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작가의 말
에움길 안개주의보 비정성시 잘 가라, 미소 유리집 는개 봉인된 시간 하수도 소리의 장례식 해설 | 비정성시(悲情城市)의 욕망을 응시하는 | 고명철 |
|
단련된다는 말, 믿지 않는다. 고통은 매번 날것인 채로 다가온다. 진창길을 너무 오래 걸었다. 그 길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 있을 때마다 소설이 곁에서 내 말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지은 두 번째 집을 세상에 내놓는다.
무책임한 긍정은 도저한 허무보다 해롭다. 갈수록 뻔뻔해지는 세상에 맞서 내 글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지의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주술처럼 이 말을 남긴다. 기어이 살아서 또 만납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거기는 아침저녁으로 짙은 해무가 고여드는 곳이다. 산허리를 툭 베어내고 도로를 만들었는데, 언제나 해풍은 도로 옆 가파른 절벽 아래로 안개를 부려놓는다.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은 이곳이 도로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안개의 점성을 이기지는 못한다. 사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 「안개주의보」중에서 주희가 열세 살 되던 해, 회사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당시 비조합원이었던 그는 회사의 간부들과 내통하여 노조의 동향을 알리거나, 조합원들을 이간질시키는 프락치로 몰려 조합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고 그들에 의해서 암매장되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실종 보름 만에야 알 수 있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폭행 가담자는 다섯 명이었고 아직 숨이 멎지 않은 그를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다고 했다. 모두 동4갱 작업반 사람들이었다. --- 「비정성시」중에서 아내는 내가 주말마다 산에 간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이 아파트 10층이 나에게 산이고 놀이동산이고 천국이었다. 아파트 정원에서 일부러 등산화에 흙을 묻히고 귀가하기도 했다. 이상한 것은 그녀가 있을 때보다 그녀가 없는 아파트가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었다. --- 「잘 가라, 미소」중에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리석은 삶의 날로부터 떠나가는 영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하늘로 오르지 않고, 절절히 뼛속에 남아 부서지고 쪼개지고 갈려서는, 마침내 는개와 같은 흰 가루가 되어 그의 바다에 뿌려지리라. 백시복은 또 한 권의 유고 시집을 낼 것이고, 추모행사를 기획할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이를 통해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피어오르는 그의 영혼을 바라보며, 나는 는개처럼 뿌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 「는개」중에서 농촌 총각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처럼 살아가는 아내의 외로움과, 귓구멍이 막힌 귀병신 아들의 숨 막하는 답답함과, 무능한 대학 강사인 남편의 절망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하모니는 그 자체로 상처의 지도이다. 이 작은 가정의 풍경에는 요즘 유행하는 디아스포라도, 장애아의 사회적 소외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제도적 불평등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산의 고통을 찾아 탈북자나 이주 노동자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 가족 안에 디아스포라가 있고, 처절한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고, 우리 사회 지식 노동자의 현실이있다. 사회학 전공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가정은 그 자체로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축도이다. --- 「봉인된 시간」중에서 하릴없이 한 생명에게 허탈한 시선을 던진다. 붉은 고무 함지에 심겨진 은행나무다. 집주인이 어디서 캐다가 심은 모양인데, 봄이면 연둣빛 새잎도 돋아나고,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 한여름의 땡볕 속에서도 푸른 잎을 키워내며, 가을이면 잎을 노랗게 물들이고 작은 은행도 맺는다. 지금은 모든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앙상한 검은 가지로 남아 있다. 저 나무의 체관 속에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몇 방울의 물이 있어 이 겨울을 이기고 있는 것이겠지. --- 「소리의 장례식」중에서 --- 본문 중에서 |
|
안개에 갇힌 사람들,
고단한 이 생(生)을 욕망하다 지난 2010년 첫 소설집 『숨결』을 펴냈던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김정남이 두 번째 소설집 『잘 가라, 미소』를 내놓았다. 2002년 『현대문학』에 평론이, 200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작가 김정남은 이번 소설집을 통해 비정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단련된다는 말, 믿지 않는다. 고통은 매번 날것인 채로 다가온다. 진창길을 너무 오래 걸었다. 그 길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 있을 때마다 소설이 곁에서 내 말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지은 두 번째 집을 세상에 내놓는다. 무책임한 긍정은 도저한 허무보다 해롭다. 갈수록 뻔뻔해지는 세상에 맞서 내 글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의 말」에서 드러나듯 작가의 생각은 분명하다. 무책임한 긍정은 도저한 허무보다 해로우며, 갈수록 뻔뻔해지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글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것.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들 속 세상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처럼 안개가 잔뜩 낀 희뿌연 곳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중략)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는 바로 그 안개.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세상에 한숨을 내쉰다.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머언 바다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점점 농도가 짙어가는 해무(海霧)는 소도시의 사위를 순식간에 에워싸고, 그 실체를 정확히 식별할 수 없어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은폐하든지, 굴절된 욕망을 드러내든지, 아니면 욕망의 맹목에 붙들려, 결국 자신을 비롯한 타자의 파국에 직면하는 황폐화된 풍경……. -고명철 해설, 「비정성시(悲情城市)의 욕망을 응시하는」중에서 세상의 병적 징후를 읽어내는 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미학 『잘 가라, 미소』속 인물들은 저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비정한 세상은 그들에게 연민을 베풀지 않는다. 「에움길」의 영웅은 대학 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와 만나지만, 그녀는 이미 룸살롱의 마담으로 전락한 신세다. 자신도 대리운전을 하며 가까스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한다. 「비정성시」의 여자는 남편을 잃고 퇴폐이발소에서 손님들에게 마사지와 자위를 대신 해결해주는 일을 한다. 「봉인된 시간」의 부부는 경제난에 허덕이다 지방으로 내려가 살 집을 찾는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대학 시간강사, 시간제 교사, 퇴폐이발소 직원 등등. 뿌연 세상 속 숨겨진 그들의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그려진다. 때때로 그것은 여관방에서 포르노를 보는 남자의 모습으로, 퇴폐이발소에서 자신의 성기를 낯선 여성에게 맡기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욕의 향연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거친 ‘날것’의 묘사들은 불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세상의 어떤 부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거기는 아침저녁으로 짙은 해무가 고여드는 곳이다. 산허리를 툭 베어내고 도로를 만들었는데, 언제나 해풍은 도로 옆 가파른 절벽 아래로 안개를 부려놓는다.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은 이곳이 도로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 실제로는 안개의 점성을 이기지는 못한다. 사건은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안개주의보」중에서 이런 세상에서 대책 없는 긍정은 차라리 무책임한 것. 고단한 생(生)을 이어가는 인물들에게는 안개의 점성을 이겨낼 재간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허무에 빠져든다. 허무의 포지션으로 자신들의 보호벽을 세운 사람들. 『잘 가라, 미소』는 괴물이 된 세상에서 괴물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다. 이 세상, 자본주의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주변부 밖으로 밀려났거나, 점점 아래로 떨어져가는 사람들이다. 김정남의 소설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그 병적 징후를 읽어내며, 비극에 놓인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낸다. 대책 없는 긍정이 아닌 허무를 지나고 나서야 얻게 된 그 귀한 연민. 그들은 아파하되 끝내 무너지지 않는다.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자신들에게 남은 욕망이자 운명인 것처럼. 절망도 희망도 쉽게 제시하지 않지만 그만큼 신중한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잘 가라, 미소』가 지닌 고유의 미덕이다. 쉬운 희망은 그만큼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