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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인류학, 체육관
고전적인 민족지 연구자가 연구를 위해 하나의 마을이나 소집단에 직접 들어가서 현지의 언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 장기간 더불어 생활하듯이 이 책의 지은이는 ‘사람들은 왜 권투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기 위해 권투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상호작용하는 삶의 현장, 즉 권투 체육관으로 직접 찾아 들어가 권투의 언어를 배우고 권투인들과 더불어 생활한다. 이 책에서 연구를 위해 선택된 곳은 우리나라의 사설 권투 체육관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영등포에 위치한 거인체육관이다. 거인체육관은 세계 최초로 여성 복싱 8개 기구 통합 챔피언에 오른 김주희를 비롯해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한 전통과 명망이 있는 곳으로서 그곳에는 그곳만의 특별한 몸의 기술들이 존재하며 그 기술들은 체육관원들 사이의 모방을 통해 자연스럽게, 혹은 관장과 선배들과 동료들의 가르침을 통해 의도적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수된다. 따라서 권투에 갓 입문한 지은이가 스스로의 몸을 권투 선수의 몸으로 길들이는 데 거인권투체육관식의 프로 권투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권투와의 지속적 관계 맺기를 통해 초심자의 몸이 권투 선수의 몸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책의 전반적인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면, 지은이가 권투를 매개로 거인체육관의 사람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는 이 책의 또 다른 줄기를 이룬다. 책의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체육관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사람들이 왜 굳이 때리고 맞아가면서 권투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흥미로운 과정을 보여준다. ‘콧털’이라는 별명으로 호명되는 지은이가 인류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권투를 배워가는 한 사람으로서 ‘관장님’을 비롯한 ‘챔피언’, ‘스피드 머신’, ‘빼빼’, ‘청년복서’, ‘할배’ 등의 관원들과 주고받는 권투에 관한 대화는 독자를 생생한 권투의 현장으로 안내하며 권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비록 세계 챔피언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왜 굳이 때리고 맞아가면서 권투를 하는가?’라는 부제의 물음은 지은이가 사각의 링과 마루와 ‘빽’으로 이루어진 거인체육관이라는 공간에 길들여지고, 스스로의 몸을 거인체육관의 몸 기술에 길들이는 모방-반복-반성의 과정(섀도복싱)과, 체육관 사람들과 서로의 몸을 맞부딪침으로써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스파링)을 거치며 거인체육관의 권투를 점차 몸에 새겨나가게 되면서 ‘나는 왜 거인체육관에서 굳이 때리고 맞아가면서 권투를 하는가?’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지은이가 찾은 해답은 “나는 여기서 다시 새로 태어날 수 있다. 즉 권투 세계에서 요구하는 객관화의 과정에 들어섬으로써 나는 발생의 시작점에 다시 놓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완성의 상태에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생한 감각, 즉 “나는 살아 있다”는 감각은 곧 체육관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어 “우리는 살아 있다. … 우리는 함께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진다. 비록 세계 챔피언이 아닐지라도, 세계 챔피언이라는 ‘꿈같은’ 꿈이 깃든 거인체육관 안에서 체육관 사람들은 오늘도 함께 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