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6 추천사
12 PROLOGUE 당신이 보고싶은 영화는 영화관에 없다 PART1 우리는 다른 영화를 본다 26 오래된 인력거처럼 영화에 인생을 던진 어느 감독에게 바침 33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 38 배불러 죽는 영화와 배고파 죽는 영화 44 다각도로 본 '영화적 다양성'의 의미 50 과거로 가는 기차를 타고 싶나요? 55 과식과 아사(餓死), 기쁘지 아니하지? 61 영화를 끝까지 끝까지 보자 66 ‘내 책상 서랍 속의 영화’들을 위하여 72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79 네 멋대로 트나? 85 막장은 어떻게 신드롬이 되었나? 91 살고 싶은 자! 죽여라? PART2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서 98 삶의 시작과 끝 art! 103 세상은 하나, 시선은 둘!! 109 소 판 돈으로 개 돌보는 영화 114 술과 예술과 영화 119 총과 영화와 사람 124 영화는 서울에서만 만드는 건가요? 131 영화도 리필이 되나요? 136 독립영화, 서른 즈음에 141 독립영화와 단편영화 148 예술영화, 소통의 아이콘이 되라! 154 예술영화는 금연보조제? 159 나도, 극장도, 관객도 배우가 되는 곳 PART3 영화 하나, 생각 둘 16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71 시나리오를 위한 변명 177 작품 하나 하시죠 183 질문 없는 사회 189 영화 같은 정치, 정치 같은 영화 194 천안함이 아트플러스에 떠 있는 이유 199 영화는 정치를 싣고 205 예술을 재단할 권력은 없다! 211 영화를 변호하는 영화를 위하여! 217 출연료라는 파이 223 영화선택의 비밀 229 문화를 권력으로 인식하는 순간,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234 투잡스 239 혜화,동에는 똥파리가 많다 245 당신의 멘탈은 안녕하십니까 250 EPILOGUE |
|
여기 다른 극장이 있다. 영화가 단순감상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공간임을 입증해주는 그런 매력을 가진 극장 말이다. 그러면 다른 극장은 무엇인가? 아트플러스는 다르다. 아트에 무엇을 더했다는 의미처럼 영화를 영화 자체로 느끼는 아트와 그 이상의 것을 향유하는 플러스적인 요인이 있다는 의미이다. 일단 상영하는 영화가 다르다. 그 설립취지에 맞게 다양한 독립영화를 상영한다는 것도 다르고 시장점유율 1% 이하의 국가에서 제작한 영화를 상영한다는 의미에서도 다르다. 즉 콘텐츠가 아예 다르다. ‘우리는 다른 영화 본다’라는 카피가 상징하듯 말이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중에서 엔딩크레딧에는 그 영화의 시작과 끝이 모두 잘 나와 있다. 어디서 촬영했으며 어떤 기자재를 사용하고 누가 도와주었는가를 비롯해 보다 본질적으로는 평균 연봉 천만 원이라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의 영화산업이 과연 어떻게 현재와 같은 형식적이나마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여 명에 이르는 스텝들의 피땀과 영화예술에 대한 열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단 한 줄의 이름밖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고통을 감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대가로 관객들의 눈길 한 번을 그리워하는데 이것마저도 이윤이라는 가치에 발목 잡힌다면 과연 우리가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어떤 방법으로 그렸는지 알지 못하고 생각할 기회조차 뺏기고 그저 그림만 보고 미술관에서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화를 끝까지 끝까지 보자」중에서 그러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등의 작가적 취향이 강한 영화나 저예산 제작으로 인해 마케팅 비용을 많이 들일 수 없는 영화들은 어떨까? 이런 영화들은 그 야말로 ‘내 책상 서랍 속의 영화’가 되고 마는 것이 영화 강국 대한민국의 냉엄한 현실이다. 또한 안정적 재원으로 제작하여 다수의 스크린에 개봉하는 한국영화들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본래적 의미의 다양한 문화로서의 순기능과는 거리가 있다. 한 해에 개봉되는 영화의 90% 이상이 한국과 미국영화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그 외 수십 개국의 사회상과 문화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책상 서랍 속의 영화’들을 위하여」중에서 메이저 몇 개의 기업이 모든 영화판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과소경쟁이 장기적으로는 영화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이 위험성은 크다. 할리우드조차도 이미 수십 년 전에 독과점을 금지했는데 우리는 영화판 자체가 완전히 독과점에 수직계열화 되어 있다. 제작이고 유통이고 모든 길은 한 곳으로 통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독립영화도 예술영화도 공존해야만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고 새로운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잉태한다. ‘살고 싶은 자, 죽여라!’가 아니라 ‘살고 싶은 자, 손을 잡아라!’라고 말하는 상생과 공영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가능한 가치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살고 싶은 자! 죽여라」중에서 소통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지는 좀 오래 되었다. 가정 내에서는 세대 간의 단절로, 학교에서는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의 불신으로 여러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룰과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영역인 정치는 미궁 속으로 빠지며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도 정서적 공감이라는 간접적 소통이 있을 때 인기가 있다. 가정과 사회가 대체해주지 못하는 소통이 아이돌에게 과다하게 향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도 궁궁극적으로 영화는 만든 이들의 생각과 정서가 대중과 소통해가는 과정을 통해 기본적인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는다. 혼자만의 예술이나 자신의 추상적 생각을 허공에 던지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영화, 소통의 아이콘이 되라!!」중에서 그러면 영화가 영화일 수 있게 해주는 주연배우는 누구일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영화라는 매체를 가장 영화답게 빛나게 해주는 주연배우는 바로 극장들이다. 이들은 조금 못난 영화도 조금 어설픈 영화도 모두 자신의 중심에 올려 놓아주는 진정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매체의 주연배우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극장을 사시사철 지키는 일꾼들이고 바로 이 영화들로 인해 힘들고 빛나지 않는 그 순간에도 다양성 영화라는 연약한 아이 곁을 떠나지 않는 든든한 살림꾼이 아트플러스와 같은 극장들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영화의 주연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영화제작 시 카메라 앞에는 배우가 있고 뒤에는 스텝이 있다. 그리고 상영 시 스크린 안에는 배우가 있고 앞에는 관객이 있다. 그리고 그보다 뒤쪽에는 영사실이 있고 거기에서 영화가 새롭게 탄생된다. 이 탄생을 도맡아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곳이 바로 극장이다. 그리고 이 극장은 사계절 내내 영화를 보듬어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자신이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면서 서로의 애정을 쌓아간다. ---「나도, 극장도, 관객도 배우가 되는 곳」중에서 사실 한 해에 만들어지는 영화는 한정되어 있고 그 제작비도 시장규모에 따라 정해지는데 이러한 인력의 공급과잉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지급되는 작가료는 수천만 원 안팎이다. 물론 소수의 작가는 그보다는 더 많은 작가료를 받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결국 상업적 시장만을 그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별다른 해법이 없다. 효율적인 운용으로 리스크를 줄이고 좀 더 작가에게 좋은 대우를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게 하자고 말할 수는 있지만 결국 이것도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면 다른 스텝들 처우가 나빠지는 기현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제작사의 입장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변명」중에서 서둘러 촬영에 임했고 며칠이 지났다. 갑자기 호흡을 맞춰 원활한 진행이 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촬영장 통제가 쉽지 않아 길 가던 사람들이 불쑥 불쑥 무언가를 묻기 일쑤였다. “누가 나와요?” 이렇게 물으면 궁색한 답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면 ‘에로영화인가 보네’ 그러기도 하고 ‘비디오 찍나보네’ 하고 염장을 지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개런티를 많이 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 배우나 스텝에게 늘 미안한 심정이 되다 보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연출에 임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 A씨는 경황없이 영화 한 편을 찍게 되었다. 현대영화는 편집의 미학이라는 자위를 하며 편집실로 돌아온 그는 골머리를 썩이며 그림을 붙이고 또 붙였다. 허나 원판불변의 법칙이 영화라고 예외는 아닌 바 늘 편집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작품 하나 하시죠?」중에서 세대를 막론하고 우리는 질문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물론 강의라는 것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일방적 전달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고 무언가 배운다는 점을 전제로 하다 보니 지식의 권력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봉건적 관습이 쌓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반대로 생각해 보면 평소에 강의를 많이 하는 사람도 강의를 듣는 입장이 되면 입을 닫기 마련이니 이해는 된다. 또한, 어쩌면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강연자와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고 반기를 드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다 보니 아예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세대 간에 암묵적으로 유전되어 왔을 수도 있다. ---「질문 없는 사회」중에서 중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 성공한 영화제로 대부분 거론하는데 높은 대중성과 좋은 프로그램, 효율적 운영과 행정기관의 전폭적 지원 등의 장점이 있지만 앞서 거론한 실패사례들과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를 바라보는 행정의 가장 기본적인 접근방식을 철저히 지킨 점이다. 단적으로 영화제 운영 중에 시장이 수뢰혐의로 자살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불필요한 축사나 정치인들의 접근도 철저히 배제하여 오로지 영화를 영화 자체로 즐기고 평가하도록 운영한 것이 현재의 성공을 이끌었다. 이는 타 영화제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부분이다. ---「예술을 재단할 권력은 없다!」중에서 중에서 ‘출연료라는 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이라는 표현은 결국 총량은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출연료가 과다하게 책정되어 나타나는 문제점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특정 스타 연기자의 출연료가 높다는 것은 정해진 파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갈 몫이 적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 전체에서 보자면 완성도의 미비와 작품의 질적 저하로 귀결된다. 그리고 여타 연기자들의 생활의 불안정을 동반하고 스텝의 고통을 수반한다. 결국 하나의 작품이 타인의 고통과 눈물 속에서 쌓아올린 모래탑이 된다는 의미이다. 종종 언급되었지만 한국영화가 활황 속에서도 늘 속빈 강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스텝의 평균 연봉이 천만 원 내외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언제까지나 한국영화의 번성을 이야기하고 해외진출을 말할 수 없다. ---「출연료라는 파이」중에서 사실 MB 정부에서 영화계는 대표적인 좌파로 분류되어 왔다. 독립영화계만이 아니라 소위 메이저 영화제와 영화계, 영화인, 심지어 영화진흥위원회의 핵심인력들도 이런 분류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한국영화 역대 최고 흥행작인 「괴물」중에서(2006)조차도 좌파영화로 분류되어 균형화를 위해 우파영화를 만들겠다는 논리적 근거로 사용되었을까. 사실 다른 모든 문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야말로 기성의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실험하고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화이다. 이런 점에서 기성 가치에 대한 창조적 파괴를 그 근원으로 한다. 당연히 현재의 가치가 아니라 미래의 가치를 대변하고 그런 점에서 진보적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예술적 창조행위가 편향되었다며 권력이 균형을 잡겠다는 것은 21세기에 괴벨스가 환생한 것과 다름없다. ---「문화를 권력으로 인식하는 순간,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중에서 |
|
『당신이 보고싶은 영화는 영화관에 없다』는 책의 제목부터 다소 까칠하고 날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면 예술영화관 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에서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인정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정해진 쿼터만큼 상영하면 일정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예술영화관은 현재 전국에 스무 개 남짓 있다. 전체 스크린 수와 비교하면 1퍼센트가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수이지만 여기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2천 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보다 많다. 한국의 스크린 독과점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 영화생태계가 과연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유지될지 많은 영화인들이 걱정과 우려를 하고 있다. 이를 조금이나마 바로 잡아보려는 노력이 현재의 예술영화관 제도이다.
남태우 작가는 작은 예술영화관에서 영화를 선정하고 관객과의 교류와 소통을 위한 각종 행사를 기획하는 프로그래머로 십수 년 근무했다. 또한 『넥스트플러스』라는 책자에 영화와 관련하여 고정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의 책상서랍 속에는 여기저기서 개봉 가능성을 의뢰하는 영화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만큼 사장되고 있는 영화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잠자고 있는 많은 영화들이 어서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보아야 하는데, 무엇이 이를 어렵게 만들었을까. 남태우 작가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당시를 영화 문화의 암흑기라 부른다. 영화 산업은 대기업 주도로 그럭저럭 흘러왔지만 영화문화라는 측면에서는 정부에 의해 굴종을 강요당한 시기였다. 예술영화관 제도를 축소 내지는 없애기 위해 두 정부가 부단히 노력했고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덕분에 남태우 작가는 블랙리스트 3관왕을 차지하며 명예 아닌 명예를 얻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가 진보정당을 지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좌파 문화예술인으로 분류되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세월호 시행령 폐지를 촉구하다 두 번째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세 번째는 『천안함 프로젝트』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소속 극장이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지원이 배제되면서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다양한 영화를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기울어진 시장 상황에서 최소한의 볼 권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이렇게 블랙리스트에 블랙리스트에 블랙리스트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가 영화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을 예술영화관이라는 작은 프리즘을 통해 세상으로 던진다. 이 책은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과 내면의 이야기, 잘 알지 못했던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에 대한 소담스러운 에피소드와 넋두리, 2장은 정말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어디에 있겠냐는 의문, 3장은 정부는 영화에게 과연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만나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등의 생각들이 펼쳐져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보이는 영화가 아니라 보고싶은 영화”, 즉 관객의 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