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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서문
역자 서문 제1장 감각의 분화와 변질 탐정의 눈 눈과 혀와 코, 그리고 손가락 제2장 대중사회의 쾌락과 궁핍 고등실업자高等遊民의 공포 궁핍한 학생의 쾌락 제3장 성의 해방, 억압의 성 간통 스와핑 제4장 추적하는 나, 도주하는 나 추적하는 사진 도주의 실험 제5장 노지에서 큰 거리로 또 하나의 실험실 거리의 예인藝人들 제6장 노인과 소년-‘30년대에서 60년대로’ 매장 소년 유괴 연보(1915∼1945) 『란포와 도쿄』 초판 후기 문고판 후기(筑摩書房, 재간행판의 후기) 해설/흑과 백의 노스탤지어 『란포와 도쿄』 한국어판 번역 후기 역자 소개 |
Matuyama Iwao,松山巖
Han Taejoon,韓泰俊,
Kim Eunsil,金恩實
Kim Kyungok,金京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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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으면 각각의 등장인물에 부여된 입장이 명확하고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왜 그들이 살인사건을 통해서 만났을까 생각해보면, 우연에 의해서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각 등장인물 간의 관계는 얕고, 이야기에 드러나는 이러한 얄팍함은 란포가 그들을 타향살이라고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얕은 관계성이야말로 「D언덕의 살인사건」이란 소설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중략…) 메이지 말기의 카페는 문화인이 모이는 것으로 성립하고, 힘을 얻었다. 그러나 다이쇼 중기의 찻집은 살롱적인 유대가 없다. 하쿠바이켄에 들르던 아케치도, ‘나’도 살인사건이 아니었다면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하는 정도의 교제를 했을 것이다. 이런 얕은 관계 그 자체가 찻집을 증가시켰다. 확실히 사람들은 모여들었지만,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관계성이 도쿄를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도시 형태로 만들어낸 것이다. --- pp.21∼23 정확하게 말하자면 『란포와 도쿄』에 쓰여 있는 것은 20년대의 과거 도쿄인 동시에 단다라 문양을 한 20년대의 도쿄가 이후 백색 일색인 괴인 21면상과 같은 전자매체의 도시에 침식되어가는 20년대 리틀 도쿄의 붕괴 과정이다. 한편으로 20년대 도쿄는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그때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것들을 출현시켰다. 핵가족, 철근콘크리트주택, 고독한 실업자 등. 그러나 그 뒤안길에서 테크놀로지에 밀려 사라져간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습지대(低濕地帶)의 목조연립주택이나 골목길 그리고 거리의 예인들이다. --- pp.269∼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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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내면, 병리적 인간의 탄생
마을 전체가 공동체였던 전통사회를 가까스로 빠져나간 개인은 혼자 어떤 놀이를 즐겼을까? 란포의 소설에는 대도시적 삶의 기원이라 할 만한 다이쇼(1912~1926)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시기 사람들은 이미 카페에 앉아 익명성을 즐기며 모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네온이 켜진 도심의 밤거리를 산책하며 풍경을 즐기기도 한다. 지켜보는 누군가가 없는 도시의 생활을 해방감으로 만끽하지만 한편으로 고독한 삶에 밀폐되어 갔다. 도시는 개인과 개인의 연결고리를 쉽게 내주지 않으며, 인간관계를 옅게 한다. 단절된 세계 속에서 자아는 타인에게 마음을 닫고, 내밀해지기 마련이다. 『란포와 도쿄』는 도시적 삶의 조건 아래서 탄생한 병리적 인간을 란포의 소설 속에서 포착한다. 에도가와 란포의 「지붕 밑의 산책자」는 지붕 밑을 산책하며 아래에 사는 하숙인들을 엿보다 끝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인간의 이상행동을 그리고 있다. 마쓰야마 이와오에 따르면 이 소설은 1920대 초반에 유행했던 주택의 구조가 아니라면 나올 수 없었다. 다다미방의 개방 형태를 벗어나 벽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1인실 방이 딸린 공동주택은 사생활을 발생시키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도 함께 부추긴다. 「인간의자」는 사람이 몰래 들어갈 만큼 커다란 의자를 만들어 그 위에 앉은 사람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하는 의자 장인의 이야기이다. 『란포와 도쿄』는 이를 변태적 행각을 하는 기이한 인간의 행동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책이 읽어내는 것은 근대인이 처한 보편적 상황과 감정이다. 전국적으로 전기가 보급되자 도시인들은 오랜 시간에 거쳐 인간에게 익숙해진 체성감각 대신 시각과 청각의 자극에 놓이게 되었다. 원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청각의 세례가 도시인이 느끼는 원인 모를 불안의 한 요인이라는 분석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뛰어난 식견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란포와 도쿄』는 봉건사회에서 근대 도시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의 음습한 내면을 란포의 여러 소설들을 통해 다양하게 분석하고 있다. 관음증, 편집증, 과대망상과 같은 광기에 쌓인 인간을 만든 것은 개인과 바깥을 단절시킨 사회시스템이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압박감이 개인을 병리적 상태로 내몬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도시의 보편적 태도다. 끔찍하게도 책을 읽다보면 1920년대가 안고 있는 불모의 병리성이 현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의 증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도시는 우리 삶의 필요조건이다. 우리의 삶은 곧 도시 그 자체다. 『란포와 도쿄』의 의의는 바로 이런 도시적 삶의 기원을 탐색함으로써 현재의 딜레마를 복기한다는 데 있다. 이 글이 쓰인 시기는 1980년대로 저자는 1920년대의 양상과 유사하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서울 또한 도쿄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도쿄와 서울의 근대화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는 서울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적어도 20년 전에 이미 번역되어 출판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성을 지나쳐버린 구닥다리가 되어 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의 병리성은 심화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도시의 괴물과도 같은 불모성은 더해가지만 사람들은 환락과 소비로만 이를 덮으려 한다. 욜로, 소확행과 같은 단어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회피한다, 내면성은 촌스러운 단어로 취급된다. 과거의 진단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가치있는 탐색으로 바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시작부터 내재된 문제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문제 그 자체를 인정하고 탐색하는 출발선에 서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란포와 도쿄』와 같은 책을 읽는 인문학적 가치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