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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 시집 『쥐똥나무 열매만한 시들』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1부에서 5부까지 총 68편의 시들을 모았는데, 제1부는「수평선」,「봄밤」,「청설모」,「보름달」,「무늬」등 15편이 수록되었고, 제2부는「모과풍령초」,「희밍의 땅」,「봄 햇살」,「일흔」,「사이」등 1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자연을 대상으로 한 거시적 안목과 시각, 청각, 미각 등 감각의 전이(轉移)가 활달하게 표현된 부분이다. 예컨대「수평선」은 입이 큰 아귀 수육을 먹다가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는 가장 큰 입이라는 놀라운 발견을 해낸다.「봄의 맛」은 이른 봄 뒷산의 머위 잎을 따와 쌈 싸 먹으며 “온몸이 떨리도록 혀끝에 감겨오는/ 보랏빛 쓴 맛!”을 감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는데 놀라운 감각의 전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보랏빛 쓴맛!”이라는 대목은 이른바 공감각으로 미각의 시각화가 되겠는데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제3부는「민달팽이」,「사는 일」,「은어들의 고향」,「심장」등 15편이 수록되었다. 이 부분은 삶에 대한 궁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시인은 삶을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가닿는 과정으로 파악한다.「은어들의 고향」같은 작품이 그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아름다운 최선」에서 보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는 여정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다. 제4부는「탱크와 티코」,「지옥」,「무모한 고행」,「단 한 권의 책」등 13편이 수록되었는데, 주로 성경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들이다. 예컨대「무모한 고행」같은 작품은 ‘기둥 위의 성자’로 불리는 인물이 자신은 진리를 추구했다고 믿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의 인생 전체가 미망에 지나지 않았음을 설파한 작품이다. 제5부는「출생기」,「엄마의 속곳 끈」,「가슴으로 우는 법」, 등 12편의 산문시들을 모았는데, 유년시절 기구한 운명 속에 내던져졌던 시인 자신의 자서전적 삶이 상당부분 투영된 작품들이다. 특히「엄마의 속곳 끈」은 어린 시절 엄마가 도망갈 것이라는 낌새를 채고 밤마다 엄마의 속곳 끈을 손에 감고 잠들었다는 진술이나, 끝내 엄마가 떠난 후 아무도 모르는 가슴 속에 쓰리고 헛헛한 황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진술은 애처로움과 인간 한의 극치라 할 만하다.
시인 조동화는 시, 시조, 동시라는 세 분야에 각각 한 번씩 도합 세 번이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이른바 시 분야에서 사이클히트를 날린 다재다능한 시인이다. 그의 열두 번째 시집 『쥐똥나무 열매만한 시들』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4행과 5행의 시편들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특히 4행시는 28편이나 되는데, 이를 두고 혹시는 향가의 4구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가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5행과 6행의 시도 16편이나 되므로 이번 시집을 두고 향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제 막 일흔을 넘긴 시인의 자연스런 시적 호흡의 결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이번 시집의 형식적 성향에 가까우리라 여겨진다. 어떤 사내도 오를 수 없는 깊은 산 바위 벼랑 홀로 늙어가는 절세미녀를 어느 여름 운 좋게도 만난 적이 있다 ―「하늘말나리」 전문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식물의 의인화다. ‘하늘말나리’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보다시피 ‘홀로 늙어가는 절세미녀’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어떤 사내도 오를 수 없는/ 깊은 산 바위 벼랑”에 고고히 살고 있다. 시인은 어느 여름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듯 가슴 설레며 그 절세미녀를 만난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올해도 제 머리들을 삭둑삭둑 베어 던지려는가, 홍안의 농염한 여인들 벼랑 위 난간에 모여 서 있다 ―「능소화」 전문 이 작품 역시 의인화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능소화(凌?花)’는 꿀풀목 능소화과의 식물로 초여름 아주 탐스러운 주황색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이 나무는 꽃이 질 때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통꽃 그대로 떨어지는 습성이 있다. 땅위에 널린 싱싱한 꽃숭어리들을 내려다보노라면 마치 낙화암 절벽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를 보는 듯 섬뜩하고 애처로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시인은 떨어지기 전의 능소화들을 홍안의 농염한 자태로 결연히 벼랑 위 난간에 모여 서 있는 여인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스쳐간 고갯마루에 나도 섰다 이제부터는 고봉들이 즐비한 길이다 몇 개의 봉우리들을 더 오를 수 있을까? 운무 자욱한 연봉連峰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일흔」 전문 예로부터 ‘일흔’을 일러 ‘고희’라 일러왔는데, 이는 두보가 ‘곡강(曲江)’이라는 시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한 데서 유래했다.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라는 뜻이다. 시인은 지금 그 일흔의 고갯마루에 섰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해도 사람이 누구나 백세 가까이 사는 것은 아닐진대 시인은 즐비한 고봉들을 바라보며 두보의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음이 분명하다. 자신이 몇 살까지 살 것이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시인은 “운무 자욱한 연봉連峰들을 지그시 바라”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벚꽃이 만개한 경주 동방초등학교 옆 큰 도로 새 옷 입고 고사리 손을 든 한 떼의 1학년들이 지금 막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아침입니다 버스도 승용차도 덤프트럭도 지게차도 모두 꼼짝 못하고 멈추어 선 채 이 땅의 눈부신 미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눈부신 미래」 전문 어린이들, 특히 1학년들은 이 땅의 눈부신 미래요 희망이다. 이들이 어떻게 자라는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흉포한 문명의 이기로부터 이들은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도시의 교외에 있는 초등학교들은 아이들이 급감하여 폐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동방초등학교는 근처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덕분에 취학아동들이 오히려 불어나 등하교시면 깃발을 들고 호루라기를 입에 문 엄마아빠들이 길 양편에 서고 질서정연하게 아이들을 건너게 한다. 예쁘고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을 들고 길을 건너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즐겁고 감격스럽다. 우리의 소원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 성급히 달을 꺼내려 안달하지 말일이다 휘저을수록 그것은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인 것 호수 가운데 그냥 저 혼자 오래 놓아두어라 때 되면 가장 둥근 달 휘영청 떠오르리니 ―「우리의 소원」 전문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요즈음 전방에서는 휴전선 일부에 대전차장애물과 철조망들을 제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그런 성급하고 허울 좋은 조치만으로 통일은 오지 않는다. 남과 북의 마음이 하나 되지 않았는데 통일이 되겠는가? 우격다짐으로는 이 큰 소망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그보다는 먼저 남과 북이 신뢰를 키워 합의하에 핵전력을 제거하고, 군인 수를 줄이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와 경제를 서로 소통하며 조건 없는 이산가족상봉과 자유왕래가 이루어져 마음부터 하나가 되는 일이 급선무다. 양측이 지금 전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섣부른 통일은 자칫 이 민족의 피를 요구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4선 대통령 우고차베스 그는 겉똑똑이 사회주의자였다 기간산업 국유화와 무상복지라는 신기루에 홀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들을 보는 족족 잡아 장장 14년간 원 없이 파티를 벌이다 갔다 가장 배고픈 나라 1위라는 가혹한 멍에를 자신이 사랑한 백성들의 목에다 고스란히 걸어둔 채 ―「우고차베스」 전문 석유매장량이 세계 제일인 베네수엘라는 석유 값이 좋을 때는 세계적인 부국이었다. 그러나 우고차베스라는 지도자가 나와 포퓰리즘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바람에 14년 만에 그동안 쌓았던 국부를 다 소진하여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4300%에 달했고, 올해는 100만%가 될 것이라 한다. 국민들의 체중이 평균 10킬로그램이 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여 수백 만 명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아 연명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우고차베스를 영웅시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에 영합하는 무상복지의 달콤함에 절대로 취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은 곧 우리와 우리 자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마약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검은 블랙홀은 전봇대에도 열려 있기 일쑤다 대화+만남1899-2662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걸까 그리고 만나서 무얼 허자는 걸까 달콤한 미끼처럼 걸린 저 음험한 입구入口 ―「음험한 입구」 전문 도시 근교 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도로변 전봇대에 ‘대화+만남’이라는 문구 밑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나라 순진한 여자들을 꼬드기는 악마의 계략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미풍양속과 건전한 가정들을 무너뜨리는 최대의 적이다. 이것들이 이렇게 버젓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는 사실은 영업이 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왜 이러한 악을 정부는 방치하는 것일까? 경찰은 왜 이 일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일까?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일이 너무 많아 남아도는 손이 없다는 걸까? 좀도둑 몇 놈 잡느니 이런 놈들부터 잡아 엄단하여 이 나라 기강부터 바로 세워야 하리라. 태양 따라 서쪽으로 가는 길이 바른 길인데 태양을 버려둔 채 다수는 부득부득 동쪽으로만 가자고 한다 다가오는 긴 밤을 보지 못하고 ―「다수」 전문 다수는 귀가 얇고 어리석다. 바른 길이 한눈에 보이는데도 부득부득 멸망 쪽으로 가자고 한다. 민주주의는 늘 어리석고 눈 먼 다수의 편이다. 다수가 부화뇌동하면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쉬 밝아올 기약 없는 긴 밤을 통과하고 있다. 시인이여, 등대처럼 깨어 불빛을 비추라! 손진은 평론가 해설, 「짧은 시의 매력과 광휘, 그 원초적 토양」에서 시는 얼마나 응축되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니 시가 길어야 할 때가 있고 짧아야 할 때도 엄연히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시인들은 짧은 시를 긴 시를 쓰는 가운데 쉬어가는 기분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강렬한 인상과 다채로운 감각을 위하여 어떤 시인들은 짧은 시를 쓴다. 예컨대 장콕도의 「귀」(“나의 귀는 소라껍질/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한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아홉개의 눈 쌓인 산에」(“아홉개의 눈 쌓인 산에/움직이는 거라곤/까마귀의 검은 눈동자“), 백석 의 「비」(”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같은 시들은 얼마나 깊은 감각과 높은 정신의 위의를 가졌는가, 시인은 압축과 생략을 통해 정신의 가장 내밀한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먼저 감각을 다룬 시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나무들이 막 차 스푼만한 잎들을 내밀어 햇살을 떠먹기 시작하는 어제오늘 산중턱 너럭바위에 앉으면 내게도 햇살은 마치 그 옛날 할머니 끓여주시던 숭늉 맛이다 -「봄 햇살」전문 뉘라 할 것 없이 시인들일세 연푸른 하늘 바닥에 섬세의 극치를 다해 꽃이면 꽃, 잎이면 잎 그 하나 실수 없이 읊조려내는 저 기찬 시구詩句들 좀 보시게 -「봄의 맛」전문 앞의 시를 살펴보자. 봄날에 따사로운 햇살이 사물(나무, 바위)에 비치는 것만으로는 시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물 쪽으로 반응하는 한 순간의 몸짓이 필요한 것이다.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의인화라 부른다. 잘 알다시피 서정시는 의인론적 세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서정시의 가장 보편적인 존재양식을 보여준다. 나무들이 차 스푼만한 잎들을 내밀어 햇살을 떠먹는다. 이 역동성을 시인은 보고 있다. 배불리 먹고 나뭇잎은 몸피를 키워나갈 것이다. 이 감각이 나뭇잎이라는 자잘한 존재들의 생활양식으로 드러난다. 촉각이 미각이 되는 경험을 시인도 너럭바위에 앉아서 한다. 햇살에서 옛날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숭늉 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이 시집 3부 「出生記」에 나오는, “백날도 못 되어 애비 죽고 어미마저도 개가를 해버린 뒤 속절없이 남겨진 천애의 천덕꾸러기”인 ‘나’를 품어준 분이다. 시인은 이런 감각 속에서 ‘나뭇잎’이나 ‘나’에게 차별성을 두지 않는다. 뒤의 시에서도 우리는 사물(꽃, 잎)의 역동성을 본다. 언덕을 “연푸른 하늘 바닥”으로 보는 것에서 우리는 시인이 하늘과 땅의 구분을 무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자잘한 꽃과 잎들이 그들만의 몸짓으로 그들의 말을 읊조린다. “기찬 詩句”다. 그것은 교훈적인 언어로 쓰는 인위의 시보다 훨씬 섬세하고 발랄하고 또 오묘하고 그윽하다. 시인은 봄햇살을 받는 자잘한 식물들에서 하늘을 향해서 뿜어내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진초록 부레 옥잠 잎에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 우련한 무늬처럼 기척이 없다 -「무늬」전문 이 시는 대상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찾아낸다. 이는 하이쿠의 세계, 예컨대 범종에 내려앉은 부손(蕪村)의 나비에 비견될 만하다. 부레옥잠과 청개구리가 하나로 합쳐질 때에 비로소 이 두 대상은 하나의 울림으로 존재한다. 그 울림은 유일한 순간의 그것이면서도 영원한 시간의 것이기도 하다. 생명체와 배경이 비로소 하나로 되면서 개체와 그를 둘러싼 대자연간의 일체감, 주객일체의 단초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대상의 존재 지평은 더욱 넓어져 있는 것이다. 늘 태초의 시간으로 돌아가 왔던 길 되짚어 떨어지는 폭포 - 「모래시계」전문 모래가 폭포로 바뀜으로써 읽는 사람에게 놀라운 심상적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청각적 기능이 느닷없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래’의 소멸 이미지가 태초의 시간과 맞물리게 하는 것이 폭포라는 것이다. 모래는 쌓이는 것이고 폭포는 흐르는 물이다. 흐르는 물이 시간의 흐름과 결부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모래 소리가 가늘어서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라면 폭포 소리는 강 기슭이나 계곡을 흔들어놓는 소리로 영원히 지속된다. 그 영원의 시간을 묘사하기에 폭포가 적격인 것이다. 감각은 그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가장 미적인 것이 된다. 그 경계 무화를 동양시학에서는 ‘흐리게 하는 미’라고 일컫는다. 이 시집에서 그것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아마 「봄밤」일 것이다. 하늘에서는 낭랑한 별들의 담소談笑에 귀먹고 땅에서는 폭죽 같은 개구리울음의 모닥불에 눈 멀다 -「봄밤」전문 통상적인 감각에서는 별은 보고 개구리 소리는 듣는 것이지만 시인은 우리의 인식을 역전시킨다. 하늘의 별은 듣고 개구리 울음은 보고 쬔다. 소리로 된 빛, 빛과 열이 된 소리를 우리는 본다. 놀라운 일이다. 이 둘을 융화시키는 것이 봄밤의 시공간이다. 낮의 시공간에서 보고 듣는 집과 사람, 세상의 자잘한 소리에 가려 익지 못했을 감각이 극점을 향해 파동치는 시간이 밤이다. 봄밤은 무르익는다. 그 역동적인 고요 속에서 온 천지에 파문을 내는 무수한 별들과 개구리 울음(개구리는 울 때 가장 생명의 의지에 넘친다.)을 시인의 몸은 감각한다. 별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귀먹고, 폭죽같이 터지는 개구리 울음의 모닥불에 눈 먼다. 그 감각의 교향(交響)을 통해 시인은 봄밤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 언어와 감각이 놓쳐 버린 그 밤을. 귀먹고 눈 먼 그 극점은 감각의 파동점에 몸이 노출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봄밤은 물리적인 시계시간이 아니라, 경계의 칸막이가 걷혀지는 암향부동(暗香浮動)의 시간이다. 그 때 세상은 새로운 파동점으로 우리를 들었다 놓는다. 봄밤의 시공간에서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은 반대어가 아니다. 언제나 서로의 경계를 열어놓는다. · · · 누가 걸어둔 채 잊고 갔는가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나풀거리는 잿빛 목도리 하나 -「청설모」전문 해마다 유월이 오면 한지로 만든 초롱을 이고 지고 우리 집을 찾아오는 방물장수가 있다 *모과풍령초 - 초롱꽃의 속명 -「모과풍령초」전문 세 줄은 너무 부족하고 다섯 줄이면 너무 많다는 것일까? 두 편 다 네 줄로 사물을 잡아낸 일종의 회화시다. 앞의 시가 생명체의 사물화라면 뒤의 시는 생명체의 인간화라 칭할 수 있다. 잿빛 청설모가 나뭇가지에 걸려 나풀거린다. 그것은 영락 없는 잿빛 목도리다. 생명과 물질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행복하게 공존한다. 분명히 생명과 물질은 대립적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대립을 통하여 서로가 생명력을 얻고 더욱 참신한 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과감하게 청설모를 목도리로 만들어버리는가 하면 목도리를 당당하게 생명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의 확정적인 구분의 틀을 깨는 것이다. 이런 넘나들기는 대상 간 차이 ‘흐려놓기’의 미학에서 발원한다. 해마다 유월에 개화하는 모과풍령초를 서술한 이 두 번째 시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시간의 공간화 전략이다. 모과풍령초는 해마다 유월에 우리 집 꽃밭에서 핀다. 그것을 “우리 집을 찾아오는 ”떠돌이 방물장수의 삶으로 잡아내는 것이다. 방물장수는 “한지로 만든 초롱”이라는 생활소품을 파는,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는 존재다. 그 방물장수가 머언 장터를 찾아가듯 우리 집을 찾아오는 것이다. 마당에 피는 꽃 하나에서 방랑의 삶을 읽어내는 이런 민중적 공간성을 만들어내는 이 지점에서 조동화 시의 또 하나의 매력을 볼 수 있다. 현실생활과 맞부딪침으로써 미의 효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과풍령초와 그 곁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무과풍령초는 얼마나 작고 내향적인 꽃인가. 그러나 그 속에는 그것이 연상되는 시인의 경험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이다. 이 시인이 짧은 시에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다양한 촉수를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위의 시는 조동화의 시의 미학과 현실의 관계를 열어놓는 접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실 사물과 욕망의 문제는 일견 회화시로 보이는 다음 시에서 단초를 보인다. 바닷가 음식점에서 입이 큰 고기 아귀수육을 먹다가 힐끗 쳐다보는데 세상에서 제일 큰 입 하나가 창에 걸렸다 한일자로 꽉 다문 저 커다란 윗입술 아랫입술 -「수평선」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두 가지 입의 선명한 그림을 본다. 그것은 아귀수육과 수평선의 입의 실감에서 온다. 이 깨달음이 이 시를 아연 살아 있게 한다. 시인은 음식점에서 수육을 먹다가 두 입을 본다. 다만 보기만 한 것일까? 표면적으로 이 시는 큰 입을 가진 아귀수육과 수평선의 대조가 눈에 띈다. 몸이 온통 입인 아귀가 큰 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서 제일 큰 입 하나가 창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귀 입과 수평선의 윗입술 아랫입술은 여러모로 대조가 된다. 무엇이든 꾸역꾸역 다 삼키려 하는 아귀는 고기이면서도 끝 간 데 모르는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이는 아귀가 “염치없이 먹을 것을 탐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수평선은 어떤 입인가? 그것은 모든 시공을 삼킬 수 있는 입이면서도 중심을 비운 입,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일자로 꽉 다문” 입이다. 말하자면 수평선의 입은 다 비워낸 공(空)의 입이요, 인간의 입은 채우기만 하는 아귀의 입이다. 시인은 수평선에서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효용적인 일체의 의미를 비워버린 무용성(無用性)의 자연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 · · 이번 시집에 눈여겨 볼 또 하나의 부분은 그의 개인사가 담긴 시들이다. 「출생기」를 필두로 한 이들 시편들에서 조동화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진솔하게 노출한다. 그것은 이미 지난 번 시집에서 단초를 보인 바 있다. 할매와 나는 둘이서 뙤약볕 쏟아지는 여름 한철을 온통 밭에서 살았다. 바랭이, 쇠비름, 방동사니 들을 뽑으며 긴 긴 실구리처럼 풀리는 할매의 서러운 내력을 따라가다 보면 칠월은 금방 하순으로 접어들어 어느새 내 무릎만큼의 높이로 황토밭 가득 일던 하얀 참깨꽃. 때맞춰 온갖 벌들도 날아들어 산밭은 온종일 잔칫집만 같았지. 바람에 쓰러지지 말라고 뿌리께에 수북이 북을 돋우시며 참깨꽃이 참 사랑스럽다던 할매,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할매의 작은 행복도 고달프기만 하던 농사일도 돌아보면 이렇게 모두 그리움일 줄을. -「참깨꽃」 부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년은 즐거운 추억이 되고, 현재 삶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축복받아야 할 유년이 그 정반대일 경우에는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단을 요구한다. 미당도 「자화상」에서 “아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듯, 조동화는 자신의 불우했던 가족사를 진솔하게 고백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할머니와 둘이서 여름 한 철을 뙤약볕이 쏟아지는 산밭에서 보낸 힘들었던 경험을 묘사한다. 그것은 어린 화자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칠월 하순에 이르러 날아든 벌들과 화음을 이룬 참깨꽃의 잔칫집 이미지로 화한다. 선명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 낳은 소박하고도 ‘자잘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화자는 이제 그 일들을 돌아볼 연치에 이르러, 그 힘들고 고달픈 일들을 ‘그리움’으로 여기고 있다. 회한이 될 일을 시인은 추억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이 시의 근간이 되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북해도로 징용 갔던 3대독자 아들이 폐결핵에 걸려 돌아왔다 몹쓸 병이 나을 때까지 아들부부를 따로 재우는 수밖에 없다고 의논들을 모았다 그날부터 아들은 할아버지 방에서, 며느리는 시부모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어른들이 모두 집을 비운 하루가 있었다 그동안 서로가 몹시도 끌렸던 젊은 부부는 환한 대낮에 몰래 죄 짓듯이 한 몸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그 일로 4대독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백날도 못 되어 애비 죽고 어미마저도 개가改嫁가 속절없이 할머니 품에 남겨졌던 그 천덕꾸러기! - 「출생기出生記」전문 ‘저주 받은 시인’ 보들레르는 여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뜨지만, 시인은 백 날도 못 되어 “애비가 죽”는다. 어미마저 개가를 해버리고 할머니의 품에 남겨지는 운명을 타고난다. 더욱이 시인의 탄생은 요행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젊은 부부의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간신히 태어난 존재이니까 말이다. 시인 부친의 죽음은 징용이라는 식민지 역사가 만들어놓은 부산물이고 어머니의 개가도 그 그늘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말하자면 시인은 역사의 개입으로 인해 이 땅에 버려지듯 태어난 것이다. 이 천덕꾸러기 시인의 탄생은 그러나 4대독자의 생명을 이으려는 할머니의 헌신으로 천애고아의 구렁에서는 건져진다. 우리는 이 시를 그의 시의 노정기의 출발로 읽어도 되겠다. 그 사이에 「엄마의 속곳 끈」이라는 시가 위치하는 걸 보면 시인은 어머니의 몸과의 합일관계라는 ‘상상계’(쾌락원칙)를 온전히 거치지 못한 채 가혹한 ‘상징계’(현실원칙)에 진입하였음이 분명하다. 남들은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이르는 경지를 나는 열 살 남짓에 벌써 다 깨쳐 버렸다네 엄마 떠나고 난 뒤 할매하고 둘이서 걸어야 했던 멀고 서러운 길 난 유독 눈물이 많아 놀다 울고 밥 먹다 울고 더러는 한밤중에 자다가도 깨어나 울었지만 내 눈물 한 번도 바닥나진 않았었지 그러나 언제부터던가 어린 마음에도 불쌍한 할매 가슴에 더 이상 못을 박아선 안 된다고 다시는 그분 앞에 울지 않겠노라고 혼자서 모질게 다짐을 했었지 오호라, 그때 이후로 난 북받치는 설움들을 그냥 꾹꾹 가슴으로 삼켜 남몰래 지그시 삭이는 법에 아주 도가 트고 말았다네 -「가슴으로 우는 법」부분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이르는 경지를 열 살 남짓에 다 깨”쳤다는 말에서 우리는 가혹한 현실에 던져진 한 개인을 본다. 시인은 어머니의 상실로 인해 ‘눈물의 왕’으로 자라난다. 어머니의 몸과의 분리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 눈물은 “한 번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길게 가지 않는다. 그는 현실원칙 속으로 진입한다. “불쌍한 할매 가슴에 더 이상 못을 박아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 시인이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북받치는 설움들을 그냥 꾹꾹 가슴으로 삼켜 남몰래 지그시 삭이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황량하고 할머니마저 어머니의 몸과 대체자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한 시인은 자신의 내면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져넣는다. 슬픔을 내면화하면서 소년은 ‘눈물의 왕’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기실 소년이 울었던 그 울음은 할머니의 그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따금씩 생의 외진 굽이를 돌아들 때면 할매는 울음 섞인 노래 홀로 흥얼거리셨네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나 나지마는 이 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안 난다는 사발가에 사이사이 “내 속을 누가 알아? 내 속을 누가 알아?” 밤을 온통 적시던 그 넋두리… 이웃 사람들까지 몰려와 달래고 달래어도 할매는 끝내 막무가내셨지 나는 지금도 문득문득 그 노래 그 넋두리 귀로 듣지만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안다고 할 순 없네 종심從心의 나이로도 그 깊고 막막한 설움의 바다를 그저 어렴풋한 짐작으로나 헤아려볼 따름이라네 - 「설움의 바다」전문 화자의 울음이 어머니의 상실로 인한 슬픔의 결과였다면 “생의 외진 굽이”에서 발원하는 할머니의 울음은 자식을 앞세우고 며느리마저 나가버린, 이제는 4대 독자 손주의 현재와 불확실한 앞날까지를 다 안아야 하는, 그 이상의 의미도 내재되어 있는 훨씬 덩치가 큰 설움, 즉 한이라 할 수 있다. 그 한을 할머니는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나 나지마는 이 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안 난다는 사발가”에 실어 퍼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설움과 한은 물(눈물)과 불(가슴이 탄다, 연기)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할머니의 몸을 몰아간다. “이웃 사람들까지 몰려와 달래고 달래어도” 끌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화자도 “종심從心의 나이로도 그 깊고 막막한 설움의 바다를 그저 어렴풋한 짐작으로나 헤아려볼 따름이”라 할 정도다. 우리는 여기서 ‘설움의 바다’라는 말에 그 속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할머니의 한은 깊고도 넓은, 또한 언제나 햇빛에 타면서 출렁거리는 바다라는 대자연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세상에 외톨이로서 자신의 내면을 삭이던 소년은 그 일로 인해 자연의 세계로 접어든다. 그 단초가 되는 시가 아래 시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어린 시절 나는 늘 길이 아닌 곳을 지나다녔습니다 이미 나 있는 길 모두들 가고 오는 그 길이 나는 싫어 등하교시면 항상 혼자만의 새 길을 걸었지요 풀꽃이 좋고 곤충이 좋고 새와 물고기가 또 좋아 들판과 시내와 산을 누비느라 정말로 마구 신바람이 났었지요 오래 전에 나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습니다만 내가 날마다 쓰는 시 역시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지칠 줄 몰랐던 어린 날의 그 마음에 다름 아닙니다. - 「늘 새로운 길」전문 이름 모를 새들이 아침저녁 숲속을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흩뿌리는 곱고 영롱한 구슬꿰미들! 그것들이 어찌 그냥 속절없이 스러져 버리거나 혹은 바람결에 실려 어디론가 영영 흘러가 버리기야 하리 나는 내 정든 고향 산자락에서 그것들 하나도 헛되지 않고 낱낱이 풀꽃들로 되살아나 봄부터 가을까지 마치도 앙증맞은 수화처럼 떠오르는 것을 예삿일로 지켜보며 자랐느니 -「풀꽃들의 비밀」전문 시인의 결핍을 무화시켜주는 매개로 등장하게 된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외톨이로 자란 그에게 사는 것이 팍팍할 때마다 그는 “길이 아닌 곳” 즉 “항상 혼자만의 새 길”을 걷는다. 그 길은 “풀꽃이 좋고 곤충이 좋고 새와 물고기”와 만나는 길이다. 또 좋아 어머니와의 분리라는 결핍이 “들판과 시내와 산을 누비느라 정말로 마구 신바람”이 나는 욕망(desire)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 자연 친화의 장면에 그런 궁색과 결핍의 구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자연 친화의 흐뭇함을 제 존재에게 얹어줌으로 삶의 윤기는 물론, 시인에의 길로 향하게 했다. 뭇사람에게는 한낱 풀꽃, 곤충, 새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을 그 자연의 세목들이 그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영감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자연의 세목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시인의 시작 자세와도 연결된다(“내가 날마다 쓰는 시 역시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지칠 줄 몰랐던 어린 날의 그 마음에 다름 아닙니다.”). 결핍의 길이 이끈 시인의 길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조동화 시학의 비밀이 여기에 드러난다. 자연 친화의 시편들은 치유의 기능뿐만 아니라 생명의 부드러운 힘을 발견하고 포용하는 일까지 떠맡는다.「풀꽃들의 비밀」에서도 “그것들이 어찌 그냥 속절없이 스러져 버리거나 혹은 바람결에 실려 어디론가 영영 흘러가 버리기야 하리”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삶에 영속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런 자연은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로 그의 피 속에 영원히 간직되는 체험을 낳았던 것이다. 이제 글을 맺을 때가 된 것 같다. 조동화의 시는 ‘종심(從心)’의 연치에 이르러 두 가지 시작의 결실을 맺었다. 하나는 사물이나 풍경, 우주가 자신의 가슴 속에 들어와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내밀한 언어로 숙성된 질료로 생성된 감각의 시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근원으로 들어가 낯선 우주 속에서 홀로 버려진 자신의 유년을 솔직히 표출함으로써, 그 결핍이 결국 자연 속에 둘러싸인 존재로 호흡하는 계기로 연결됨으로써 시인의 길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시들이다. 그 둘은 전자는 ‘단시’, 후자는 ‘산문시’라는 형식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면서 서로 마주 보며 조동화의 시를 영글어가게 한 자질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조동화는 이번 시집에서 일찍이 우리 시에서 보기 힘든 감각의 향연으로 우리를 이끈다. 또 자신의 뿌리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원천이 되는 체험을 우리에게 내놓았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조동화의 이번 시집은 우리 시사에서 돌올하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