민족은 ‘횡단의 정치’라는 개념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대표 저서이다.
‘횡단의 정치’는 특정 성, 인종, 민족 등의 정체성을 앞세워 배타적인 권익을 주장하는 ‘정체성의 정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정체성의 차이를 토대로 하면서도 동시에 타자를 배제하거나 위계를 구성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페미니즘 정치학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 다양한 소수자 정치학에 많은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상적이고 무비판적인 연대의 함정이나 연대의 불가능을 점치는 회의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접합 지점에서 서로 연대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민족 안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여성으로서 나는 조국이 없다. 여성의 조국은 세계다. ― 버지니아 울프


다양한 사회에서 정치가들은 여성에게 ‘민족/국민의 재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해 왔다. 민족과 국가를 존속시키고 이 경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정 수 이상의 구성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재생산’에 인구 재생산만이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다른 집단과 구별시켜 줄 전통 문화를 후대에 전수해 줄 사람도 필요했다. 여기서도 여성은 민족 문화를 재생산하고 재현하는 몸으로 여겨졌다.

국민의 재생산자로서의 여성
상당수의 민족 집단체, 그리고 민족국가들은 ‘순수혈통’이라는 신화에 기반하여 그 경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신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인구의 재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책의 2장은 민족/국민의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통제되고 억압받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재생산자로서의 여성은 민족 집단체 밖의 다른 종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며, 피임이나 낙태와 관련한 일체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은 역사적으로 특히 소수인종, 소수민족, 제3세계 여성들에게 더 많이 가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같은 사례에는 나치의 우생학적 인구정책뿐 아니라, 미국에서 흑인 공동체에게 시행한 피임(불임)장려 정책도 포함된다. 한편 민족/국가 간 전쟁 중에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집단강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타민족의 ‘순수혈통’을 오염시킨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민족 문화의 재현체로서의 여성
민족 집단체를 외부 집단으로부터 구분시켜 주는 문화적 경계를 구축함에 있어서, 젠더 상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사회 안에서 남성성/여성성이라고 구성되어 온 것들을 공고히 지키는 것이 바로 전통이고 민족 고유의 문화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3장은 상징적 ‘경계 수비대’이며 집단 문화의 재현체로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다룬다. 지금도 종종 제3세계 민족 집단체 안에서 행해지는 ‘명예살인’과 같은 행위는 여성을 민족의 전통과 명예 수호자로서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전통’에서 벗어난 행동은 곧 민족(가족/친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간주되었고, 그로 인한 폭력들은 집단체 안에서 손쉽게 정당화되곤 했다.

저자는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민족의 경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은 여성들이 대체로 남성에 비해 강압적인 정책과 폭력에 취약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동일한 민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예컨대 혼종들), 그리고 집단 외부의 수많은 타자들 역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취약한 위치에 처해 있음을 밝힌다.

여성은 완전한 시민/국민일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난다고 했으면서도, 모든 여성이 노예로 태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메리 아스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마도 세계의 소수 국가들에서, 적극적 시민권의 지위를 지니게 된다.
― 니라 유발-데이비스

루소는 일찍이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나며, 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국가(사회)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시민 개념은 애초부터 ‘남성’을 상정하고 있으며, 여성, 이방인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루소의 이론 외에도 많은 보편적 시민권 담론은 이처럼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인종, 민족, 계급들이 교차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은 더더욱 뜨거운 주제가 되어 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같은 물리적 영토 안에 살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똑같이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시민권은 성, 인종, 출신민족, 재산의 많고 적음 등 다양한 조건들에 따라 달리 주어진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시민/국민’이라는 보편적 시민권 담론의 환상은 이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은폐한다. 아직까지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불완전한 시민권을 구성하고 있는 제3세계 여성들,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시민권을 보장받고 있지만 병역 등에 있어서 여전히 수동적인 시민권을 구성하고 있는 제1세계 여성들, 시민권은커녕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의 결혼 이주민 여성들, 취약한 이주노동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소수인종과 소수민족의 구성원들……. 보편적 시민권 담론의 환상은 이러한 차이들이 표면화되었을 때, 비로소 해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공공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 시장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적극적인’ 시민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들은 더더욱 극소수밖에 남지 않았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시민의 지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받는 혜택은 점차 줄었다는 이야기다(루스 리스터의 말마따나 “가난하다는 것은 조건부 시민권을 참아내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사회의 주변부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으며, 남성들보다는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타자들의 취약성이 더욱 심화되었다. 저자는 전 지구적인 추세이기도 한 이러한 시민권 양상의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으며, 지구적 위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한다.
‘여성은 완전한 시민/국민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거의) 모든 여성은 완전한 시민/국민일 수 없다’라는 절망적인 대답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국민의 재생산자, 민족 문화의 재현체로서 여성은 민족과 국가 담론의 중심에 늘 서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온전한 시민/국민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성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일 수 없는 것일까? 관점을 바꾸어 민족과 국가 담론 바깥에서 사유를 한다면 여성들은 오히려 더 많은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품게 될 물음 또한 이렇게 바뀔 것이다.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완전한 시민일 수 없는 여성들, 그리고 주변부 타자들 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차이와 경계를 가로질러 연대하라 ― ‘횡단의 정치’

저자는 다양한 상황 속에 처한 타자들 간의 연대를 위한 방안으로 ‘횡단의 정치’를 제안한다. 횡단의 정치를 위해서는 우선 민족, 국가의 담론 안에서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타자들이 취약한 위치에 놓쿀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는 오히려 차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평등, 동일함’이라는 신화를 걷어 냈을 때, 민족 담론하에서 은폐되었던 각기 다른 어려움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비로소 ‘차이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연대의 지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제3세계 여성들이 놓인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계몽’의 의지만을 앞세웠던 제1세계 페미니스트들과 제3세계 페미니스트들 간의 갈등을 기억하고 이를 경계한다. 그리고 제3세계 안에서도 소수의 엘리트 여성들이 그 집단의 모든 여성을 대표(representation)하는 것 역시 경계한다. 하나의 강력한 목소리가 다양한 목소리들을 억압하고 은폐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소리나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성. 이를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주된 방법은 다름 아닌 ‘대화’이다.

횡단의 대화는 정착과 이동의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즉,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면서 대화상대자의 다른 입장에 감정이입하고, 이로써 참여자들은 헤게모니의 좁은 시야와는 다른 관점에 도달할 수 있다. 대화의 경계는 전달자가 아닌 전달 내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대화의 결과는 여전히 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과 집단들을 위한 다른 기획이 될 수도 있다. (본문 162쪽)

횡단의 정치는 고유한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정체성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연대하는 것을 지양하자고 말한다. 이미 ‘닫힌(달리 말하면 완성된)’ 정체성의 범주 안에서 사고하는 것은 또 다른 타자들을 배제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니라 유발-데이비스는 이들이 공유하는 지식, 대화, 공동체 모두 ‘미완’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정치 기획이 언제든 수정될 수 있으며,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 횡단의 정치가들에게 ‘마지막 목표’란 없다. 횡단의 정치는 늘 길 위에서 진행 중이어야만 한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말하는 3.11 대지진과 원전!!
근거가 무너진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인류에 대한 제언!


3.11은 보고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도성장의 신화, 안전신화, 원자력신화……. 현대 일본의 모든 신화들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 후쿠시마. 그곳으로부터 바람과 조류를 타고 퍼져 나가는 피폭의 공포는 그것이 닿는 모든 지역의 삶과 노동, 통치와 저항의 성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일본과 세계의 인류는 3.11로 시작된 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재난 속에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쓰여진 『사상으로서의 3.11』은 바로 이 사유의 단초들을 엮은 책이다. 쓰루미 슌스케나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원로 사상가로부터 고소 이와사부로나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가 담긴 『사상으로서의 3.11』은 3.11 이후 인류에게 어떤 삶의 가능성과 과제가 놓여져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주고 있다.

3.11 대지진의 어마어마한 피해는 그 자체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는 지진 재해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공포와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방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 그리고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상정할 수 없는 ‘수만 년’이라는 방사능 피해의 시간 단위는 후쿠시마에서 새로운 재난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8편의 글들은 이 재난의 시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기 위한 다양한 사상 과제들을 도출해 내고 있다. 내셔널리즘, 근대, 기술과 과학, 세계와 자연, 항상적 봉기 등 각각의 글들은 각기 다른 주제와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전망을 제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입장과 주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글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탈원전/반원전’의 필요성이다. 방사능의 공포가 현재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진 ‘쓰레기’를 미래 세대에게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탈원전은 절실한 과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과 브라질 등 많은 나라들이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은 여전히 이웃나라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일본이 비워 둔 원전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듯이, 원전 수주에 환호하고 원전을 더욱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태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한국에서는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앙은 후쿠시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사상으로서의 3.11』에 실린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것이 ‘3.11 대지진’ 1년을 맞아 『사상으로서의 3.11』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하는 이유이다.

내셔널리즘을 넘어 ‘후쿠시마 국민’으로

미디어 문제를 미뤄 두더라도 어째서 일본사회 전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 정도로 고립감에 휩싸이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그건 해일과 지진이 안긴 피해가 너무나도 심각하고 원전 사고로 인한 절망감도 있겠지만, 저는 역시 일본에는 세계의 일원이려는 자세가 원래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반성합니다. 앞으로의 일본을 생각한다면 세계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몹시 소중합니다. 현재 일본은 “국난에 빠져 있다, 하나가 되어 힘내자”라는 식이어선 안 됩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바로 세워 갈 것인가를 고민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앞으로는 다음 걸음을 내디딜 때 세계의 일원이라는 일체감을 갖지 않는다면, 그 용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인구 문제, 자원 문제, 쓰레기 문제 등 세계 전체의 문제를 30년 정도 선취해 사고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가토 노리히로, 「미래로부터의 기습」(132∼133쪽)

대규모의 재해가 일어나면 사회는 곧장 ‘내셔널리즘’으로 달려간다. 3.11 이후 일본의 미디어들 역시 “일어서라 일본”과 같은 구호를 반복하면서, 재해지의 ‘미담’을 전하고, 부흥해야 할 ‘건전한 일본’의 상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셔널리즘의 선동이 흘러나올 때, 거기에서 가장 먼저 배제되는 이들은 재해의 희생자들과 여전히 사태가 진행되고 있는 후쿠시마의 당사자들이다. 후쿠시마는 더 이상 피해지가 아니라, ‘일본의 부흥’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애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카통통」(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제목으로 망치 소리의 의성어, 본문 196쪽 참조)의 망치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인 이케다 유이치는 뮳셔널리즘의 구호 속에서 그어지고 있는 이러한 분할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반경 10km, 20km, 30km……. 그리고 현의 경계와 국경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그어지는 분할선에 따라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사능 피해는 그렇게 인간들이 긋는 분할선을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두가 피폭의 위험에 처해 있는 당사자, 곧 ‘후쿠시마 국민’으로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케다의 주장이다. 그럼으로써 국민과 행정, 국민과 내셔널리즘 사이에 그어져 있는 더 큰 분할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패전후론』의 작가로 일본 학계에서 ‘역사주체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가토 노리히로가 원전 피해지역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 역시 이런 내셔널리즘의 문제였다. “전쟁에서 공습이 오는데 “도망쳐라”가 아니라 가족이 “으악”하며 얼싸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본문 132쪽)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고립’을 지향하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성격이었다. 근대화 이후 일본은 특유의 ‘전학생 의식’으로 스스로는 고립된 채 세계를 따라잡고 앞서 나가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의 모습이었고,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일어나라 일본”의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있는 일본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만약 최선의 경우에 관한 허황된 기대가 모두 실현되어 방사능 유출이 멈추고, 노심이 제대로 냉각되어 장기 안정상태에 이르고, 그걸 수관으로든 콘크리트로 된 석관으로든 완전히 밀봉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사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로 대지로 바다로 흩뿌려진 아이오딘 131의 방사능이 급속히 감쇠하고, 30년의 반감기를 갖는 세슘 137조차 흩어지거나 제염되거나 생활하기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고 해도, 견고하게 밀봉된 석관 속에는 대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기분 나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플루토늄 239의 방사능이 절반으로 줄어들려면 2만 4천 년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일순 그 황당한 시간의 단위에 눈이 멀고 생각도 정지된 채로 굳어 버린다. - 다지마 마사키, 「시작도 끝도 없다」(141쪽)

다지마 마사키의 글 제목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현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이다. 원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재난 시대인 것이 아니라, 원전 자체가 이미 ‘사고’이기 때문이다.(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249쪽) 원전 ‘사고’를 발전 자체나, 발전 이후의 폐기물 처리와 구분해 줄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 수만 년 동안 지속될 과정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이를 히로세 준은 ‘문제제어 사회’(「원전에서 봉기로」)라고 부른다. ‘문제제어 사회’라는 표현은 비단 원전문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9.11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 또한 ‘원전’과 동시대적인 ‘문제제어’의 현상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해서 ‘테러와의 전쟁’은 해소되지 않는다. ‘테러리즘’이라는 문제를 해결불가능의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사회를 ‘제어’하고 삶과 노동을 끊임없는 재난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일상을 지배하듯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상화된 피폭은 일상생활, 노동, 사회관계, 통치, 투쟁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재규정한다. 원자력 사고를 계기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였던 일본이 그 내적 문제와 한계를 묵시론적인 형태로 드러냈고, ‘인류 진보의 정점’이었던 원전 또한 스스로 붕괴하여 자본주의가 만들어 왔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원전이나 핵무기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난망한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자신의 글(「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지구상에서는 수도 없는 원자력 사고들이 발생했고 그 정점에 후쿠시마의 원전사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시대의 통치는 이러한 붕괴의 사실을 알면서도 지연시키는 장치를 인류에게 강제할 것이다.(고소 이와사부로, 232∼233쪽)

이런 강제에 맞서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제기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저항들은 마찬가지로 ‘문제제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히로세 준은 이를 ‘아랍의 봄’을 들어 설명한다.(「원전에서 봉기로」, 253쪽) 과거의 ‘혁명’이 ‘문제해결’, 즉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건국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으로 종결된다면, 오늘날의 ‘아랍의 봄’과 같은 봉기에는 ‘정권 장악’이나 ‘건국 프로젝트’와 같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아니라, 봉기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반원전의 증표「에서 등장하는 일본의 마이너 운동들(다메렌, 목욕탕 이용자 협의회 등) 역시 끊임없이 봉기로서 봉기하는, 다시 말해 특정한 목적이 아니라 “노상 점거 자체를 지향하는”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데모가 기쁨의 선인 동시에 피로의 선이기도 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길을 메우고 활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비좁은 인도로 밀려나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답으로 향하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그것으로서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진행되는 데모이기 때문이며, 즉 그 종착점이 종지부가 아니라 휴지부이며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뱀’이라고 부르며 시작과 끝으로 획정된 선분 위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가 또 다른 획정된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과거의 ‘두더지’와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며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뱀은 또한 땅 속에서의 휴식도 알지 못한다. 쉬지 않고 땅 위를 기어간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다. 땅 위로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또한 뱀들의, 즉 우리 해방의 선, 기쁨의 선이다. 뱀이 된다(봉기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어디까지나 과잉된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 -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254∼255쪽)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모리 이치로는 자신의 글(「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에서 세계와 자연을 구분한다. 태곳적부터 유구한 템포로 같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존재자 전체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세계’는 인간이 그 자연과 맞서 싸워 구축해 낸, ‘인간이 만들어 내서 영속하는 사물의 총체’를 말한다. 따라서 ‘자연을 지키자’라는 말은 오만한 것이다. 자연에게 있어 인간의 존재 여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며, 자연은 때때로 그 막대한 힘으로 세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에 의해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구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세계’인 것이다. 파괴와 제조의 과정 자체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는 ‘방치해도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들을 만들어 내고, 그 쓰레기들에 의해 ‘세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원자력 발전의 ‘쓰레기’이다. 언뜻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원자력 발전의 과정은 세계 속으로 선악을 모르는 자연을 끌어들인 것이며, 자연이 자신의 본령을 발휘하여 세계를 파괴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본문 158쪽)

방사능 물질은 일단 제조되면 인간으로서는 상정할 수도 없는 수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위력을 발휘한다. 모리 이치로의 말처럼 “미래의 인류”는 “세계를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눈앞의 편리나 이익에 이끌려 핵연료 쓰레기를 세계에 부지런히 쌓아가는” 오늘날의 인류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괴와 제조의 과정을 반복하고 확대하면서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원동력의 상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래의 피해자’를 위해서도, 그리고 후쿠시마 이후 지속적으로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급선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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