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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호명된 이름과 호명할 이름 2. 우연, 필연 같은 우연 3. 필연, 우연 같은 필연 4. 안과 밖 5. 진실 혹은 거짓 6. 현재 혹은 과거 7. 어둠과 빛 8. 가상 혹은 현실 9. 디 - 데이 혹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 다시, 프롤로그 작가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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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윤수는 머리를 훤하게 밀어 반듯한 두상을 자랑하는, 존경받는 스님일지도 모른다. 혹은 배가 나와 멜빵을 즐겨 매는, 유쾌한 제과점 주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학생들의 말에 끊임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삶의 보람을 찾는, 모교의 교소일 수도 있다. 그의 삶은 그의 삶이므로 무엇이든 나와는 상관없다. 가끔씩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한 폭의 기억, 나에게는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억이며 또한 유의미한 기억이다. 과연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억은 과거에 속하는가 아니면 현재에 속하는가? 또한 의미 있게 상상하는 미래의 그림은 과연 미래에 속하는가 아니면 현재에 속하는가? 하여 세월이란 말은 사건의 발생을 두려워한 나머지, 삶의 빛을 가리기 위해 고안된 잔인한 혈통에 속하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 p. 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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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리스도란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의 공휘에만 피상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인가 기독교란 신앙자체가 가진 고유한 구조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던 것 같아. 예수처럼 자기 자신을 불합리하게 희생해야 할 상황을 항의 한번 없이 수용하는 태도보다는 자신이 처한 실존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자기 신앙의 순전함을 걸고 신앙적 극한까지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훨씬 기독교적이라고 본거지....'
--- p.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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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시엔의 문}에 대하여
<아비시엔의 문>은 1998년 하반기 <작가세계>신인상 장편부문 수상작이며, 수상 이후 1년 6개월 간의 수정작업 끝에 첫 선을 보이는 신인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살았던 이란의 철학자 아비시엔의 이름을 소설의 제목으로 차용한 데서도 드러나듯, 이 소설은 인식의 큰 틀이 바뀌고 있는 현재의 지평에서 '자아와 영성(靈性)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품에 대하여-나는 누구이며,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n이란 화자가 자아를 찾아가는 일종의 성장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했고, 내면에 상처를 가진 결여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결여된 그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타자와의 만남이나 다양한 매개물들(음반, 그림, 유서, 책, 지도...)을 통해 '아비시엔의 문'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시엔의 문'에 이르는 과정은 전혀 단선적이지 않다. 그것은 각각의 이질적인 삶을 다양한 소재들을 동원해 추리 소설적인 기법으로 정교하게 봉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삶이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 받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세팅인 것이다. 때문에 묵직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진행은 속도감이 있을 뿐 아니라, 설치작품처럼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주요 등장인물 n-작중화자. 철학과 학생. 삶의 이면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가진 인물.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아비시엔을 찾아 떠난 친구와 과 선배의 행방을 추적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아에 눈을 뜨기 시작함. y-n의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어머니의 가출로 인한 모성애 결핍이 있음.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아비시엔 사막의 사원에서 선지자를 화폭에 담기 위해 사막으로 사라짐. x-신학적인 문제로 고민하다 아비시엔 사막으로 떠난, n의 같은 과 19년 선배. k-n의 같은 과 선배. 그림에 대한 상당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으며, 쌍둥이 오빠의 자살로 인한 상처를 가진 존재. n과 같이 아비시엔 교도들의 접신 의식을 치루기 위해 별장으로 길을 떠남. 줄거리 형제처럼 지내던 화자의 막내외삼촌이 '영원하면서도 개성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과정을 통해 화자인 n은 막연하지만 '영원하면서도 개성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1장 [호명된 이름과 호명할 이름]). 고등학교에 진학한 작중 화자는 y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며, 둘은 자유로운 수업을 고집하는 음악선생에게 깊은 감화를 받는다. 그러나 학교와 마찰로 학교를 그만둔 음악선생은 유서를 남기고 사라지고, y는 여자친구와 함께 사원에 있는 '본질적이면서도 신성한 것'을 찾아 아비시엔 사막으로 길을 떠난다. 의미 있는 존재들의 갑작스런 부재는 화자인 n의 삶에 큰 상처를 남기며, n은 철학을 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2장 [우연, 필연 같은 우연]). 대학에서 책에만 묻혀 살던 n은 묘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빨간 표지의 책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그 책을 몰래 들고 나온다. 그 책은 고대어로 쓰여졌으며,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정도의 추측만 가능할 뿐,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그러나 n은 책의 속표지 안쪽에 붙어있던 오래된 대출카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책의 대출자가 오래 전에 선지자를 찾아 아비시엔 사막으로 떠난 철학과 선배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선배 k의 도움을 받아, 아비시엔 사막의 선지자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게 되며 둘은 아비시엔 교도들의 접신 의식을 k아버지의 별장에서 치르기로 합의하고, 그 다음에 아비시엔 사막을 찾아 같이 떠나기로 약속한다(3장 [필연, 우연 같은 필연]). x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아비시엔 사막에서의 사건들과 n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별장에서의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현실의 공간인 별장의 인물들과 환상의 공간인 아비시엔 사막의 인물들이 아비시엔의 문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삶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자각인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난 해마(海馬)였지만 이제 나는 나일 뿐이다. 친구들이여 이제 버텨나가자 꿈은 끝났으니까." 아비시엔이란 무엇인가 소설의 제목을 구성하는 '아비시엔'은, 소설 속에서 영성을 상징하는 선지자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인위적인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선지자가 묻힌 사막의 이름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제를 이루는 핵심에 '아비시엔'이란 이름을 대응시킨 것은 현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시선 때문이다. 신화학(神話學)의 대가이며, 신화방법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던 프랑스의 비평가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은 현대 산업 사회의 여러 위기의 기원을 13세기까지 소급해서 찾아낸다. 그는 그 실체를 "아비시엔(Avicienne)에 대한 아베로에스(Averroes)의 승리"로 해석한다. 뒤랑은, 현대의 위기가 그노시스적(覺) 인식을 주장했던 아비시엔의 입장이, 이성적인 분석에 집착하는 아베로에스 철학에 의해 밀려나 서구인식론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해한다. 아베로에즘의 입장에서 인간은, 중개자 없이는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며, 그 결과 인간은 합리적인 개념주의의 틀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뒤랑은 이런 인식의 확산 과정이 개개인에게 내재된 영성의 발산을 교회라는 인위적 제도가 독점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작가는 그노시스적인 인식과 물질적 합리주의가 대립하고, 점차 물질적 합리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그 시기의 인식론적인 구도에 주목해 작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며, 그 과정을 통해 근대사회의 어느 후미진 창고에 버려진 '신성, 영성, 신화'와 같은 '진부한' 덕목들을 의식의 수면으로 애써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아비시엔의 문}에 대한 평 {아비시엔의 문}은 잘 짜여진 한 폭의 페르시아산 카페트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서로 결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예리한 관념의 바늘을 사용해 대단히 낯선 풍경을 직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과 음악은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과는 다른 퓨전적인 지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이나 음악이 소재적인 차원으로 전락하지 않고, 소설의 내적 구조와 유기적 연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치밀한 계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쉽게 읽힌다. 이는 {아비시엔의 문}이 기본적으로 성장 소설의 성격을 바탕에 깔고 있는 데다, 속도감 있는 문체에 추리 소설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궁극적인 미덕은 그 주제의 진지함에 있다. 소설의 각 장을 이루는 '우연과 필연' '안과 밖' '진실과 거짓' '현재와 과거' '어둠과 빛' '가상과 현실'은 근대와 탈근대 논의의 접선을 이루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들이기도 하다. 이런 현재적인 논의에 대해 작가는 소설이란 방식을 매개로 강하게 개입하고 있고, 또한 영성(靈性)의 문제를 진지한 성찰의 대상으로 포착하고 있다. 내용적으로 이 소설은 일종의 관념소설의 계보와 연결되겠지만, 소설의 후반부는 대단히 판타스틱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명칭에 잘 부합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