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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주역이란 무엇인가 占이란 무엇인가 공시성 주역의 구조 모든 占의 선택과 결과는 서로가 독립적이다 2장 서법과 역경의 성립 점서법 효에 높고 낮음이 없다 변괘와 괘변 숫자괘의 등장 - 象은 없었다 역경의 성립 괘와 상 - 그 기원에 대해 괘의 이름에 대해서 - 괘사와 효사의 관계 3장 괘변, 그 모순의 체계 매혹적인 판단 방식, 괘변 괘변의 정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괘변의 본질적 한계 계사전과 괘: 괘변의 연원 해석학적 읽기의 자의성 - 무의미에의 의미 개입 선후천 괘, 음양오행 4장 역경의 언어 역경의 언어와 은유 상의 등장, 관계와 설명 논쟁적인 역경 언어의 기준 은유와 詩歌 古來의 의문들: 元亨, 利貞과 孚 나무 은유와 상하 은유, 상형문자와 표의문자 5장 주역이란 무엇인가 점과 언어, 부호 텍스트로서의 주역 역전은 권위 있는 해석인가 역경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역경, 어떻게 읽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用九와 用六이 만들어 내는 세계의 크기에 대해서 점을 쳐도 되는가 책 쓰면서: 술과 나, 너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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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역경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하여, 텍스트(text)로서의 주역의 의미와 역경과의 차이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으로 끝맺을 생각이다. 철학은 위대하다. 주역에 관한, 또는 주역이 제시하고 있는 철학도 위대하다. 나는 그 점을 부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실로 나는 주역에 의해 누구 못지않게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만을 주제로 다룬다 해도 철학적인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철학에 필요한 연구 방식을 가져야 하며, 철학의 기반이 되는 조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알려진 철학이야 받아들이는 것이 쉽다. 그러나 지식은 발전하는 법. 모든 지식은 언제나 무너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식의 본질인 것. 그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에 관한(about) 의문이다. 주역에 한정할 것 같으면, 주역 철학에 의문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갖느냐? 그 기반이 되는 역경에 대한 의문부터 해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점에 대해 고찰해 보겠다. 철학과 점이 무슨 관계? 읽어보시면 이해가 되시리. 아니, 그러기 전에 꼭 하나 기억해 두시라고 권하고 싶은 역경과 역전의 차이가 있다. 이 점은 책의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경은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을 위주로 하는 텍스트이고, 역전은 설명을 위주로 하는 텍스트이다. --- p.5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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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12유파와 양파 6종
주역은 하나라 때의 연산역(連山易), 은나라의 귀장역(歸藏易)에 대비해 주나라의 역(易)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며, ‘경(經)’과 ‘전(傳)’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모두 해서 2만 4천 자 정도로 구성되어 있단다. 그리고 그 유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해설이 분분했다. 하안과 더불어 위진 현학(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위나라 학자 왕필에 따르면, 주역은 복희씨가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하도(河圖)-을 보고 계시를 얻어 천문지리를 살피고 만물의 변화를 고찰하여 처음 8괘를 만들고 그것을 보다 발전시켜 64괘를 만들었다고 하고,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에 따르면 주역은 복희씨가 8괘를 만들고, 문왕이 64괘와 괘사(卦辭) 및 효사(爻辭)를 만들었다고 한 반면, 융마라는 이에 따르면 주역은 괘사를 문왕이 만들고, 효사는 주공(周公)이 만들고, 십익(十翼)은 공자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에 따른 해석은 더 복잡했다. 170여 가문, 3천 여 주와 소가 있을 정도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주역을 연구하는 방식에 따라 12유파와 양파 6종으로 구분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 중 12유파는 송말 원초 정역동(丁易東)이 『역통론(易通論)』에서 역학을 연구하는 방식을 12유파로 분류한 데서 기원한다. 반면 양파 6종은 1772년 청나라 건륭제의 주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찬집되면서, 역학의 유파를 양파 6종으로 분류한 데서 기원하는데, 두 가지 큰 흐름으로 의리파(義理派)와 상수파(象數派)로 나뉜다. 안이 아닌, 밖에서 본 주역 이쯤 되면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다는 칸트나 헤겔이 무색할 지경이다. 주역이 과연 그리도 심오하고 난해한 책인가? 사전적 지식에 따른다면 주역은 역전 ‘계사편’ 등을 통해 음양의 상호 작용을 철학의 범주로 격상시켜 세상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통일된 체계로 조성함으로써 진대 혹은 한대 이후의 중국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주역은 세계관 혹은 세계 체제의 문제 아닌가? 만일 그런 거라면 그리스 시대 이래 숱한 철학자들이 쏟아 놓았고, 이미 그 진위 여부가 가려지거나 아니면 진위가 문제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역만은 어째서 아직도 해석이 구구하며, 심지어는 서양 학자들에게 노장(老莊)과 더불어 3대 현학(玄學)으로 꼽힐 정도로 난해하다고 인정받는 걸까? 이 책을 만드는 과정이 즐거워진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던 중 다음 대목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오랜 옛날부터 누가 이렇게 글귀를 해석했는데 또 다른 누구는 이렇게 해석하고, … 찾아낸 자료를 조사해 볼 것 같으면,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이것이 그동안 고대부터 행해 왔던 기본적인 연구 방법의 하나였다. 물론 최근 고고학의 발견을 통해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연구자들은 주역 속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집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 내부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만, 밖에서도 바라보아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다. 주역을 알려면, 주역 속에서 헤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주역 밖에서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밖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주역을 아는(within) 것이 아니라 주역에 관해서(about)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타(meta)-주역의 관점을 지닐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문 53쪽) 현대 인문학과 주역의 만남 도대체 어떻게 해야 주역을 안이 아닌 밖에서 볼 수 있는 걸까? 저자는 현대 인문학의 학문적 성과를 접목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고고학과 논리학, 기호학, 인지언어학이 이룬 성과를 주역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선 고고학과 기호학, 인지언어학의 힘을 빌려 주역을 이루는 두 구성 성분 ‘역경’과 ‘역전’이 서로 다른 성격의 것임을 보여 줄 수 있다. 역경은 무당이 올린 보고서이다. 무당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보여 줄 뿐이다. … 그러나 역전은 역경을 기초로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설명서이다. … 설명서와 보고서는 다른 것이다. 역전에는 은유의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역경과 달리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점을 2장에 이어 괘변과 관련해서 다룬 것이 이 책의 3장. 역경은 은유에 의해 환기되고, 역전은 상징과 철학에 의해 환기되는, 그 차이는 매우 크다. 그렇다. 표현의 체계와 설명의 체계는 서로 다른 체계인 것이다. … 주역에서 理를 찾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역전을 빼고 난 역경에서 理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 보기에 당찮은 말이다. 역경은 설명을 하는 텍스트가 아니다. 그냥 무당과 세상이 만나서 이루어 낸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그 공간을 우리는 글자를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고. (본문 329-330쪽, 333쪽) 그럼에도 주역 연구자들은 그것을 체계화하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단彖과 상象에 쓰인 상은 기껏해야 10여 개 안팎이다. 그러나 설괘전에는 190여 개. 전은 경보다 수백 년이나 뒤에 나온 것. 왜 미래의 자료를 가지고 과거를 설명하려 하나? 왜 늘어났는가? 결국 서사筮辭를 설명하기 위해서,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형식적으로 연역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본문 217-218쪽) 거짓일 수 없는 주역의 세계 이 같은 비판을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역 연구자들의 비판이 없을까. 저자가 다음과 같이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도 다분히 그런 가능성을 의식해서일지 모른다. 그래, 상수파가 주장하듯이 역경의 괘효사가 모두 상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글자가 상을 표현한다 하자. 상에서 괘효사를 끄집어 낼 수 있다 하자. 그래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걸까? 그런 방식은 대체로 이와 마찬가지이다. 원숭이가 자판을 두드린다고 하자. 우주 너머의 시간까지 여유가 주어진다면, 역경 한 편이 그 속에서 우연히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자판 활자들 간의 조합이 무한할 테니까 말이다. … 수없이 많았던 상수학자들의 그 많은 괘변 방식과 도식은 과연 서로 간에 검토나 제대로 해 보았을까? 토론이야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힘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본문 218-219쪽) 저자에 따르면 8괘의 상징 내용도 설괘전에만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행이 일관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역경에는 상징이 거의 엿보이지 않으며, 방향도 없다고 한다. 역경은 8상과 같은 상징이 아니라 은유로 세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역경 64괘 384효를 나타내는 부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거울(mapping)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의 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손가락에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무수한 철학이 뛰어논다. 마음껏. 그 ‘참’과 ‘거짓’ 여부는 절대로 역경의 부호에서 찾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긴 그러니까 뛰어논다. “의미 없는 부호가 의미 있다”는 허위의 전제를 갖고 있으니까 마음껏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그 주장들이 진실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이미 현대 논리학이 내려놓았다. 저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원용하면서 “거짓인 전제에서 연역된 모든 명제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가 없다.”고 밝힌다. 주역, 철학서가 아닌 점서 최종적으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주역이 철학서가 아닌 점서(占書)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공자는 위편삼절(韋編三絶)에 이를 정도로 주역에 빠졌다던데…. 우리나라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주희 같은 거유도 『역학계몽』을 남겼고, 다산 정약용 같은 실학의 선구자도 『주역사전(周易四箋)』을 남겼는데…. 하지만 그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주역의 텍스트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고대인들의 의식과 행동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貞人을 왕이 대신할 정도로 중요했던 그 행위가 바로 복서卜筮가 아니었던가. … 주역이 역경을 배경으로 권력자가 된 것은 아마도 역사적 우연일 것이다. 주나라 이후 분산된 권력에서 춘추전국이라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 제의의 역할은 감소되고 권력과 생산, 인간의 도전이 일어선다. 소위 백가쟁명이 그 표현 아니겠는가. 점서인 역경을 역전으로 감싸 안아 그들의 정당성을 확인하려 했던 유학도 바로 그 표현 중의 하나 아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은나라는 물론이고 주나라 왕실의 권위도 점점 의문시되는 때였다. (본문 337-338쪽) 게다가 주역 자체가 가진 매력 또한 강력하다. 아마도 그 이유의 하나는 추상성과 논리가 주는 매혹적인 형식 때문일 것이다. 존재의 질서가 관계로부터 추론된다는 그 질서에 대한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실로, 자유, 그것을 제공한다. 해방, 구속되지 않도록. 형식화는 실로 다양한 체계를 마련해 준다. 직관도 가능케 한다. (본문 222쪽) 왜 새삼 주역의 발견인가? 저자의 이 같은 결론에 거부감을 표출할 이는 적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우선 정치학 박사이지, 동양학 전공자가 아니다. 그런데 오경 중 으뜸이라는 주역에 대해 감히 점서(占書)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논리적 반박은 다음이고 우선 감정적으로도 반발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왜 쓰려 했던가. 무엇을 밝히려 했던가. 아니면 말하려 했던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관심사를 풀어 가려고 했던가. 사실, 바로 저 마지막 문장이 놓쳐서는 아니 될 점이다.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찾고자 하는 대상과 찾아내는 것의 핵심을 결정한다. 권위를 좀 빌릴까. 易云, 詩云, 孔子曰처럼. 권위와 지식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 지식과 권력도 함께 가는 것.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인가 누군가가 말했다고 들었다. 20세기의 특징은 방법의 발견에 있었다고. 실로 그러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배운 방식을 가지고 역경과 주역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람직한 출발이었다. 시각이 달라야 다른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진실에 가까운 사실이다. 그러니까 관심사라는 것도 기실은 관점과 방식에 많이 의존한다. 역전의 관심은 유학의 관심이 아니었던가. 유학이 가졌던 세계관을 역경을 통하여 세상에 풀어 내리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가. 역경에 대해 책을 쓰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만의 관점을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그 점을 다른 대부분의 책과는 달리 명확하게 의식할 뿐이다. (본문 328쪽) 융이 그의 저서 『공시성(synchronicity)』(1973)에서 ‘주역이란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구한 답은 ‘고을은 개축해도 우물은 개조하지 않으니,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없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물을 길으니, 우물물이 말라버린다. 우물을 파지 않고 항아리를 부수니 흉하다’(본문 56쪽)는 것. 저자는 이것이 참으로 주역에 어울리는 적절한 답이라고 감탄한다. 그에 대한 동양학 전공자들의 의견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