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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008
1. 스물다섯, 대한민국을 떠나 프랑스로 가다 001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015 002 대한민국은 지금 교육위기에 처했다 021 003 치열하게 살아야만 인생인가요? 028 004 스물다섯, 대한민국을 떠나 프랑스로 가다 035 005 센느강을 바라보며 결심하다 042 006 나는 타인을 의식하며 살지 않기로 했다 048 007 내 아이는 프랑스 아이처럼 키우고 싶다 054 2. 서른에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 001 서른에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 063 002 파리에서 부딪힌 언어의 벽 070 003 불편함과 친해지기 075 004 프랑스에서 살아남는 인생 2막 생존법 081 005 서른 살의 위시리스트 087 006 버킷리스트, 책 쓰기에 도전하다 094 007 프랑스 사람들의 행복 수업 100 008 서른, 나를 위한 잔치가 시작됐다 106 3. 미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001 Cassis에서 발견한 진정한 자유 115 002 내 인생을 바꾼 책 읽기 120 003 파리의 직장인으로 사는 법 126 004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133 005 여유시간이 나의 하루를 결정한다 138 006 나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알아차리는 법 145 007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152 008 미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157 4. 일단 일어서기만 하면 삶은 다시 시작된다 001 나는 길을 만들어서 간다 165 002 자유는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171 003 변화를 선택하는 자가 되는 것 177 004 무기력하게 청춘을 낭비하지 마라 183 005 단 하루라도 프랑스인처럼 살기 190 006 파리의 여자는 아름답다 195 007 꿈이 있는 여자로 살아가는 것 201 008 웃으며 사랑하며 살라 207 5. 당신이 선택한 길이 모든 것을 바꾼다 001 내가 프랑스에서 배운 것들 215 002 어른 아이, 인생 독립을 선언하다 220 003 꿈은 종이 위에서 업그레이드된다 224 004 프랑스 여자처럼, 프랑스 엄마처럼 230 005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복리 236 006 인생, '나'라는 학교에서 배우다 242 007 나는 매일 파리로 출근한다 247 |
Sor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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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나는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하고 싶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고 있다면 나를 돌아보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일과 개인의 삶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탄탄하게 지켜주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 p.10
‘나는 과연 잘살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살면서 자유롭다고 느낀 날보다 자유를 유예하는 날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만 자유가 누릴 수 있는 걸까? 억울하지 않은가. 대부분 대한민국의 아이들에게 행복은 조건부이다. 어른들은 시험을 잘 보거나 혹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거나, 좋은 회사에 취직하면 행복은 저절로 찾아올 거라 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오랫동안 다독였다. 서른 즈음에 어른이 되고 보니 어른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인 걸 깨달았다. --- p.19 프랑스는 철저한 계약사회이다. 집 계약 시, 휴대전화 약정 신청 및 해지 시, 전기 신청 시 등등 계약서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 없었다. 그러한 나에게 이런 광경은 매우 낯설었다. 계약서에 서명할 때, 집주인과 세입자를 위한 계약서 두 부가 준비된다. 빼곡히 채워진 계약서는 꼼꼼히 읽지 않으면 나에게 불리할 수 있는 조항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입주 시기, 퇴실 통보 기간, 보증금 반환 조건 등은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 p.44 프랑스 교육과 한국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수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든 수업 전에 관련 논문을 읽고 수업에 참여해야만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방대해서 주어진 50장짜리 논문 10개를 끝내고 수업에 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매일 저녁 도서관 가장 늦게까지 남아도 다 끝낼 수 없었다. 도서관이 9시면 불을 불 끄는 바람에 집에서도 공부를 이어서 해야 했다. 학생의 삶은 마치 일이 끝나지 않는 사업가의 삶과 비슷했다. 24시간 일주일 내내 쉬는 시간 없이 잠을 깸과 동시에 공부를 시작하고, 공부하다 스르르 잠드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새로운 교육방식으로부터 시간 싸움, 체력 싸움, 집중력 싸움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무리 시간을 쪼개어 써도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 p.45 나는 아프리카에 있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세 번째 무급으로 인턴을 할 때였다. 여전히 나는 부모님의 돈으로 꿈을 샀다. 사소한 행복을 같이 하지 못하는 딸이었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부담을 덜어주는 딸도 아니었다. 부모님께는 못난 딸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놓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했다. 부모님이 주신 능력을 가장 크게 쓰일 수 있는 곳에 이바지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효도의 길이었다. --- p.52 프랑스의 교육을 들여다보면 가정과 학교에서 대화로 이뤄지는 교육이 많다. 일방적으로 이론을 가르치는 건 프랑스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최대한 각자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각을 나눈다. 일반 프랑스의 가정에서 저녁 식사는 대화의 능력을 기르는 장이 되기도 한다. 밥상 앞에서는 과묵해야 한다는 동방예의지국 선조들의 가르침을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도 정치, 문화, 사회, 예술 이야기가 경계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프랑스에서는 끊임없이 본인의 생각을 표출하고, 반박하기도 하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문화가 자연스럽다. 그러니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다. 누군가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하면 오히려 그 반박을 즐길 만큼 토론을 좋아한다. --- p.57 처음 프랑스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회사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전화를 받을 때였다. 면접하는 순간보다 더 떨렸던 것 같다. 외국인을 만났을 때 실제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 반, 눈치로 이해하는 것 반인 나에게 상대방의 몸짓 언어를 볼 수 없다는 건 크나큰 장애물이었다. 일부러 전화를 안 받으려고 동료에게 내가 자리에 없다고 해달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그마저도 불가능하면 정확한 타이밍에 화장실에 가는 시늉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을 때는 상대방만 겨우 들을 수 있도록 귓속말하듯이 작게 말하거나 알아듣는 척하고 메일로 한 번 더 내용을 전달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구사하고 있는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고 느낄 때 한없이 움츠러 드는 나를 발견했다. 메일로도 정확한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때, 화를 내야 할 시점에 화를 내지 못할 때, 올바른 표현을 찾지 못할 때 모국어처럼 구사할 방법은 없을까. 전화로 대화하는 게 싫다고 마냥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다는 한계 안에 나를 가두지 말자’ --- p.72 프랑스에서 장기 체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경시청의 공포가 있을 것이다. 잘 못 한 것 없는데 한없이 경시청 직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평소에 잘 하던 말들도 그분 앞에만 서면 더듬거린다. 서류라도 하나 놓치고 왔을 땐 그야말로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그래도 우리 당당해지자. 한국의 치열한 경쟁률을 다 이겨내고 정말 똑똑하게 공부한 한국인들이여 경시청 앞에서 주눅 들지 말자. 한국인의 경쟁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실패를 발판 삼아서 더 강력해져라. 그리고 24시간, 365일을 프랑스에서 보낸다면 프랑스어를 잘하자. 이왕 할 거 프랑스인도 감동하게 끔 프랑스어를 구사하자.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건 언어와 태도와 지식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졌을 때 가능하니까. --- p.85 프랑스에도 야근이 없다고 할 순 없다. 전문직종일수록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건 한국처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대부분 프랑스의 근무자들에겐 1주일에 정해진 합법적인 근무시간과 그에 합당한 휴가가 정해져 있다. 프랑스의 법정노동시간은 1주일 35시간 그에 대가로 1년에 5주의 휴가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 휴가를 떠나는 7~8월에 3주 이상 여름휴가를 떠나는 건 권장 사항이기도 하다. 쉴 때 제대로 충전하고, 일할 때 제대로 일하자고 국가와 회사가 합심해서 도와준다. --- p.128 흔히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은 기회에 다가가는 행동을 만든다. 너무 우연 같아서 기회가 찾아온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회는 본인이 끌어당기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회가 결국에 생길 수밖에 없는 우연 같은 필연을 만들어 낸다. ‘기회를 만드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질문하자. 준비된 자는 기회를 먼저 포착한다. 기회는 늘 가까이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p.151 파리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매일 아침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에 혼혈까지 모두 마주칠 수 있다. 나는 습관처럼 가끔 탑승객들의 인종 구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관찰할 때가 있다. 지하철 노선 혹은 구간마다 다른 인종 비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한 인종으로만 구성된 지하철은 볼 수 없었다. 모두 프랑스인 이어도 나는 황인종 그리고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일 때는 이방인의 온갖 서러움과 부당함만을 보고 프랑스를 그렇게도 미워했다. 프랑스어가 부족해서, 이방인이라서, 아직 학생이라는 온갖 이유를 붙여대며 나는 완벽한 나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시절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문득, 통학 길에는 느끼지 못한 프랑스의 위력을 출근길에서 찾았다. 기회가 된다면 혹은 기회가 닿지 않는다더라도 꼭 기회를 만들어서 프랑스에서 오래 머물기를 추천한다. 프랑스의 진짜 모습을 알 때까지 말이다. --- p.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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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펼쳐진 경관이 모두 예술인 도시, 파리
그만큼 세상에서 꿈을 이루기 어려운 도시, 파리 스물다섯, 대한민국을 떠나 프랑스로 가다! 인생 최대의 충격을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 된 친구들과 선배들은 취직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도 여기저기 토익책과 온갖 자격증 책들로 즐비했다. 하지만 나는 도미니카에서 본 생생한 경험들이 내 삶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책상에서 하는 죽은 공부가 싫었다. 세상에 뛰어들어 생생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남들과 다른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취직을 준비하지 않는 나를 보며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프랑스어로는 대한민국에서 밥벌이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찍이 취업전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건 생계유지가 힘들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이 뛰는 곳을 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들과 조금 다르더라도 내가 믿는 가치가 빛을 발할 때까지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나는 학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주한프랑스 대사관의 자료에 따르며 프랑스어는 무려 전 세계 약 2억 7천 4백 명이 구사하는 언어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배우는 언어이며, 제3의 비즈니스 언어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프랑스 외에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프랑스령 들의 주민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적인 재능을 세상이 발전할 수 있는 곳에 쓰고 싶었다. 마침 한국에 있는 난민 인권단체에서 인턴을 할 기회가 생겼다. 동기들은 취직을 위해 기업의 후원자나 사기업의 인턴 경험을 하며 준 사회인으로 일할 때, 나는 교통비만 겨우 받을 수 있는 일을 택했다. 아무렴 괜찮았다. 보수의 크기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건너온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낯선 나라에서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안식처이자 위안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여느 이방인과 같이, 한국에 정착한 이방인들도 서러움이 참 많다. 출입국 사무소를 찾아갈 때마다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프리카 난민들은 지하철을 타고 출입국 사무소를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흑인을 처음 본 아이들이 난민분의 피부를 만져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엄마에게 ‘엄마 이 사람은 왜 피부 색깔이 우리랑 달라?’라고 물어보면 엄마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초콜릿 우유를 많이 먹어서 그런 거야.” 옆에 있는 난민분이 차라리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온갖 차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오히려 출입국 사무소이다. 난민으로 정식 등록하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하면 온갖 사소한 이유로 무안을 주기 일쑤였다. 완벽하게 작성되지 않은 서류를 검토하다 눈앞으로 서류를 던지면서 ‘아니 왜 깜둥이가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피곤하게 해’라고 하는 장면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젊은 청년이었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과 목소리 높여 싸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서류를 다시 수정해달라고 다시 말씀해 주시면 되지, 왜 피부 색깔로 사람을 그렇게 차별하세요? 서류는 왜 던지시는 건데요? 사람을 존중해주셔야죠.” 아무리 소리쳐도 바위에 달걀 치기였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난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게 소원해 보였다. 어떻게든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와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드는 동시에 정신적인 피해와 육체적인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학부 때 배운 언어학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지식이었다. 프랑스로 가야 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부터 국제개발학의 이론과 실전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전문가들이 개발도상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개발 프로젝트를 습득하고 직접 참여할 중요한 기회였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내가 졸업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유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맏딸과 첫 대면이 있던 날이다. 부모님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딸의 일방적인 통보에 부모님은 적잖이 당황해하셨다. 우린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절실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손쉬운 한국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나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짊어지울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장학금을 찾았다. 대학 때부터 활동하고 있는 봉사 단체였던 로타렉트에서 활동하였기에 나는 로타지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되었다. 4년 내내 봉사 단체에서 활동한 내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파리의 유학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무엇보다 더 생생하게 그렸다. 장소, 시간, 사람, 날씨, 바람의 속도까지도 세세하게 상상했다. 에펠 타워 앞 샹드막스 Champs de mars 잔디밭 위에서 돗자리를 펴 놓고 친구들과 포도주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날 햇빛의 강도와 바람의 속도까지도 느꼈다. 너무 생생해서 서울인지 파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상상력이 힘을 발휘했다. 그동안 학교 공부와 더불어 대외적으로 활동한 나의 이력을 보고 긴 면접 끝에 장학금을 후원해 준다는 곳이 나타났다. ‘궁즉통, 상황이 절박하면 길이 열린다’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학길이 열렸다. 해외 취업을 꿈꾸는 청춘들에게, 당신 앞에 펼쳐진 수천 갈래 길, 수천 가지 가능성에 도전하라! 프랑스의 교육을 받으면서 프랑스에 적응할 힘을 키워나갔다. 언어 실력을 연마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경쟁력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 프랑스인들보다 두세 배로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프랑스에 취직을 시도하려고 할 때만 해도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많이 없었다. 유학생 대부분은 취업할 수 있는 정보를 찾지 못하거나, 기다림에 지쳐 한 둘씩 돌아갔다. 이 책에는 혼자 부딪혀가며 찾아냈던 해결책을 담았다. 세계는 무한히 넓고,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나도 공부를 위해, 봉사 활동을 위해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가장 큰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곳에 나의 둥지를 틀었다. 프랑스는 지금의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준 연습의 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