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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배
삶의 무대 위에 선 이들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
최창근
이매진 201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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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
프롤로그 | 물 위의 집들이 꾸는 꿈

1부 그 거리로 나는 간다
잃어버린 한 줌의 시간을 찾아서 ― 황학동 만물시장, 그곳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다
그래도 삶은 오래오래 지속된다 ― 혜화동 옛길, 간직한 것은 잊히지 않는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그 길로 나섰더니 ― 필동 남산길,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은 언제일까?
더 오랜 날들이 지난 뒤에도 ― 송정리 바닷가, 그때 너와 나는 함께 살았다
냇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 태백시 철암역, 어두워진 골목길로 아이들은 달려간다
단 한 번뿐인 그 순간,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들 ― 내 마음의 거리에 부치는 몇 줄의 편지

2부 그리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비뇽, 내 마음의 강과 숲으로 난 창을 열고 ― 연 선생님께
낡고 허름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 안 선생님께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의 조건을 위하여 ― 다시 연 선생님께
누가 할 것인가, 네가 아니면! ― 객석에 띄우는 편지 1, 시모비치 선생님께
마법의 춤, 사랑의 노래 그리고 흐르지 않는 꿈의 시간 ― 객석에 띄우는 편지 2, 희정에게
조금만 더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나요? ― 객석에 띄우는 편지 3, 현아에게
나뭇잎은 나무가 아닌 곳에서 무성했으리라 ― 작가가 되기 위한 길, 명지에게

3부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사랑과 죽음의 변주곡 ―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삶의 진실을 찍어가는 따라지들의 연가 ― 박근형, <삽 아니면 도끼>
저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예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로베르토 쥬코>
손자는 괴롭고 할머니는 외롭지요? ― 박상륭, <남도>
제 그림자를 향해 오열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 체호프, <갈매기>
우리는 날아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배강달, <우주비행사>
결혼, 사랑의 완성 또는 자유의 구속 ― 고골, <결혼>

에필로그 | 희망과 위안의 빛을 찾아서 ― 다들 행복하세요?
축하의 말 | 작가는 자기 자신을 기억해야 한다 ― 시인 이문재

저자 소개 1

극작가 겸 연출가이자 산문가이고 시인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최인훈 희곡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극수업을 받았다. 2001년 희곡 「봄날은 간다」를 무대 위에 올리면서 등단했다. 2012년 시 「선인장과 할머니」를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겸하고 있다. 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일상과 비일상,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신화적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9년 2월 창단하여 100여회에 걸쳐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낭독공연과 북 콘
극작가 겸 연출가이자 산문가이고 시인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최인훈 희곡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연극수업을 받았다.
2001년 희곡 「봄날은 간다」를 무대 위에 올리면서 등단했다. 2012년 시 「선인장과 할머니」를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겸하고 있다. 시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일상과 비일상,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신화적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9년 2월 창단하여 100여회에 걸쳐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낭독공연과 북 콘서트, 아시아 아프리카 시인 소설가들의 문학축제, 국제공연예술페스티벌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해온 극단 ‘제비꽃’의 대표이기도 하다. 문학을 중심으로 여러 예술 장르가 결합하는 협업 형태의 공연과 축제를 지속적으로 연출해왔다.

지은 책으로 희곡집 『봄날은 간다』와 산문집 『인생이여, 고마워요』, 『종이로 만든 배』 등이 있지만 실은 동료 작가들과 함께 쓴 책들이 더 많다. 여러 대학에서 세계의 신화와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유년 시절 밤하늘의 별을 헤며 내가 사는 이 지구와 저 별의 거리가 참으로 아득하게 멀구나, 조그맣게 한숨 쉬면서 가슴 아파하던 외로운 꼬마가 있었다. 사춘기에 그 흔하디흔한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얌전하고 조용한 모범생으로 지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른이 되기만 하면 이 좁고 답답한 고향 땅을 떠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은빛 비행기를 타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겠다고 다짐하던 쓸쓸한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꼬마와 쓸쓸한 소년은 이십 대의 화려한 청춘을 한없이 방황하며 보내다 서른을 맞았다. 문학과 연극, 영화를 비롯한 예술 전반이 청년의 주된 관심사였고 덕분에 지금은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꿈을 꾼다. 중년의 고개로 접어들고 있는 요즘 그의 관심사는 여행이다. 자유로운 여행자로 사는 것, 그리하여 머물지 못하는 여행자처럼 어디론가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나는 것. 윤후명의 소설을 좋아하고 고종석의 산문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는 20년 동안 남몰래 써오던 시를 올해부터 한 편, 두 편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망이 있다면 정처 없이 길을 떠나 그 길 어딘가에서 한 소절의 노래와 같은 시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아니, 한 줄의 시 같은 노래가 돼 바람처럼 공중을 날아오르며 대기와 몸을 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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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344g | 140*200*20mm
ISBN13
9788993985832

책 속으로

슬픔의 거리가 빽빽하게 들어찬 내 수첩의 첫머리에 황학동 만물시장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도 갖고 싶던 옛 화집들과 레코드판, 명작 비디오테이프들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 어느 해 여름에는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세웠다. 할머니의 손에는 막 구워낸 수수떡 한 장과 식혜 한 사발이 들려 있었다. 총각, 많이 좀 먹어야겠네. 그러다가 병나겠어. 그때 그 할머니가 건네준 떡 한 조각의 온기가 입때 내 핏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녀에게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체취를 맡은 것일까. 돌이켜보면 여태 나를 먹이고 입히고 키운 것은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 pp.21-22

그러던 어느 해 가을밤이었나. 피곤에 지쳐 깜박 선잠이 들었는데 습관처럼 켜놓은 라디오에 아주 낯익은 한 여자의 목소리가 꿈결인 듯 저 멀리 아득하게 밀려왔다. 어느 적막한 산사의 스님이 외는 게송과 같은 구음. 조공례의 소리를 들으며 십여 년도 더 지난 그 옛날,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한 늙은 여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별안간 그전에는 관심도 없던 그 소리가 가슴을 세차게 치기 시작했다. 그 두드림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이나 흐느꼈다. 십여 년 전에 내 곁을 떠난 그이가 실은 내 가슴속에 살아 있던 것이다. 상여 소리는 나를 지금은 떠나온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세계로 데려간다. 살아남은 자와 죽어 흙이나 바람이나 물이나 불로 화한 자들을 들쑤셔 다시 불러온다. --- pp.39-40

봄볕이 따스한 오후면 간혹 어떤 아이들은 공장의 굴뚝 위로 기어올라가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지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평화로웠고 밝고 따스한 햇살만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던 그 옥상 위에서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 편의 멋진 소설을 구상하거나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해바라기를 했지요. 한가로운 공상을 즐기다가 어떤 이는 생의 희열을 참지 못하고 지상을 향해 밑으로, 밑으로 추락하는 일도 가끔 있었지요. ……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이상했어요. 그곳은 마치 카프카의 성처럼 은밀하고 중세 유럽의 요새처럼 단단했지요. 초등학교 꼬마들이 쓸 법한 앉은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슬프게 울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도 제가 울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혀 슬프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불쌍한 녀석.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제 살을 야금야금 파먹으며 저는 그때 그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나 봅니다. ---p.69

파라솔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프랑스 여인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짜르르 하고 전류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런 걸 두고 한눈에 반한다고 하는 건지요. 키에슬로프스키의 ‘삼색’ 연작에 나오는 쥘리에트 비노슈나 줄리 델피를 닮은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주변 풍경이 저만치 물러나고 그녀의 모습만 또렷하게 눈앞으로 다가오는 느낌말입니다. 비웃으셔도 좋아요, 선생님. 어쩌겠어요. 어떤 여성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끌리는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지요. 그렇지만 용기가 없었어요. 가까이 다가가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볼 숫기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얄궂은 운명이라면 운명인 건가요? 그 혹독한 운명을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pp.76-77

히치하이킹까지 해서 고생스럽게 도착한 목적지는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한 ‘유진 볼포니’처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강 밑에 자리잡은 대형 천막이었습니다.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가 원래 예로부터 시대의 흐름과 별 상관없이 원시적인 수공업에 의지하는 작업이지만 최첨단 정보화 사회인 21세기에 19세기에나 등장할 법한 천막 안에서 공연을 하다니요. 저는 모처럼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어떤 짜릿함 비슷한 흥분을 맛보았습니다.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심장이 쿵덕거리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발표를 앞두거나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 습관처럼 찾아오는 팽팽한 긴장감이었지요. ---p.93

비가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또는 하늘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제게 내려앉던 날.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책을 읽으며 서성이다가 그런 저녁 무렵 신발을 꿰어 차고 발길 닿는 대로 몇 시간 거리를 헤매다 돌아올 때면 한순간 온몸에 확 불을 끼얹은 듯 강렬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혔지요. 그런데 그때 그 느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기 싫은 날들이 몸살을 앓듯 한차례 무너진 몸을 훑고 난 다음에야 겨우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던 시간들. 그 황홀한 순간들은 자주 오지 않기에 제 몸 위를 스쳐 지나간 바람 같은 손님을 다시 기다리는 거지요.---pp.150-151

나는 최근에 큰맘 먹고 안산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어. 이사한 집은 지대가 높은 산 밑이라 아침에 눈을 뜨면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지척에 숲이 있어 창문을 열면 곧바로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튼 까치집을 발견할 수 있단다. 밤이 되면 서울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와 한참동안 넋을 잃고 정신을 팔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지붕 위로 투닥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낮잠에 빠지기도 해. 집은 작아도 자연과 가까이서 벗할 수 있으니 내겐 꼭 맞는 곳이지 뭐. 가끔 바람이 불면 멀리서 조그맣게 하늘거리는 나뭇잎들의 은밀한 속삭임에 온몸을 내맡길 때의 기쁨을 너는 알까? ---p.198

예상한 대로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서울역과 노량진 부근의 학원가를 배회하는 길고 지루한 나날들이 지나갔지.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보게 된 연극이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이퍼가 쓴 「에쿠우스」야. 지금은 벌써 중견 연출가가 되신 김아라 선생이 연출하고 소년 알런 역으로는 최민식, 정신과 의사인 마틴 다이사트 역으로는 신구 선생이 출연하셨지. 그것이 연극에 매료된 첫 번째 계기였단다. 그날 공연이 끝난 뒤 한참이나 불 꺼진 객석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몸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채로 멍하게 앉아 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으니까. 파도처럼 밀려오던 전율 같은 그 행복한 충격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연극을 향한 어떤 경외감 내지는 열망을 일깨워준 무대였고 그 뒤로 공연장으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진 듯싶어. ---p.202

이제, 객석에 불이 꺼지면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듯 타인의 것인 노인과 그의 아내, 읍장과 치과의사, 인디오와 수색대와 누시뇨의 삶을 연기한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은 진실해진다. 일상생활 속에서 배우들은 오히려 연기를 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의 진정한 삶은 무대 위에서만 오롯하게 드러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배우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극장이라는 텅 빈 공간을 자신의 격렬한 숨결로 채워나간다. 막이 오르고 연극이 시작되면 바로 그곳에서 이 세상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pp.219-220

출판사 리뷰

“연극은 인생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아비뇽 축제까지,
내 생애 최고의 무대를 찾아 떠난 청춘의 편지!

‘종이로 만든 코믹우울몽상가’ ― 시 쓰는 극작가 최창근의 느리게 읽는 산문집

극작가 최창근한테는 ‘종이로 만든 것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현실감 없게 마른 체형, 느린 움직임, 느린 말투. 한번이라도 최창근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시인 이문재는 축하의 말에서 최창근을 ‘코믹우울몽상가’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별명이라는데, ‘코믹’은 유머, ‘우울’은 이 시대와 문명을 보는 표정, ‘몽상’은 바슐라르가 말한 창작의 원형을 뜻한다고 한다.
《종이로 만든 배 ― 삶의 무대 위에 선 이들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는 종이로 만든 것 같은 코믹우울몽상가 최창근의 첫 산문집이다. 최창근은 2001년 첫 희곡을 무대에 올리며 연극 동네에 발을 내디딘 뒤, 무대 연출과 비평까지 겸하면서 전방위 연극인으로 활동해왔다. 최근에는 20년 동안 남몰래 써온 시를 조금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계의 변방에서 극작가로 사는 동안, 작품에 다 담지 못한 내면의 부침과 사유를 담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써내려간 글을 엮었다. 책 제목은 유제니오 바르바의 《연극인류학》 한국어판 부제에서 따왔다. 바르바가 연극의 흐름을 따라 고대에서 오늘날까지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듯, 최창근도 이 책에서 유년의 거리에서 지금 서 있는 자리까지, 대학로 소극장에서 아비뇽 축제까지, 삶의 무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어느 극작가의 편지 ― 삶의 무대를 찾아 연극하고 여행한 청춘의 기록
1부에는 거리에 관한 기억을 담았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최창근을 사로잡은 장소에 관한 기록이다. 슬픔의 거리가 빽빽하게 들어찬 수첩의 첫머리에 황학동 만물시장이 있다. 차와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한 시장에서, 최창근은 옛 화집과 레코드판, 어항 속 거북이 한 쌍을 정신없이 구경하며 주말을 보냈다. 혜화동 옛길은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난 장소. 다시 그 길을 걸으면서 목련을 닮은 친구의 눈부신 웃음을 추억하고, 필동 남산길 한 여자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는 어느 겨울 그곳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던 소설가 박완서를 떠올린다. 아침에 널어놓은 빨래가 저녁이면 까맣게 변하는 곳, 한때 탄광촌으로 번영한 태백시 철암에는 어릴 적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유년의 거리가 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명창 조공례의 소리를 듣고 그 시절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아직도 가슴에 살아 숨 쉬는 장소. 이 거리들은 그대로 최창근이 거쳐 온 삶의 길로, 길목마다 극작가로 성장해가는 소년, 청년의 최창근이 보인다.
2부는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엮었다. 세계 최대의 연극 축제로 손꼽히는 아비뇽 페스티벌 현장에서 띄운 편지가 눈에 띈다.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틈에서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열흘’을 보내면서, 극작가의 눈으로 본 축제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아비뇽 유수의 역사가 깃든 중세 교황청 건물을 무대로 삼은 웅장한 고전극,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강가의 대형 천막에서 열린 황홀한 서커스극 등을 관람하며 연극의 기원과 동서양의 연극 전통, 세계 각지의 축제 문화에 관해 사유하는 비교인류학적 깊이가 엿보인다. 그밖에 한 선생님과 생태 예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 생태적 연극의 방향을 고민하며 쓴 편지, 세르비아의 국민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무대에 올린 뒤 시모비치에게 보낸 편지 등이 실려 있다.
3부는 ‘소풍을 가듯 즐겁고 여유로운 기분’으로 관람한 여러 공연에 관한 기록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을 보고 인간과 세계의 질병을 영적으로 치유하는 예술가의 소명을 생각하고, 박상륭의 <남도>를 각색한 연극을 보고 문명사회의 터부에서 해방된 인간의 원형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역 사투리로 작품을 쓴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고민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체호프의 <갈매기>, 결혼 제도의 허위를 폭로한 고골의 <결혼>에 관한 평 등 극작가 최창근의 예술적 토양과 관심사를 잘 보여주는 글이 실려 있다.

‘후위’의 예술을 꿈꾸며 ― 삶의 무대 위에 선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위안의 편지
은사에게 보내는 최창근의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시대에 아방가르드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듣고, ‘이 시대의 전위는 역설적지만 후위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산문에서 드러나는 최창근의 글쓰기와 삶의 방식이야말로 모든 것이 전위인 이 시대에 귀중한 후위가 아닐까.
최창근의 글에는 ‘운명’, ‘영감’, ‘영혼’, ‘진리’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온다. 시선은 현재나 미래보다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것에 주로 머문다. 힘주어 말하는 문장보다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문장이 많다. 독하고 쿨한 산문이 환영받는 요즈음, 나직하고 느린 최창근의 목소리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 묻혀버리기 쉽다. 자주 ‘우울’하고 ‘몽상’에 빠지는 최창근은 ‘코믹’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지한 자세로 예술의 소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글과 삶은 하나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무리에 끼어 떠들썩하게 어울리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코믹우울몽상가’는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후위’의 예술가다. 최창근이 희망과 위안을 담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띄운 스무 통의 편지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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