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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지막 불꽃
주인이십니까 원수이십니까! 죽마고우 한 뿌리 두 나라 2부 꺼지는 불꽃 김유신의 용간(用間) 세작들 세상 황산벌의 비극 올무 웅진성 3부 끓어 오르는 동아시아 주인 잃은 싸울아비들 임존성 전투 왜의 참전 흑치상지를 잡아라 백강 위의 4강전 4부 격랑 속의 영웅 새 아들과 새 아버지 싸울아비들의 이별 방법 고국을 떠나며 의로운 살인 5부 唐장군 흑치상지 백제 유민 특공대 백제가 토욕혼이다 뱀의 대가리를 쳐라 질긴 인연 반간(反間)과 마중물 부대 모여드는 먹구름 대장군의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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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마마, 아니 웅진도독, 용서하십시오.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낡았지만
제가 입고 있는 이 자색 공복과 은화관(銀花冠)을 보십시오. 이 자색은 무엇을 뜻합니까? 400년 전 고이 왕께서 관복을 정하신 이래 백제의 솔계(率係) 관직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자색 도포에 청 색 바지, 머리에는 금화로 장식된 비단 관을 쓰고 계셔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제복은 도대체 어느 나라 복식입니까? 누가 이 목숨 바쳐 호위해야 할 임금을 잡아갔습니까? 누가 이 생명 바쳐 지켜야 할 수십만 백성의 고귀한 몸을 겁탈하고 채찍질과 칼질로 생명을 앗아갔습니까? 누가 내 아비 흑치사차 와 아내 그리고 아들들을 난도질해 매일 밤 이 몸을 날로 지새우게 만든 것입니까? 지금 나라 안에 궁궐 이건 절이건 가옥이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 어느 것 하나라도 남아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왕으로 다시 모시기 위해, 당신의 나라인 백제의 복국을 위해 당신의 백성 수십만 명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불쑥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까, 아니면 나의 원수입니까?” -- pp.27-28 황해 바다는 온갖 깃발을 휘날리며 끝없이 이어지는 당선의 행렬로 움직이는 강이다. 3개월 전과는 반대 방향이다. 그 선두는 커다란 ‘將’과 ‘唐’ 자가 새겨진 기함이다. 백제 정복 총사령관인 대총관 소정방이 타고 있는 배다. 그는 기대 이상의 전공을 세웠다. 적국을 멸망시키고 왕과 태자를 생포해 귀국하는 길 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전승의 기쁨으로 어우러진 당당한 노장의 모습과 함께 한 줄기 어둠이 깔려 있다. 소정방은 백제의 왕족, 귀족뿐 아니라 1만 2천여 명의 귀중한 인재를 잡아갔다. 그리고 그가 가져 간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흑치상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니 두려움에 서 더 나아가 경외감이었 다. 장검(長劍)을 지팡이 삼아 갑판에 서서 황해 바다 속에 점점 멀어져가는 백제 땅을 주시하고 있는 소 정방. 그의 입은 망가진 축음기처럼 같은 소리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7 “흑치상지, 흑치상지!” “으흠, 흑치상지라!” -- pp.142-143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700년 넘게 한 해도 안 쉬고 서로를 죽여 왔잖아. 우리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너무 오래 싸운 거야. 백성들이 전생에 무슨 그리 큰 업보가 있다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군역으로 모진 고생을 하며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다가야 하는 거야? 우린 서로 간에 너무 너무 긴 시간 동안 뼛속 깊이 원한을 쌓아왔어. 이 원한이 풀리려면 700년 갖고는 모자랄 거야. 아니 700년의 두 배가 지나도 안 풀릴 거야. 벌써 누군가에 의해 통일이 되었어야 했는데. 여지껏 서로를 죽여가며 싸워온 결과가 뭐야? 결국 제3세력을 끌어들여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만 것이 아니겠어? 백제사람 모두 너무 억울하겠지만 나 자신도 억울해 미치겠어. 형도 알지? 나보다 적들에게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사람도 많지 않아. 난 가족 대 부분을 잃은 사람이야. 하지만 이제 끝내야 할 시간이야. 이러다 백제사람 뿐 아니고 한반도 내에 사람 씨가 마를 거예요. 형, 난 죽어서라도 백제 유민들의 마지막 보호막이 될 거야. 불쌍한 우리 백제 사람들 을 위해서 말이야.’ --- p.208 연미는 앓아누웠고, 만치는 하옥되었다. 만치는 참수형으로 목이 베여 죽지 않으면 곤장을 맞아 장독(杖 毒: 매를 심하게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죽게 될 운명이다. 그는 지방장관의 자식을 병신으로 만들었 을 뿐 아니라 임의로 진영을 이탈한 큰죄를 이중으로 저지른 것이다. 며칠 후 재판이 열렸다. 재판관은 당연히 풍달군장 흑치상지다. 만치는 끌려나와 정신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다. 형리는 만치의 죄상을 고 해 바치며 참수를 주장한다. 만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표정에 변화가 없다. 드디어 흑치상지의 판결이 내려진다. “피고는 진영을 임의로 이탈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죄가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볼 때 의 도적으로 한 일은 아니다. 피고를 장형 1대에 처한다.” 판결문을 써내려가는 그의 탁자에는 《손자병법》의 〈지형편〉이 펼쳐져 있다. ‘視卒如愛子 故可與之俱死(병졸을 사랑하는 자식처럼 보라. 그러면 그는 기꺼이 함께 죽으려 할 것이 다.)’ 재판관 흑치상지가 먼저 자리를 뜨고 난 후 형리들도 죄인의 손발을 묶었던 줄들을 모두 풀어주고 자리 를 떴다. 하지만 문휴만치는 곤장틀에서 내려올 기색이 없다. 겨우 한 대를 맞았으니 고통이 심해 움직 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지만 억울해서 우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 이 볼기를 깐 채 넓은 마당 한가운데 놓인 형틀에 엎드려 있는 것도 잊은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그는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을 끄적거리며 땅바닥에 뭔가 쓰고 있다. ‘以死로써 報恩하리라.’ --- p.215 그러나 당군 안에는 이때를 기다려 온 작은 무리가 있었으니 원외군으로 참전한 흑치상지가 이끄는 백 제 유민군이었다. 이미 초죽음이 된 이경현 앞에 선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구세주의 모습이었다. 하나 는 7척의 키에 열 평은 됨직한 가슴팍, 뚜렷한 이목구비에 상대방을 꿰뚫는 눈매. 다른 하나는 작지 않은 키에 당당한 체격, 굵은 팔뚝은 실뱀 모양의 핏줄이 울퉁불퉁하며, 몸통 위에 붙은 짧은 목은 머리통보다 더 두껍다. 이경현이 눈이 둥그레져서 말한다. “그래, 자네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로를 내보겠다는 것이냐?” 흑치상지가 눈에 힘을 주며 대답한다. “예, 저희 말장들이 해낼 수 있습니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내 마음속에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미 수십 차례 실패했다. 그리고 설인귀 나 유심례 같은 명장들도 모두 실패하지 않았느냐?” “최선을 다한다면 못 이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혹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적 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작전계획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명이 아니고 대총관께서 오늘 밤 직접 보시는 가운데 적을 내쫓아 버리겠습니다.” 우리 군사들 중에 이런 걸물들이 있었던가. 즉시 이경현은 흑치상지의 작전제안을 받아들였다. -- pp.280-281 면은 의자를 바짝 당기며 묻는다. “궁금한 것은 병사들을 부리기가 이처럼 쉬운데 왜 그리도 훌륭한 장수들이 없는 겁니까?” 흑치상지는 한동안 껄껄 웃더니 대답한다. “좋은 질문이다. 사람들이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너무 작 은 욕심을 좇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어차피 땅에 묻혀 벌레밥이 될 몸뚱이가 아니냐? 그 고깃덩이가 요구하는 대로 기름진 음식 넣어주고 번쩍이는 옷으로 둘러싸주느라 정신이 없다. 이것이 결국 사람들 의 욕만 먹는 싸구려 욕심이란 말이다.” 면은 눈이 말똥말똥해 흑치상지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좀 더 이야기한다만, 난 원래 좀 음흉한 편이다. 나는 큰 욕심을 부리고 있다. 금 덩어리 몇 냥으로 내 마음 속에 있는 무저갱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난 내 상관과 부하들로부터 사 랑을 받고 싶다. 더 나아가 존경을 받고 싶다. 죽음도 빼앗아갈 수 없는 명예를 갖고 싶은 거다. 일시적인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엄청난 욕심쟁이다. 그래서 난 내 부하들을 나만큼 사랑한다.” -- pp.310-311 모두들 마음껏 울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서로가 불쌍해 울었다. 발을 구르며 울었다. 아무도 달래지 않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실컷 울었다.한참이 지난 후 푸석푸석한 얼굴로 흑치상지가 묻는다. “반지는 언제들 만들어 꼈느냐?” “형님, 옛날에 저희들이 당으로 떠나기 전에 잘 아는 세공장이에게 부탁해서 네 개를 만들었던 겁니다.” 상지는 고개를 끄떡인다. “죄송합니다. 형님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저희들끼리 만들어 하나씩 만들어 여지껏 끼고 다녔습니다.” 모두들 문휴만치를 찾아 다시 흩어진다. 군사들이 아직도 연기가 사라지지 않은 전쟁터로 모습을 감추 니 주위가 조용하다. 흑치상지는 동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쉰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린다. 우리가 어찌 백제를 잊으랴! 우리가 어찌 백제를 잊으랴! 我們如何忘記百?! 我們如何忘記百?! --- p.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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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7척 장신, 백전백승 백제 싸울아비 흑치상지의 소리없는 외침이 있다. 백제에서 버림받고 당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비운의 장수 이야기다. 우리 역사 속에는 한 줄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는 백제와 당나라를 아울러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무인으로서 살아온 육십 평생 동안의 무패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성품이다. 문무를 겸비한 장수이자 평생 한 치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산 위대한 리더였다. 모든
병사들이 흑치상지의 휘하로 들어가 전투에 나서고 싶어 했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를 존경했다. 흑치상지가 인간의 경지를 넘는 완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 황제는 ‘백제의 의자, 그 녀석 반푼이 아니었나? 어떻게 흑치상지를 갖고도 나라를 잃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에서 그의 전적과 직위가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흑치상지의 마음속에는 칡뿌리보다 더 질기게 살아 남아있는 단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백제’다. 오죽하면 그의 애마 이름마저 ‘물망제(勿忘濟)’였을까? 의자왕, 태자 부여융 그리고 부흥군 대장 복신, 왜국에서 달려온 부여풍왕에 이르기까지 백제 패망을 전후해 아무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위해서 싸우다 죽을’ 주인도 없었고 배신할 나라도 없었다. 그는 처음 백제 장군으로 소정방을 두 차례 굴복시킨 것을 시작으로 연승 끝에 마지막으로 당의 대장군으로서 대돌궐전을 역사적인 대승으로 이끌었다. 그후 아끼는 부하가 전사한 것을 알고는 백제 출신 부하들과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한 후 가라앉은 쇳소리로 외친다. 我們如何忘記百?! 우리가 어찌 백제를 잊으랴! 이런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 백제에 버림받고 당을 위기에서 구한 흑치상지의 역대기 소설 《대장군 흑지상지》는 나라 잃고 적국 당나라에서 그 능력을 펼쳐 보일 수밖에 없었던 슬픈 영웅의 장엄한 일대기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여지는 것처럼 흑치상지도 전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위대한 장군이다. 하지만 작가가 흑치 장군에 대한 글을 쓴 이유는 단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제대로 된 인재를 가려서 활용하고 키울 줄 모르는 지도자가 그 나라와 국민에게 어떤 불행을 주는지, 또 능력 있는 인물의 생애를 어떻게 휘저어 놓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더불어 제갈공명이 군사행동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꼽은 것처럼 간첩을 활용하고 간첩을 잡아내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기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부여를 계승한 백제와 왜가 서로 어떻게 도와서 한 뿌리를 지켜나갔는지, 좁은 한반도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분쟁을 치르는 동안 죄없는 백성들이 어떻게 스러져갔는지, 한 나라가 멸망하는데 간첩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탄탄한 문장력과 깊이 있는 구성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의자왕이 세작들에게 농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풍왕이 흑치상지의 능력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그를 잘 활용하기만 했어도 우리 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백제와 왜 뿐만 아니라 신라와 중국대륙의 역사까지도 아주 달라졌을지 모른다. 한중일 영토·역사분쟁으로 동아시아가 들썩이고 있는 요즘 같은 시기에, 역사에서 잊혀진 흑치상지를 재조명해보며 올바른 역사의식과 국가관, 제대로 된 인재 활용에 관해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